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침략, 불안정한 체제
고대 그리이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본적으로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다.
스파르타에서는 개혁가로 불리는 리쿠르고스가 헬롯에게 가혹한 노예제도를 만들었다
헬롯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지역 주민들을 복속시켜 노예로 삼은 정복민이었다
<참고> 위키백과
헤일로타이(고대 그리스어 είλώται)는 스파르타에서 공유 재산으로서 국가에 소속되어 있던 비자유 신분의 명칭이다. 어원은 ‘습지에 사는 사람(έλη)’과 ‘포로가 된 사람’(είλ-)의 두가지 설이 있지만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헬롯’(helot)라고 한다.
스파르타는 이웃나라 메세니아를 정복한 다음 주민들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2차례에 걸쳐 진행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주민들을 국가소유의 노예로 편입한 것이다
제1차 메세니아 전쟁(BC 743년~724년)은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에 20여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패배한 메세니아인들은 노예로 전락하였다.
제2차전쟁(BC685년)은 힘든 처지를 참다못해 메세니아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킨 전쟁이다.
메세니아인들이 북쪽의 아르카디아의 원조까지 받아 결사적으로 버티는 바람에 무려 50년 이상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메세니아인들은 그때까지 빼앗기지 않았던 나머지 땅마저 다 잃었다.
2차전쟁에서도 메세니아 진영은 결국 많은 지도자를 잃었고, 주민들은 모두 헬롯이 되고 만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정복을 통해 헬롯이라는 노예제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스파르타는 전쟁을 통해 수많은 헬롯을 확보하여 각종 노동현장에 투입했고, 스파르타인들은 오직 전쟁에 전념하는 군사병영과 같은 국가가 되었다
비참한 헬롯,
노예 헬롯은 비참한 생활을 보냈고, 언제든 살해될 수 있는 공포를 안고 살아갔다
스파르타에서 실행된 ‘크립테이아'(Krypteia) 제도는 헬롯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게한다
스파르타 청년들은 크립테이아라는 '비밀 경찰집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선택된 '엘리트 전사'들이 크립테이아의 요원이 되는데 이들에게는 헬롯에 대한 살인이 허용되었다
사회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를 처단해도 된다는 일종의 살인면허와도 같다
그들에게 단검과 식량만 주고 나라 안을 돌아다니게 했는데, 이 청년들은 낮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타나 헬롯들을 잡아 죽였으며,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습격하여 죽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헬롯이 많을때에는 지배층인 스파르타인의 16배가 넘었다고 전해진다
공포적인 제도를 만들어 이민족을 노예로 삼는 극단적 체제였다
헬롯은 가족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았고, 토지에 묶여 농업에 종사했으며, 주인인 스파르타에게 절반의 수확물을 공납해야 했다.
그들은 결코 노예제의 족쇄를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없었디.
스파르타인들은 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헬롯들이 노예라는 신분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타를 일상화 했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의하면 헬롯의 비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스파르타인들은 헬롯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을 뽑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는데, 그들은 노예에서 풀려났다는 표시로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여러 신전을 참배하게 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면 그들은 행방이 묘연해 알 수 없었고, 그런 헬롯들이 2천 명을 넘었으며, 아무도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헬롯이라는 노예제도 위에 탄생한 병영국가였다
민주정과 노예제
아테네에서도 노예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체제였다
노예는 대부분 농업과 가사노동에 투입됐다.
시민들은 노예의 도움으로 경제활동과 가족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BC 5세기 그리스 도시국가 유적을 분석한 결과, 아테네 평균 농가에서는 노예 1~2명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부자와 귀족들은 대규모 노예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주로 은광산에 투입된 노예들이었는데 크세노폰에 의하면 아테네 장군 니키아스는 노예 1000명, 히포니코스는 600명, 필로미데스는 300명의 노예를 뒀다고 나온다.
대규모 노예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제는 그리스 문명의 기본 요소였다.
