21. 자유를 향한 고대인의 기록들

길가메시,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

by 이민영

자유를 향한 여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제이고, 인간의 문명이 출현한 이후 부터 해결해야할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말할 때 공동체에 속해 있는 개체들이 자유로운 신분이어야 한다

자신만의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스스로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공동체 안에서 제한되었고, 신분에 따라 자유가 박탈되었다

인류의 최초 기록물에서 조차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고, 침략과 복속이 자행되었다

차별과 불평등은 고대 문명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농업혁명은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문명을 발생시켰고, 동시에 지배계급과 폭력적 통치체제가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인류최초의 기록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형성된 도시국가에서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땅을 의미하며, 이곳에 농업이 시작된 이후 약7천4백년前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큰 마을이 생겼다.

큰 마을은 에리두(Eridu)라는 도시로 커졌고, 바다에 인접한 그곳에는 농부와 상인, 어부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큰 신단을 조성해 신에게 제물을 바쳤고, 에리두의 신은 엔키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엔키는 인간의 창조주이며 인간을 대홍수로부터 인간을 구한 구세주로 알려져 있는데, 악카드어로는 에아(Ea)라고 부른다.

약 7천년전에 이르면 우루크(Uruk)라는 큰 마을이 에리두 북서쪽 강 건너편에 생겨났고, 거기에도 신전이 들어섰다.

에리두 바로 위쪽에도 우바이드(Ubaid)라는 마을이 생겨났다.

메소포타미아 고대도시 위치

이들은 물길을 따라 곳곳을 연결하는 운하망을 건설했고,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우바이드에서는 토기가 유행했고 이들의 생필품과 사치품은 다른 곳으로 수출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문화는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고, 세상사람들은 남부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에리두가 생겨난지 1000년이 지난 6000년전에 우르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우르크는 에리두를 정복한 이후 그들이 섬기는 인안나(Inanna)를 위해 큰 신전을 지었다.

신전은 삶의 중심이었고 모든 고통을 덜어주는 곳이 되었다.

우루크 사람들은 작은 마을을 통합해 가면서 도시를 확장해 갔다.

이곳은 풍요로운 땅이었고 생존을 위해 다른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소문은 주변 유목민들에게 전해졌고, 방랑의 삶을 끝내고 정착하려는 사람들이 남부 도시로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점점 더 도시는 커져갔다.

최초의 문명이 형성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를 건설하고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루크는 수메르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초의 도시'를 말하자면 우루크를 떠올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 출현 시기는 우루크시대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역사 수메르, 2021년, 김산해.. 휴머니스트출판그룹 발행>


인류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는 우루크시대 유명한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문자를 사용했으며, 통치체제와 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렵이나 목축을 하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살면서 그들은 더욱 더 신들에게 의존하는 삶이 되었다.

한해 농사의 결과는 그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독한 가뭄이나 홍수는 모두의 삶을 위협하는 고통이 되었다.

재난은 신이 노하거나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모두가 기아와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유프라테스 강줄기는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 물길이 말라 갔고, 공동체에서 물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물을 끌어들일 큰 운하가 필요해지면서 사람들을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점차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는 신전의 대사제에게 돌아갔다.

사제들은 도시의 주요한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도시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에 살면서 신과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권력을 갖게 되었고 도시의 왕이 되어갔다.

농업혁명은 도시를 만들었고, 대사제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지배층이 되었다

농사는 사람들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한편으로 신분의 차이와 불평등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류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를 지배했던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1852년 영국의 탐사 팀은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세운 니네베 도서관에서 아카드어로 된 길가메시 서사시의 점토판을 발굴하였고, 1872년 점토판이 번역되었다.

길가메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입에서 입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기 따로 수천 년을 전해지던 이야기들이었고, 이런 이야기를 처음 채록한 이들은 수메르인이다.

이들 이야기들을 오랜 세월이 지나 바빌로니아 시대에 순서대로 줄거리를 짜 서사시로 정리한 것이 현재의 길가메시이다

길가메시는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의 왕으로 반신(半神)이었으며, 잘생기고 총명한 데다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온 세상을 여행하고 우루크로 돌아온 길가메시는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다는 사실에 취해 자만에 빠져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사람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고, 남자들은 다 두들겨 패며 폭력이 일상화 되었다.

