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탄생스토리
고대 로마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BC 8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주해 간 한 집단이 테베레 강 근처에 정착하면서 로마가 건설된다
로마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테베레 강에 버려진 두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두 아이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인데,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18대 후손이다
로마는 트로이가 멸망하고 그들의 후예들이 이태리로 이주하여 건설했다는 설정이다
이들은 목동 파우스툴루스에 의해 길러졌는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두 형제는 다툼 끝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약 3000여 명의 주민으로 로마(Roma)라는 작은 도시국가를 건설한다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일대에 로물루스가 최초로 로마왕이 되었다
사비니의 여인들
로마는 초기에 아주 작은 나라였고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마의 남자들은 주변 도시들의 여자들과 혼인조차 어러웠다고 한다
이 시기에 생긴 사건이 유명한 사비니여인 납치사건이다
로마는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이웃 국가들의 여자들은 로마 남자와의 혼인을 기피했다.
로마의 로물루스왕은 이웃 국가 사비니에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의 여자들을 납치하기로 마음먹고 덫을 놓았다.
로마 사람들이 축제를 열고 이웃 부족이었던 사비니족 사람들을 초대했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를 기리기 위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사비니 사람들은 로마에 와서 부담 없이 술과 음식을 즐겼는데, 남자들이 술에 취하자 로물루스는 로마 남자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이들이 뛰쳐나와 사비니 여인들을 하나씩 납치하여 도망쳤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비니족 남자들은 자기 아내와 딸과 여동생들이 로마 남자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미 다들 취했고, 로마 군인들이 살벌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니 남자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남자들은 로마를 공격했지만 로물루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사비니족이 전열을 갖춰 로마로 진격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그러나 사비니 여인들은 로마 남자들과 강제 혼인을 한 이후이고, 로마인 아내로 아기를 낳고 아이 엄마들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비니 남성들은 반드시 여인들을 되찾아와야 했고, 전쟁을 지켜보는 사비니 여인들 심정은 처절했다.
이미 한쪽은 지금의 남편이자 아기들의 아빠가 되어 있고, 다른 편은 고향의 부모와 오빠, 전 남편들이었다
여인들은 아기를 안고 전장으로 달려가 전장터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사비니의 여인들이 한쪽으로는 아버지를 향해 다른 한쪽으로는 남편을 향해 전쟁을 멈춰달라고 간청했다
“과부로 살거나 고아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로마와 사비니족은 화해했다.
(고대 리비우스의 ‘로마사’ )
그리고 로마는 사비니족의 타티우스와 레물루스가 공동통치하기로 합의한다
로물루스는 타티우스가 죽을 때까지 공동 통치를 지켜갔고 더 큰 국가로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로마는 건국초기부터 권력을 함께 나누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에 의해 빈번히 작품의 소재로 사용됐다.
프랑스화가 다비드의 작품 ‘사비니의 여인들’(1799)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림 중앙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양팔을 넓게 벌린 채, 서로를 무기로 겨냥하고 있는 군인들을 가로막고 서 있다.
사비니의 여자들은 화해와 중재의 상징이 되었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린 때는 나폴레옹이 집권한 해다.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나폴레옹을 신격화하는데 앞장선 화가이다
나폴레옹을 화해와 중재의 인물로 부각하기 위해 사비니의 여인을 소재로 선택한 듯하다
프랑스혁명 이후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다가, 새로운 황제를 맞아 갈등을 봉합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는 언제나 반대파를 흡수하는 화해와 통합을 통치 어젠다로 삼게 되는 듯하다
루크레티아 사건
로마 도시국가는 라틴족과 사비니족 뿐만 아니라 에투루리아족 세 부족이 함께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라틴족인 로마는 에트루리아 인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경제력과 기술력이 강한 에트루리아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다고 전해진다
로마 왕정은 약 2백 년 동안 일곱 왕의 통치를 받았는데, 5대 왕부터 7대 왕까지 3명이 에트루리아인 혈통이었다고 한다
왕정이 끝나고 공화정(BC 509~BC 27)을 맞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를 지배하게 된다
작은 도시국가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원천은 로마 공화정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가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시작하는 과정에 발생한 사건이 루크레티아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시민들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탄생시킨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영국 세액스피어가 서사시로 써서 유명한 스토리가 되었고, 훗날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로마 시민에 의해 폐위된 마지막왕은 타르퀴니우스인데, 그는 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선왕의 사위였지만 아내였던 선왕의 딸과 공모해 아버지 왕을 제거하고 권력을 탈취하였다
시민들은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을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섹스투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루크레티아를 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타르퀴니우스 왕이 아들들을 데리고 전쟁에 출정하였는데, 전쟁터에서 왕자들과 장수들이 밤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구의 아내가 가장 정숙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급기야 밤중에 말을 달려 로마로 돌아가서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확인한다