그럼에도 아테네 철학자들 중에서 노예를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철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리이스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불리지만 그 역시 계급주의와 우생학을 벗어나지 못한 차별주의자였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제일 변변찮은 남자들은 제일 변변찮은 여자들과 그 반대로 관계를 가져야 하고, 앞의 경우의 자식들은 양육되어야 할 것이로되, 뒤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 중에서도 전쟁이나 다른 데서 빼어난 사람들은 여자들과의 한결 잦은 동침의 자유가 허용되어야만 하겠는데, 동시에 최대수의 아이들을 이런 사람들한테서 얻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플라톤의 <국가> 중에서)
플라톤은 빼어난 자들의 자식은 특별구역에서 양육시키고,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은 해체되고 재산은 철저히 공유되는 사회이다.
심지어 처와 자식도 공유되어야 하고, 어느 누구도 부모나 자식을 확인할 수 없는 사회구조가 되어야 한다.
가족적인 애착심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화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철저한 국가주의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칼 포퍼는 자신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사회를 부정하는 닫힌사회의 원조로 플라톤을 지목했다.
칼포퍼는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이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모방한 정치체제라고 규정했다.
이한구 경희대교수는 칼포퍼가 “플라톤이 완성한 전체주의·유토피아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구축된 허구적 사상인지 폭로했다”면서, “존재하지 않는 필연적 법칙과 운명의 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워 이성과 자유를 부정”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00년 넘게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군림한 플라톤이 자유의 편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는 닫힌사회의 주창자였다고 비판한다.
(열린사회와 그적들 읽기, 이한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 정치체제로 ‘철인’이 다스리는 나라를 꼽았다.
지혜로운 엘리트가 지배하는 유토피아를 말한다.
그의 역사법칙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국가는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을 시작으로 하여, 방종이 판치는 민주정을 거치고, 마지막 단계인 참주정으로 퇴보하게 된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통치계급인 수호자(guardian), 국방·치안 등을 담당하는 전사·군인, 생산을 담당하는 시민 등 3계급으로 나뉘게 된다
세가지 인간으로 분류한 통치계급(왕), 수호계급(군인), 생산계급(농민,상공업자)은 사람들의 타고난 능력과 덕성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통치자는 지혜가 필요한데, 플라톤이 말하는 지혜는 이데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국가를 수호하는 전사들은 수호계급인데 그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고, 생산 계급에 속하는 시민들은 쾌락이나 욕망을 극복할 수 있는 ‘절제’가 요구된다며 용기와 절제를 주요덕목으로 내세운다
노예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절대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플라톤은 노예는 욕망을 추구하는 육체만이 존재할 뿐 이성을 가진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다.
노예는 자유 시민의 통제와 지배를 받아야 한다며 노예제를 옹호하였다.
그는 노예와 여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계급사회 옹호자였다.
‘정치학’(Politics)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는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사고 능력이 있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생물들과 차별화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노예와 여자, 아이들은 사고능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사고 능력이 중요한데, 노예는 주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의 능력만 갖추고 있고, 여성은 사고 능력은 있으나 권위가 없고, 어린이는 능력이 미숙하기 때문에 평등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주인과 남성은 통치하는 본성을 타고났고, 노예와 아내는 지배당하는 본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타고난 본성대로 충실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 된 것이다.
그리이스 최고 철학자 중의 하나이며, 서구 지성으로 통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불평등과 차별은 정당하고 근거가 있는 것이며, 노예제 역시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했다.
노예의 공급은 주로 전쟁을 통해서였다.
스파르타에서 노예들의 숫자는 시민계급보다 16배이상 많았고, 아테네 역시 전성기에는 노예 인구가 약10만 명으로 시민 한 명당 노예 1.5명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전쟁 포로가 많을 때는 한꺼번에 2만여 명의 포로들이 노예가 되어 그리스 각지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노예는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나중에는 자유인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전공에 따른 보상도 주어졌다.
그렇지만 노예계급은 자유인이 될 수 없었다.