길가메시의 폭정

결혼하는 처녀들의 첫날밤을 자신과 보내도록 하는 초야권도 가지고 있었다

우루크 사람들은 이미 왕의 제도화된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루크 농민들은 신들에게 길가메시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도시는 그의 소유이며 그는 그곳을 들소처럼 오만하게 고개를 높이 들고 과시하듯 걸어 다니며 시민을 짓밟는다.

길가메시는 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지배자였다.

이유도 없이 우루크의 젊은이들을 괴롭혀 아들이 마음대로 아버지에게 가지도 못하게 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中에서)


당시 농민들도 자신의 고통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기록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

“나는 순종 말이다. 하지만 노새에게 묶여 수레를 끌고 잡초와 그루터기를 날라야 한다.”

농민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한편 길가메시는 다른 집단과 전쟁을 수행하는 지도자였다.

우르크 5대왕이었던 그는 우르크와 경쟁했던 키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수메르 최강자로 등극했다

서사시에서도 전쟁은 매우 고귀한 행위이자 명예로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길가메시 이야기에는 삼나무 숲 괴물 훔바바를 정복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괴물 훔바바가 살고 있는 삼나무 숲으로 떠나야 한다. 우리는 그 괴물을 죽이고 세상에서 악을 몰아내야 한다.”고 그는 선언한다

싸움에서 패배한 훔바바는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숲에 있는 나무를 모두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길가메시는 훔바바를 잔인하게 찢어 죽이고 만다

실제 수메르의 초기 왕들은 사제로서 천문학과 제의를 주관하는 신관에서 출발하여 점차 전쟁 을 지휘하는 지도자가 되어갔다.

문명은 사람들을 지배자와 피지배층으로 갈라놓았고, 도시국가들간의 전쟁을 통해 복속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인류역사에 문명이 발생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지배와 예속이 나타나고, 인간의 자유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길가메시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삶의 지혜도 등장한다

여행도중에 만난 지혜의 여신이었던 시두리에게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듣는다

시두리는 길가메시에게 불멸영생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하면서, 신들이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주었고, 언제 죽을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죽음을 거부할 수 없고,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현실 속의 작고 평범한 행복을 즐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충고한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일이야말로 사람들 모두가 갈망하는 삶이며, 고대 도시에서 인간의 자유는 평범한 일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두리가 지혜의 여신이 된 것은 이런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도시국가에 새로운 통치체제가 들어선 이후 사람들은 예전에 없던 신분에 얽매이게 되었고, 공동체에 형성된 제도와 법에 따라 살게 되었다.

자유롭게 살고 행동하는 자유민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배와 구속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커지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에서 시작된 불평등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기간 존속해 왔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이성적 결과물이 아니고, 사회체제가 만들어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사람들에게서도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BC5세기경 서양에서 그리이스 철학이 탄생할 무렵에, 중국에서도 제자백가 사상이 출현하는데 여기에서도 자유에 대한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한 도가사상에서 사람들의 자유로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혼란한 중국사회에서 제자백가 사상은 서양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용적 학문이었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국가 통치 문제에 집중하였다

제자백가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으로 인해 많은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를 갖게 되었다.

고대 국가들은 대규모 전쟁에 전쟁 물자를 동원하느라 늘 주민들을 수탈하고 징발하는 전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중국의 제자백가는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안고 시작되었다

혼란한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나라는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은 자유로운 인간과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자의 ‘도(道) 사상’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개념이 있다

도가사상에서는 사람이 만들어낸 人爲와 자연의 법칙인 無爲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법률, 선과 악으로 나눈 가치, 전통과 관습으로 굳어진 문화 등이 人爲이며,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스러운 삶을 강요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無爲를 人爲 대신에 내세우는 것인데, 자연에 내재된 질서에 주목하고, 이를 인간의 삶과 사회에 적용하고자 한 것이다.