다른 부인들은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콜라티누스라는 장수의 아내 루크레티아만은 늦은 밤까지 옷감을 짜며 정숙하게 가정을 지키고 있었다
왕자 중 하나인 섹스터스는 정숙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루크레티아를 본 순간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밤중에 몰래 진중을 빠져나와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남편의 친구이자 왕자인 그를 루크레티아는 정중히 맞이하지만, 섹스터스는 그녀를 범하고 만다
남편이 전쟁에 참가하여 집을 비운 사이, 섹스투스가 단검으로 위협해 루크레티아를 욕보인 것이었다
능욕을 당한 루크레티아는 아버지와 전쟁터에 있는 남편에게 하인을 보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급히 집으로 와달라고 전했다
아버지는 발레리우스를, 남편 콜라티누스는 브루투스를 데리고 함께 달려왔다
그녀는 비탄에 잠겨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은장도를 가슴에 꽂아 자결하였다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해 줄 것을 다짐받았다고 한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광장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시민들은 왕과 아들의 만행을 비난했다
부르투스는 루크레티아와 같은 정숙한 여자가 두 번 다시 이런 만행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하고, 왕을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선동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타르퀴니우스에 대한 불만을 마침내 폭발했으니, 브루투스의 제안에 따라 민병대를 결성하여 대항하였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문제의 아들 섹스투스는 다른 사람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로마 왕정은 폐지되고, 처음으로 공화정이 열리게 되었다
브루투스는 왕을 대신할 집정관직을 만들었고, 두 명의 집정관은 평민의 투표로 선출하고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됐다.
오늘날 직선제 대통령제와 비슷하다
공화정은 왕이 없는 통치방식을 의미하는데, 원래 이 말의 뜻은 ‘공공의 것" ’공동의 부‘를 의미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시대의 통치 형태를 일컫는 말로 기원전 5세기부터 발전했다
초기 공화정시대에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회가 제한적이었고,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분담하는 과두정이었다
왕정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귀족들이 중심이 된 사회였다
초기 공화정의 권력은 귀족 대표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장악했다
집정관이 매년 선출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원로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산(聖山) 사건
공화정이 시작된 초기에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를 로마의 '신분투쟁'이라고 말한다
공화정 출범 이후 주로 귀족 계급들이 공직을 독점하고 부의 분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로마 역시 주변 도시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당시 전쟁양상은 그리스의 중보병 전술과 동일한 형태를 띠었다
전쟁터에서 평민들도 귀족과 함께 큰 역할을 하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해도 전리품은 귀족들에게 돌아갔고, 자영농들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에 농지는 황폐화되었다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고, 고리대금으로 인해 점점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배경을 평민들은 불합리한 사회체제에 대항하여 행동으로 나서게 되었다
귀족들에 맞서 평민들의 집단 반발이 발생하고 신분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성산사건이 대표적인 평민들의 투쟁이었다
기원전 494년에 로마 귀족들의 가혹한 통치에 항의하여 평민들이 로마 인근의 산에 모두 몰려가 사실상 로마국민이기를 거부했다
로마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국민파업 내지 사보타주 투쟁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때 평민들이 올라갔던 산을 '성스러운 산'이라는 의미의 성산(聖山, Monte Sacro)으로 불렀다
성산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평민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기원전 495년 긴 턱수염에 낡은 옷을 입고 온몸에 상처자국이 있는 노인이 로마광장에 나타났다
그가 바닥에 누워서 구걸하자 연민을 느낀 사람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노인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전쟁에 나가 군 장교로서 활약했지만, 전쟁 중에 농장이 불타 전재산을 잃었으며, 엄청난 세금이 부과돼 큰 빚을 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장도 뺏기고,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갔으며, 감옥에서도 채찍질을 당하며 노예 취급을 당했다고 말했다
평민들은 노인의 이야기에 분개하였고, 원로원 앞으로 몰려가 항의하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당시 집정관들과 협상하게 되었고, 평민들이 군대에 참가하면 재산을 보장하며 감옥의 채무자들도 석방한다는 협상안을 얻어냈다
그러나 다음 해 BC494년까지 귀족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귀족들은 평민들을 동원해 전쟁을 계속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평민들이 집단적으로 로마를 비우고 성산으로 올라가 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더 이상 국가에 대한 봉사를 거부하는 집단 사보타주였다
로마의 평민들은 도시의 모든 기능을 멈춰 세우고 새 도시국가를 건설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로마에 부채탕감과 채무자 석방, 평민대표 집정관 임명등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평민들을 복귀시키기 위해 협상과 설득을 계속했다
이때 로마에서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달변가 아그리파를 파견했는데 , 평민들에게 연설한 아그리파의 '신체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신체 부분마다 각자 기능이 다르고, 발 손 위 등 각 신체 부분들이 각자 말을 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각 신체 부분들은 자신의 고생을 말하며, 배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분개하였다
각 신체 부분들은 자기들끼리 왜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일을 하기를 거부한다
