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구 자유주의의 출발

라파예트와 콩스탕

by 이민영

근대 자유주의의 근원


자유주의의 출발은 18세기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근원은 계몽주의 사상이다

중세시대 ‘신 중심의 세계관’이 와해되었고, 근대에 들어서면 사람의 자유로운 삶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역사학자 헬레나 로젠블랫은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에서 자유주의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리버럴 한 사람이고 자유주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자유주의란 단어는 프랑스혁명 이후 1811년경에 프랑스 사상가 라파예트와 콩스탕 등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서양에서 자유주의 전통이 있었다

서양에 약 2천 년 전부터 ‘리버럴’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고대 리버럴의 의미와 내용은 조금 달랐다

자유주의라는 말의 뿌리는 고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리버럴(liberal)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는 ‘리베랄리스’(liberalis)이며, 명사형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이다

‘자유로운 자로 태어난 사람에게 걸맞은 덕성’을 뜻했다고 한다.

자유로운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자유 시민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동료 시민을 고귀하고 너그러운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리베랄리타스였다.

자유시민은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관용의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인간, 도덕적 용기와 자기 절제를 실천할 줄 아는 인간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로젠블렛은 로마 정치가 키케로가 쓴 <의무론>에서 자유주의의 근원을 찾고 있었다

‘노블레스오블리주’ (Noblesse oblige)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는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했다

이러한 행동은 의무이자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를 ‘공공선의 증진,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이기심을 넘어서는 도덕적 성숙’으로 압축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단지 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생이나 공존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자 전통과 다르며, 자유주의 전통은 오늘날의 기득권 집단이나 이데올로기 집단과는 더더욱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라파예트


18세기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유명한 인물이 라파예트이다

본명은 마리조제프 폴 이브 로크 질베르 뒤모티에 드 라파예트로 매우 길고 외우기도 힘들어서, 흔히 라파예트 후작으로 불린다

라파예트는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리는데, 두 세계는 유럽 대륙과 신대륙 아메리카를 의미한다


라파예트는 어려서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하여 미국과 프랑스에서 영웅이 된 사람이다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귀족 작위와 재산을 상속받았고, 열여섯 살 때에는 명문 귀족의 딸과 결혼했다

라파예트는 10대부터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당시 유행한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했었다

1775년 시작된 미국의 독립전쟁은 젊은 계몽주의자들을 흥분시켰다

라파예트는 프랑스의 젊은 귀족들과 함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기로 맹세했다

젊은 계몽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참전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젊은이들의 참전요청은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라파예트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털어 배를 사들인 후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향한다

프랑스 귀족이 미국 독립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라파예트는 1777년 필라델피아로 가, 미국의 임시정부였던 대륙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불과 19세인 데다 전투경험도 없는 젊은이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라파예트는 대륙 군의 말단 병사 자격으로라도 참전하고 싶다며 설득했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대륙 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워싱턴 장군은 라파예트에 대한 호감을 보이며, 풋내기 젊은이를 소장에 임명하여 그의 참모로 삼았다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조지워싱턴의 이 선택은 나중에 프랑스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귀족출신 라파예트는 전쟁터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일선 지휘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참가한 라파예트의 활약상은 프랑스에 전해져 열광적인 반응으로 이어졌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인 요크타운전투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다

요크타운은 버지니아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영국군의 보급과 통신의 중심지였다

라파예트는 요크타운을 포위하고, 포병을 동원하여 집중 공격을 가하는 전략적 포위 전술을 전개했다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1781년 10월 최종공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았다

영국군 약 7천 명의 포로를 생포하며 독립전쟁의 최종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 귀국할 때에는 ‘신대륙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도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프랑스에서도 혁명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라파예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 때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라파예트는 삼부회가 소집될 때 귀족대표로 참여했으나 평민들과 함께 행동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직후에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었는데 라파예트가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혁명기간 동안 국민방위군은 질서유지와 자위 부대 역할을 담당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혁명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기초하는데 참여했다

최초의 유럽 인권선언이며 인간의 기본권을 구체화하였다

미국 독립선언과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이 컸다

라파예트가 초안을 작성할 당시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과 교류하며 조언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한 자유주의 질서를 의도했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자유의 개념은 인간이 갖는 고유한 권리로 구체화되었다.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내용은 인권선언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기본권은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하나하나의 권리를 신성한 것으로 선포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로는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자유의 범위는 이렇게 규정한다.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며, 각자의 자연권의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같은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는 이외의 제약을 갖지 아니한다.

그 제약은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한을 갖지 아니한다.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방해될 수 없으며, 또 누구도 법이 명하지 않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자유주의의 원칙이 정립된 것이다


프랑스혁명 초기에 라파예트는 많은 활동과 성과를 남겼지만, 혁명과정에서 점점 대중의 지지를 잃어가게 된다

1791년 루이 16세가 파리에서 도망쳐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민중들에게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는데, 라파예트는 경비 책임자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추궁을 받게 되었다

6월 파리에서 라파예트가 이끄는 국민방위군과 급진파 혁명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파리시민들이 다수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라파예트가 폭력사태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1792년 프랑스혁명은 이미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급진적 공포정치로 진입하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왕정을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입장이었므로, 급진적인 혁명 세력인 자코뱅과 대립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시민들은 루이 16세를 폐위시키고자 혁명 군과 함께 왕궁인 튀일리 궁전을 포위한다

라파예트는 왕정과의 절충을 시도하면서, 그가 이끈 국민방위군은 왕정을 보호하려고 했다

결국 혁명군이 튀일리 궁전을 함락시키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체포되었다

국왕 루이 16세는 처형 절차에 들어갔고, 프랑스는 왕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공화국의 출발을 선포하게 된다