노예제는 인간 차별과 불평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제도임에도 불구하고, 후대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그리이스의 민주적 전통만을 보고 있다
로마시대 노예제도
로마시대로 접어들면 전쟁 노예들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된다
로마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았고, 노예들은 로마 제국이 사회체제를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노예 숫자 많지 않았으나, 제국의 확장은 노예공급을 늘렸고, 더욱더 많은 노예를 획득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로마제국 노예 숫자는 나중에 1,200만명 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숙련된 노예 노동력과 수많은 강제노동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로마시대에는 전쟁의 연속이었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다른 국가에 복속되면 주민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 대우받기 보다는 재산이나 소유물로 여겨지게 된다
노예의 운명은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게 되지만 근본적인 신분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부유하고 자비로운 주인을 만나면 노예의 삶의 질은 조금 개선될 수 있지만, 가난하거나 까다로운 주인 아래에서는 비참한 삶을 견뎌야 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갖는 문명과 이성의 기초는 노예들의 노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노예들 덕택에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자유인으로 누리는정치활동과 예술도 노예노동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임을 스스로 돌아볼 수 없었다
멜로스의 대화
고대 자유주의 체제는 전쟁과정에서 탄생한 질서이며, 이민족에 대해서는 침략과 지배, 학살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은 집단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며, 집단 전체가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민주주의 사회나 공화정 역시 대외적으로는 침략과 잔인함을 감추지 못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처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멜로스의 대화'가 있다
이 대화록은 아테네의 침략을 받은 멜로스와의 전쟁과정에서 나눈 양측의 협상내용을 담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소개하고 있다
아테네와 멜로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 주민들의 운명이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참혹한 결말을 맞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멜로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떨어진 에게해의 섬나라였다.
멜로스인들은 스파르타와 한 핏줄인 도리아인이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멜로스를 공격하면서 중립을 그만두고 아테네 편에 설 것을 요구했다.
아테네의 속국이 되던지 나라가 망하던지 2가지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아테네와 멜로스 사이에서는 최후 전쟁을 앞두고 협상이 진행되었다.
아테네는 멜로스의 항복을 요구했다
멜로스인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절멸당하리라는 최후통첩을 한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당연히 할 수 있고 약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 견뎌야 한다”면서, 도덕적 논쟁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멜로스인들은 "중립국은 적국이 아니기 때문에 아테나이가 자신들을 정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아테네는 "만약 멜로스의 중립과 독립을 용인한다면, 자신들은 약해 보일 것이며 다른 속국들은 아테나이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멜로스를 그냥 두는 것이라 판단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멜로스인들은 "아테네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빠진 다른 중립국들을 아테네에게 적대할 것"이라 주장핮, 아테네는 "아테네에 거역하는 섬나라들은 이미 모두 정복당했다"고 반박한다
멜로스인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것은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주장에, 아테네인은 "자신들처럼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에게 항복하는 것은 수치스러울 일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멜로스인들이 "아테네인들이 비록 강하지만 멜로스인들이 이길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자, 아테네에서는 "그것은 감상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이며, 멜로스인들은 패배한 뒤에 어리석은 낙관주의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답한다.
멜로스측에서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자 아테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들의 세계에도 강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며,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당신들이 강대국 나라이고, 아테네가 약한 국가라면 당신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멜로스는 아테네와 항전을 선택했다.
그러나 멜로스는 전쟁에서 아테네에게 패하고 기원전 416년 겨울에 결국 항복했다.