손은 입에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고, 입은 삼키지 않으며, 치아는 씹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배가 고픈 것은 물론이었지만, 신체 전부가 쇄약 해지기 시작했고, 위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가 위태롭게 된 것이다
위도 신체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받는 것이 있었지만 다른 신체에 더 많이 주고 있다"는 내용을 들려주었다
아그리파는 귀족은 평민 없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평민들을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평민들은 아그리파의 설득에 공감하며 로마로 복귀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때 평민들은 소중한 권리를 얻게 되었다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 제도를 만들고, 호민관을 선출했다
채무 노예제를 폐지하고, 전쟁터에 간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는 행위도 금지하였다
성산투쟁으로 시민들의 권리와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기원전 449년에 이르러서는 2차 성산투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때에는 시민들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게 되었다
당시 로마에는 명문화된 법률이 없었고, 재판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법원에서 진행되었다
평민들은 2차 성산투쟁을 거처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표법'이 제정되었다
로마의 시민들은 귀족과의 투쟁에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통치를 담당하게 하고, 법체계도 만든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진정한 공화정이 탄생하게 되었다
'SPQR' (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 민주주의 체제와 구별된 사회체제가 되었다
그리스는 시민들 전체가 참여하는 민회라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했지만, 공화정은 귀족과 시민들의 대표가 함께 통치하는 간접민주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테네에서 민회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며, 시민들이 국가 중대사를 직접 결정하였다
공화정에서는 귀족 대표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시민 대표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로마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나라의 주요 사안을 모두 결정했었다
점차 시민들이 신분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통치를 맡기고, 민회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켜 갔다
로마공화정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함께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회체제이다
2천5백 년 전에 로마에 형성된 자유주의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로마에서는 'SPQR' 문장을 자주 볼 수 있다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인데,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을 뜻한다고 말한다
로마의 화폐나 국가 공공물, 군대의 깃발에서 자주 등장한다
로마 공화정을 의미하는 이 문장은 오늘날 공화정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 자유주의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공화정은 왕과 귀족들에 맞서 시민 자신들이 세운 자유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로마에 볼모로 잡혀왔던 그리스 역사가였던 폴리비오스는 그리스가 로마에게 패배한 원인을 공화정 체제에서 찾았다
로마 공화정의 기본 구조로 자리잡은 집정관, 원로원, 민회 세 부문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로마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였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김덕수 교수, '블멸의 제국, 영원한 로마' )
리버럴리즘의 등장
로마 공화정에서 '리버럴리즘'이 등장했고 근대 자유주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귀족과 평민들이 중심이 돼 나라를 이끌었다
신분 구별과 차별은 있었지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은 존재했다
두 사람의 집정관, 귀족들의 원로원, 시민들의 민회라는 세 요소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룬다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 성문법인 12 표법, 귀족과 평민의 통혼을 허용하는 제도가 있었고, 이런 시스템이 사회통합에 기여했다
로마 공화정은 귀족과 시민들의 공동체였고, 귀족들에게는 시민들에 대한 보호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자유주의의 근원에 대한 연구를 하는 뉴욕시립대 역사학과 교수인 핼레나 로젠블랫은 그의 저서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에서 '리버럴'이라는 말은 2천 년 전 로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추적한다
고대 귀족들의 자유주의는 '공공의 선' 또는 '후하고 너그러움'을 의미했다고 한다
당시 키케로 같은 로마의 정치가들 역시, 자유로운 상태는 법치에 기반한 공화정 체제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리버럴은 "베풂을 주고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강조한다
요약하면 로마 시대의 리버럴은 '법치에 기반한 공화정에서 동료 시민을 향해 너그러운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들에게는 공공선과 의무, 자기희생 등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의미하며, 상류층이나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통이다
이런 발상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자유주의는 고대 리버럴의 전통 속에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공화정의 성공은 거대한 제국을 완성하면서 사회체제는 급속히 제국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한 세기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승리하여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의 승리는 마치 ‘승자의 저주’에 빠져들듯이 사회체제의 균열이 심해진다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과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했고, 노예제는 상류계층의 타락을 부채질했다
로마 공화정은 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될 요소들을 키워 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