서양에서 자유주의와 비견될 수 있는 동양의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국시대에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자가 주나라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해 물었다는 일화이다

노자를 찾아간 공자

이 일화는 중국의 고서 ‘사기열전’ 등에서 언급되어 있고, 공자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노자는 이미 머리카락이 빠진 노인이 되어있었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아직 젊은사람들이다

공자는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묻자, 노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노자는 공자에게 ‘예’가 허례허식(虛禮虛飾)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공자를 향해 위선과 욕망을 버리라는 독설을 했다고 전한다

반면 공자는 노자의 말에 매우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유가에서 공자의 노자면담을 중시하는 이유는 공자가 가르침을 얻는데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자의 포용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실 두사람의 만남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유가와 도가, 두사람의 대가가 만났는데 누가 더 자유로운 사상가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노자는 주나라에서 오늘날 왕실 도서관장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냈고, 그의 역할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자는 주나라를 이상국가의 모델로 생각했고, 노자 역시 주나라 출신으로 공자의 예절과 법도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찾아간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옛질서를 중시했고 주나라 예법을 삶의 근본 원칙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노자는 한마디로 허망한 일로 치부하고 오히려 예법을 버리라고 충고한 것이다

공자가 인간에게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본성이 어진 마음(仁)이었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안을 주나라 예법에서 찾았다.

그래서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고 했는데, 노자는 그의 예법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예법을 강요하게 되면 사회적 기준이나 척도로 작용해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개인들의 자발적인 생명력이 발휘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노자 도덕경)

예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틀이 되고 만다.

유교가 지배한 조선사회의 모습을 보면 그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

노자는 공자에 비해 특정한 이념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사고를 가졌움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가사상의 무위자연은 완전한 자연 회귀나 자유방임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무위자연은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 일이 결코 아니며,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탐욕과 폭력이 만들어낸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道는 현실을 초월한 이상사회를 제시한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절대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 걸어가야할 길에 대해 ‘德’을 갖춘 인간형을 강조한다

언제나 욕심이 없어야 하고, 만물을 차지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도가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상적 풍모라고 한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세상을 전쟁으로 몰고간 원인으로 보았으며, 인간을 지배하려는 야망이 전국시대의 분열과 패권 경쟁을 낳았다는 현실판단이었다

아쉽게도 노자의 도덕경은 추상적 내용으로 기술하고 있어, 사상의 실체에 접근이 쉽지는 않았다


장자 역시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중국 특유의 풍자와 과장을 사용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장자는 많은 이야기를 자신의 의중을 전달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글을 우원(寓言) 형식이라고 한다

장자의 이야기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자유로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천하를 놓고 제후국들이 패권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기였다

사람들은 전쟁과 기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장자는 고향에서 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하찮은 관직에 잠시 머무른 것 외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생업에 매달리지 않았던 탓에 평생 가난 속에서 보냈다

호구지책을 위해 복수(僕水)에서 물고기를 낚기도 하고, 식량과 바꿀 땔감을 얻기 위해 제자들과 높은 산을 자주 오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재물이나 권세를 욕망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대로 사는 삶이었다


장자의 삶에 대한 태도는 다음의 이야기속에 잘 드러나 있다

초나라의 위왕이 장자의 명성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재상의 자리를 약속하며 자기 나라로 올 것을 권했다고 한다.

장자는 사자를 통해 이같은 제안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천금은 확실히 귀한 재물이며, 재상의 자리는 높은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소를 보지 못하였습니까?

몇 해 동안 호강하다, 꽃무늬 비단을 쓰고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에야 그는 차라리 한 마리의 돼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물러가십시오

나는 오히려 진흙속에서 헤엄이나 치면서 노닐지언정 권력자에게 구속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재상에 오르는 일을 제물로 바쳐지는 귀한 소에 비유하였다.

다른 소와 달리 귀하게 대접받고 좋은 음식을 먹지만 결국에는 제단에 바쳐지는 운명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흙속에서 구를지언정 구속없는 인생이 훨씬 좋다고 말한 것이다.


장자는 소위 진리 또는 성현의 말씀이라는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명백한 진리라고 믿는 것도 한번 의심해봐야 하고, 진리라는 것도 지근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제나라 환공과 수레공 윤편이 나눈 이야기에서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느 날 제(齊)나라 환공이 대청마루 위에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

윤편 이야기 (EBS 장자수업)

윤편(輪扁)이라는 수레공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씀을 담은 책이다.”라고 답하자, 윤편은 “그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이에 환공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편은 “그렇다면 대왕께서 읽고 계신 책은 아마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네놈이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성인들의 책이 찌꺼기인 이유를 이치에 맞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자 윤편이 대답했다.

“제가 평소에 하는 일의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의 감각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바로 그사이에 비결이 존재합니다.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옛 성인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이나 진리는 성인이 살았던 시대에 유용한 것이지, 세상이 바뀌면 이미 쓸모없는 것이 된다고 장자는 결론지은 것이다

옛날 기준과 원칙으로 현실을 제단하지 말것으로 주문한다.