아테네는 멜로스의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웃 국가에 대한 이기심과 현실적 이해관계, 힘에 의해 지배되는 냉혹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대 국가들의 전쟁과 외교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테네 내부에서는 자유와 평등의의 사상이 존재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약탈과 살인, 노예 사냥에 몰두한 고대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풍운아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에서 민주정의 몰락을 재촉한 사람은 알키비아데스이다
민주정이 얼마나 대중선동과 개인적 야심에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명문가의 후손이며 모든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전투에서 사망한 이후 외삼촌이었던 페리클레스의 보호 속에 성장했다
또한 그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이었다
청소년 시기에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 동성 연인관계였다
당시 중년의 남자와 소년의 동성애는 일반화된 관행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외모가 출중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구애를 받았지만, 소크라테스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승을 끊임없이 육체적으로 유혹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끝내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탁월한 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에게 치명적 약점은 오만한 태도와 지나친 야심이었다
이로인해 그의 주위에 정적들이 많았다
당시 아테네는 그리이스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년시절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 정면대결을 주장하는 강경파로 분류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BC 415년 시칠리아섬을 공격하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원정군이 떠나기 하루전 헤르메스 신전이 크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의 정적들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알키비아데스를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갔다
알키비아데스는 예정대로 시칠리아를 향해 떠났으나, 궐석재판에서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당할 위기에 빠졌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알키비아데스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아테네의 군사기밀을 넘겨주어 아테네 군대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안겼다
스파르타에 머물던 알키비아데스는 잘난 외모 덕분에 또다시 왕비와 스캔들을 일으키고 페르시아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아테네 귀환을 꿈꾸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일어난 과두정 쿠데타를 활용한다
아테네에서 시칠리아 원정 실패와 재정악화로 민심이 악화되자, 일부 귀족과 군장교들이 과두정치를 시도하는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BC 411년 ‘400인 정권’을 세우고 민주정의 핵심 기관인 민회를 해산해 버렸다
시민들과 민주정 지도층이 저항하였고 여기에 아테네 해군들의 도움을 받아 과두정 쿠데타는 4개월만에 진압되었다
페르시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이 효율적이라고 믿었고, 아테네 과두정세력과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페르시아 장군들을 끌어들여 과두정을 지원하는 역할도 하였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다시 민주정이 복귀했지만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다시 전투가 벌어지자,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전함을 동원해 스파르타 쪽 함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를 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테네에 귀환하게 된다
알키비데우스는 잠시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BC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아테네 함대가 전멸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는패전의 책임을 떠안고 또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였고, 알키비데우스는 결정적 계기를 안겨주었다
아테네 민주정은 이때 처음으로 붕괴되었고, 스파르타에 의해 ‘30인 과두정’이 들어서게 된다
알키비데우스는 말년에 페르시아에서 결국 자객에게 암살 당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총독 파르나바노스에게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해줄 것을 청탁해, 알키비데우스가 암살되었다고 전한다
아테네 민주정은 1년후 민주정 지도자들에 의해 복원되었지만,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BC 322년 마케도니아에 의해 민주정은 사라졌다
알키비데우스의 대중선동능력과 개인적 야심이 민주정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시칠리아 원정을 주도하여 군사력을 잃고 재정을 약화시킨 것은 아테네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적국에게도 기밀을 제공하고, 민주정 반대세력과도 연합하며, 페르시아를 내부정치에 끌어들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고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의 보호아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성장하여, 대중적 지지를 높게 받았던 알키비데우스이지만, 그는 아테네 종말을 재촉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고대 민주정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였다
고대 자유주의 이면에는 노예제와 침략, 정치체제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시민들의 권력인 민회는 대중적 선동과 감성적 호소에 좌지우지될 수 있었다
대중적 인기와 화려한 웅변술은 대중의 에너지를 폭팔시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또한 정적들의 공격과 모함도 쉽게 지도자를 흔들 수 있는 체제였다
대중선동가의 야망은 민주정에서 쉽게 통했고, 역으로 정적들에 의해 몰락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민주정의 오류는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다
민주정과 공화정은 서로 공존하고 권리를 나누는 사회체제를 만들었지만, 노예제와 침략에 기초하여 유지되었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항상 노예 신분으로 굴러떨어질 위험도 안고 살아갔다
전쟁에서 늘 승리할 수 없고 대외침략과 학살은 반드시 자신들에게도 닥칠 운명이 될 수 있었다
패배는 영원히 자유인의 신분을 박탈당하는 것이고, 전쟁에 생명과 재산을 모두 쏟아붓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반면 이미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재앙이었고, 하루빨리 그 체제가 붕괴되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민과 노예는 같은 공동체에 속하기는 하지만 집단의 운명과 자신들의 미래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다
동시대 같은 하늘아래 살지만 그들에게서는 어떤 동질의 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 자유주의 체제에 살았던 자유인에게는 삶을 보장하는 터전이 되었지만, 정복당한 주민들과 노예들에게는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웃나라에서 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서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