라파예트는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체포될 위험에 처해졌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망명을 시도한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로 입국한 직후 라파예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오스트리아 여러 요쇄로 이송돼 갇혀 있었지만 일정정도 예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라파예트를 외교적 협상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감금했다고 한다

라파예트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완전히 결별된 상태가 되었고, 그는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혁명주도세력으로 참가했던 라파예트는 정치적 몰락과 망명을 겪었으며, 외국에서의 체포와 수감생활로 정치적 활동을 마감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 요구하여 라파예트를 1797년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라파예트는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반대했으며 권위주의적 통치에 반대했다

프랑스혁명이 급진파로 흘렀다가 또다시 황제 통치로 꺾이는 과정에서 라파예트의 정치적 입지는 사라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원칙이 훼손되었고, 또다시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라파예트는 아직도 미국에서 독립영웅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한다


콩스탕 리버럴원칙


라파예트의 자유주의는 콩스탕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정치 이론가인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 1767~1830)이 시민 자유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치인으로 파리 출신의 대의원이었으며, 프랑스혁명 이후 왕정복고에 저항했다

뱅자맹 콩스탕 (출처 : 채널 PNU)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는 ‘리버럴의 원칙’을 주창하고 나섰으며, 공포정치를 거부함과 동시에 왕정 복귀를 노리는 반혁명 시도에 일관되게 반대하였다.


콩스탕의 자유주의 원칙은 과거 고대의 자유와 근대의 자유를 다르게 구분하고 있다

<벵자맹 콩스탕, '고대의 자유와 근대의 자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유는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정치참여를 일종의 의무로 보았다

자유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의미했다

근대의 자유는 정치적 의무보다는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들 각자가 국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국가의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자유의 핵심은 개인 각자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참여 보다 개인적인 독립을 중시하게 되고, 자신만의 생활방식,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가능한 한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콩스탕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여 그가 쓴 소설내용을 찾아보았다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한 자전적 연애소설이다

그가 정치가이면서도 소설가로도 알려지고 있게 된 것은 '아돌프'라는 소설 때문이라고 한다

아돌프라는 청년의 사랑이야기이다

아돌프는 어느 귀족의 애인이었던 엘레노르를 유혹한다.

여자는 파산한 명문가의 딸이고 10년이나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 여자는 아돌프에게 정열적인 사랑을 바치는데, 아돌프는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짐이 되어버린다

아돌프는 여자가 바친 열정과 헌신을 알고 있기에 헤어질 수 없다는 의무와 책임을 느낀다

아돌프는 서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힘이 없다.

엘레노르도 아돌프가 자신과의 관계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여자는 이로 인해 병이 나고 결국 죽지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는다.

아돌프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어 홀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를 얻은 그의 주변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 가운데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자유를 후회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콩스탕은 자신의 경험과 사생활을 소설 소재로 하여 공개했다

‘개인 사생활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사생활 역시 존중받아야 할 자유의 영역’이라는 메시지를 떠올리게 한다


콩스탕의 자쥬주의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보았다

또 권력의 분립을 강조했다

권력 과도하게 집중되면 국민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어서 삼권분립을 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국가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건으로 언론의 자유를 특히 강조했다

권력은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기도 하고, 국민대표의 이름으로 또는 탁월한 독재자의 이름으로 행사되기도 한다

모두 권력은 위험하며 그 권한을 제한할 안전장치로서 언론의 자유를 중시했다

혁명정부도 견제받아야 하고, 투표로 선출된 권력도 남용 가능성을 방지해야 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다수결의 원리가 작동하지만 소수파의 권리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수자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견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콩스탕은 프랑스혁명 이후에 벌어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공포와 폭력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콩스탕은 공포정치와 자유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혁명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공포를 정당화할 수 없다

공포정치는 자유의 파괴이고, 자유는 공포 정치에서 태어날 수 없다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정치적 폭력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콩스탕은 나폴레옹 통치도 전제정치라고 비판했다

나폴레옹이 ‘인민주권론’을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황제에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 콩스탕은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에서도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다

그런데 콩스탕은 나중에 나폴레옹과 협력한 적이 있었다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이다

나폴레옹은 파리에 돌아와 자유주의 체제를 약속했다

군사적 힘으로 권력을 다시 장악했지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했다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콩스탕에게 접근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은 '자신은 과거와 다르고 자유주의를 존중할 것'이라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하여 콩스탕은 프랑스의 새로운 ‘헌법제정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소위 ‘뱅자맹 헌법’이라고 불려졌던 이 초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집권이 백일천하로 끝났기 때문이다

콩스탕은 나폴레옹의 통치를 헌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제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실제 헌법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고, 인구 5천 명 이하 자치구에서도 시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1815년 헌법제정’ 中에서>

그러나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콩스탕의 참여를 ‘자유주의자의 배신’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확립된 자유주의 전통은 근대 이전의 중세시대 또는 절대왕정시대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라파예트와 콩스탕은 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왕의 권한도 헌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근대 서구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골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자유주의 체제는 모두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사상과 종교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등의 기본권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

개인의 사적 자유가 국가나 권력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국민의 대표들이 모여서 법률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체제이다

근대에 들어서 대의민주주의가 일반화되었다

자유주의 체제는 권력분립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

법을 만드는 입법과 실행하는 정부, 법 집행을 담당하는 사법기관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제도이다

어느 한 기관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고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이다

근대에 정립된 이런 구상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의 전통에서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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