책속의 글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다만 과거의 경험을 전달할 뿐이다

새로운 지혜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새로운 노력과 수고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 것이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비법을 전달할 수 없으며, 스스로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자유로움은 특정 사고체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자신만의 지혜를 갖춰야 얻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장자 스토리 가운데에 오상아(吾傷我)라는 특별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말에는 사람들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독자적인 사고와 지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현대의 다원주의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며, 모두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하나의 신념체계에 얽매이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고 보았다

장자는 자기자신을 가르키는 한자 ‘아(我)’와 ‘오(吾)’를 구분하여 사용했다.

‘我’는 기존의 가치관에 매몰된 자신을 말하고,이런 我를 장례지내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 ‘吾’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오상아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은 생각이 자유로운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국 고대 제자백가의 중심적인 메시지는 어지러운 시대에 험난한 시절을 보내는 모든 인간들을 위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가에서 추구하는 사상도 일반 사람을 향하지만, 도가의 접근방식도 국가와 통치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통치자 또는 지배층인 귀족의 입장에서 일반 백성들을 구제하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노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고, 이상적인 통치체계는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소국과민에 대한 구절이 소개된다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열 가지 백 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백성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가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낼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며 살도록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소국 과민은 작은 땅에 적은 백성이 모여 사는 국가를 말한다

소국과민 사회에서는 전쟁의 비참함이 없고, 통치자의 폭정도 없고, 사람들이 과욕을 부리며 다투는 일도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광대한 영토와 통치 백성을 늘리려던 당시 제후들의 목표가 모든 전쟁과 재앙의 근본이 되었다고 보았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소국과민을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했다

노자의 도(道)에 자연의 순리에 순응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도에 눈을 뜨면 덕(德)을 지니게 되는데, 덕을 지닌 사람은 다스리지 않아도 모든 일을 이룬다고 하였다.

노자는 덕으로 다스리는 통치 방식을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했다

인간사회에서 자연의 순리가 실현되면 사람들의 자유가 보장되는 길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소국과민은 전란에 시달리던 인간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이나 가혹한 통치가 없는 사회를 희망했다

소박한 삶이 그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었다


전국시대 묵가 집단은 인간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제기한 사상이었다

묵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철학자이며 사회혁명가이며, 과학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묵자에 의해 탄생한 묵가사상은 전국시대 가장 유력한 학파였고, 대중들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묵가사상이 대중적 인기를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유교의 대가 맹자는 당시 묵가사상의 유행에 대해 "묵자(墨子)와 양주의 사상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顯學)은 유儒)와 묵(墨)이다"라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는 묵가사상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류사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묵자는 또한 고대 중국의 과학기술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묵자의 과학은 고대 서양의 과학기술 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되며, 서양인들에게 묵자는 고대 중국의 과학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이 2016년에 쏘아 올린 세계 최초의 양자통신 실험위성의 이름을 ‘모쯔호’(墨子; Micius)라고 지었다

묵자의 이름을 딴 이 위성은 2년 동안 우주-지상 간 양자통신 실험을 진행하였다.

중국은 묵자가 현대 물리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사실을 2400년 전에 언급한 과학자라고 점을 언급하며, 위성 명칭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설명했다

묵자의 과학기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광학 기술이다


현대 카메라의 기원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데, 캄캄한 방의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빛을 통과시켜서 바깥의 풍경을 거꾸로 비치게 한 것이다

묵자는 빛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 이미지

“그림자, 사람을 비춘 광선은 화살처럼 직진하여 한 점에서 엇갈리므로 사람의 아랫부분을 비춘 빛은 높이 올라가고 사람의 윗부분을 비춘 빛은 아래로 내려간다

그림자의 크기는 피사체의 빛과 그 빛이 모여 엇갈리는 구멍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

그래서 그림자는 구멍을 지나 장애물 안에 생긴다”

광학 기술이 서양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11세기 이슬람의 과학자 이븐 알 하이삼이 쓴 ‘광학의 서(Opticae thesaurus)’에서 기술되고 있다.

묵자의 기록은 '광학의 서' 보다 무려 1500년 정도나 앞선다

묵자는 과학적 지식으로 객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간의 삶도 현실생활에서 조명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묵가 사상의 핵심내용을 대표하는 용어로는 겸애(兼愛)와 교상리(交相利)라는 낯선 단어이다.

겸애는 기독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박애(博愛) 또는 자비(慈悲)와 비슷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만, 뜻이 좀 다르고 우리가 잘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일부에서는 겸애를 예수의 사랑 ‘박애’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려 하지만,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르며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정신적 감성적 의미가 아니다.

겸애를 말할 때 항상 ‘교상리(交相利)’를 같이 말하는데, ‘교상리’란 서로(相) 이롭게(利) 하는 관계(交)라는 뜻으로, 겸애는 현실에서의 상호 이익과 결부되는 개념이다

묵가의 사상은 경제적 이익, 물질적 이익을 중심에 놓는다

사람의 욕망과 욕구는 기본적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바람직한 사회는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을 보장해주는 사회체제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묵자는 당시 피지배층이었던 민중이 겪는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민중이 겪는 고통은 세 가지 고통으로 삼환(三患)이라고 하였는데, ‘추운 자 입지 못하고, 일한 자 쉬지 못하고, 배고픈 자 먹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사람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가장 중시했다.

다른 제자백가 사상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층의 입장에서 부국 방법론을 내세우는 것이었지만, 묵가는 일반 평민의 입장에서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 민생문제를 중시한 것이다.

공자의 유가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면 정치적 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의로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가사상과는 정반대로 의(義)라는 것은 경제적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반박한다

‘義’는 정당한 기준에 따라 분배되고 공유하는 이익이다

공동체 구성원은 그들이 생산하는 이익과 생산물을 공유해야 하며, 독점되고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不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묵자의 의로움은 경제적 자유를 의미하며, 사회체제 역시 그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의로움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정(義政이)라고 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역정(逆政)이라고 구분한다.

의정은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빼앗지 않으며, 강한자가 약한자를 강탈하지 않고, 귀한자가 천한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꾀많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역정은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왕정과 통치체제도 의로움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하늘이 왕에게 권위와 권력을 부여한 이유는 인간 사회의 의로움을 구현하라는 의미이며, '의정이 곧 天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묵자는 인간은 동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인간은 ‘일해야 살 수 있는 존재’ 노동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체조건과 능력으로 생존할 수 있지만, 인간은 생산을 통해 정당한 몫을 배분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고 분업하며 살게 되고, 사회 체제는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사회통치체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구를 보장해줘야 한다

인간은 모두가 기본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인데, 각자가 자기만의 몫을 키우는데 급급하면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된다

공동체가 커지고 구성원들이 늘면 각자의 욕망과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통치체계가 필요하다

통치 권력과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넓은 지역과 많은 사람들을 잘 다스릴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통치권력은 민중들이 직접 통치의 주체로 나서지 않는다고 보았고, 현명한 왕의 통치를 기대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왕은 능력있는 현자들을 육성하고 등용해야 하고, 왕과 관료들이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훌륭한 통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체제의 지향점을 그들은 상동(尙同)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똑같은 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동일함(同)은 인간은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대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공동체 내에서 각자 구성원들은 동일한 이익을 보장받아야 한다.

왕과 통치체제, 법과 도덕은 바로 동일함을 추구해야 하고, 이렇게 해야 의(義)가 구현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정치에서 상동은 인민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며, 왕과 지배층의 임무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다스리는 행위이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천하의 의를 하나로 만들 지도자가 인민에게 없기 때문이다. 천하에 가장 현명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우며 말 잘하는 사람을 골라 천자로 세워야 하며, 천하의 의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해야한다”

(묵자 상동편)


묵자의 사상은 당시 전국시대 중국에서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대중적 지지를 많이 받았다

묵가는 사람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하는 것, ‘빈곤으로 부터의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전쟁과 가난으로 가장 고통받고 유린당한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나온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어떤 정신과 감정을 중시할 때, 묵자는 경제적 요구를 앞세운 것이다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요구, 자신을 폭력으로부터 지켜줄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빈곤과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자유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고대 중국 묵자사상에서는 자유의 근원이나 기초를 사람의 이해관계 특히 물질적 요구라는 점에 착안해 형성된 사상이다

평등한 인간관계, 정의로운 사회체제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답이었다

고대인들의 자유로움은 공동체안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 욕망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최초의 기록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에서도, 중국 고대 제자백가 사상에서도, 사람의 자유로움은 공동체 안에서 부터 출현한 욕망의 결과였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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