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고대 자유주의

그리스 민주정치

by 이민영

자유주의의 근원이라고 평가받는 사회체제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 로마 초기 공화정시대는 왕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성립된 사회체제이다

이 당시 두 나라의 공통점은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해 유럽 고대문명의 중심으로 떠오른 국가이다

유럽 최강 국가로 오른 배경에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사회체제가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리스는 많은 도시국가들로 이뤄진 사회였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를 수밖에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귀족과 평민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했다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싹튼 것은 귀족과 평민이 전쟁에서 역할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상황과 직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시대 전쟁은 중보병이 중심이 된 전투였다

중보병의 무장은 창과 방패, 그리고 갑옷을 갖춰 입어야 했다

중장비를 갖추고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Phalanx) 전술을 사용하여 전투에 임한다

영화 300에 나오는 전투대형을 떠올리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BC 480년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그리스 군의 연합이 지연되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맞서며 장렬히 전사한다

영화에서는 얇은 옷을 입고 창과 방패로만 싸우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스파르타 군대는 당시 그리스 모든 병사들과 같이 갑옷과 투구 등으로 중무장한 중보병들이었다

영화 300 중보병 모습

팔랑크스 전투방식은 청동으로 만든 큰 원형 방패를 일렬로 세워 무기가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넓은 방패벽을 만든다

공격은 창을 쥐고 방패벽 너머로 적병들에게 내리꽂는 방식이다

방패가 가리지 못하는 다리 정강이 쪽은 각반이나 정강이 보호대가 막는다

방패 안쪽에 갑옷과 투구가 보호해 주기 때문에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이런 기본대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로 자신과 옆 병사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다.

팔랑크스는 부유한 그리스 시민들이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황당할 정도로 중무장을 했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투방식이었다고 한다

각각의 병사는 서로를 보호하며 적을 방어하거나 공격하게 된다

귀족 중보병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더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점차 부유한 평민들도 중무장을 갖추게 되면서 귀족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평민도 귀족과 동일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보병제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중보병은 시민들이 자신의 장비를 구입하여 군대에 참여하는 제도였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중무장하고 전쟁에 참여했고, 그러한 군사적 역할을 활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테네에서 중보병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발언권을 얻는 근거가 되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자격이 군사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부유해진 평민들도 중보병으로 참가하면서 귀족들의 특권의식은 희석화되었고, 평민들 역시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당연히 자신들의 공을 인정받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중보병이 된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출발은 현대 자유주의 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의 출발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에서는 솔론의 개혁이 있었다

BC 7세기 아테네는 농민과 귀족의 대결로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농민들은 기근과 토지 부족으로 파산 상태였고, 소수 부자들은 토지를 독점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태가 되었다.

농민들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노예 신세로 전락하거나 외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자식들을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아테네는 3개 그룹을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이 지속되었다

빈민들로 구성된 산악파, 귀족 지주들의 평야파, 무역과 상인들로 구성된 해안파가 대립하는 양상이 계속되었다.

아테네 산악 쪽에 사는 빈민층들이 살았고, 해상무역과 상거래 등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해안 쪽에서 살아서 해안파로 분류되었다

주로 평야지대에 거주하는 귀족들도 소농층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던 아테네의 위기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부 격차와 양극화로 극도의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솔론은 조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솔론은 왕족 출신이었지만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시작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아테네가 부자인 귀족과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대결상황이 전개되자, 양측은 조정자로 솔론을 지명했다고 한다.

솔론은 정계의 주요 인사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도시 내 부 분쟁 해결과 외교문제에 성과를 보여 다수의 시민들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는 솔론에게 사회 전반의 개혁을 맡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

솔론이 임명된 배경에는 그가 부자들의 횡포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극악한 빈곤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재산도 있었기 때문에 귀족과 농민층 양측 모두 신뢰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솔론의 부유함을 보고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고, 농민들도 정의감이 있고 선한 사람이기에 토지를 재분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일부에서는 솔론에게 왕의 자리를 제안했으나 “군주란 좋은 자리지만 한 번 앉으면 물러날 길이 없다”라고 사양했다고 전한다.

솔론은 스파르타와 같은 무상분배 형식의 토지개혁을 채택하지 않고, 농민들에게 부채를 탕감해 주는 정책을 선택했다.

농민들이 빚으로 인해 노예상태에 놓여있는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솔론은 농민들이 저당 잡힌 농토를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농토에서 저당 잡힌 땅이라는 표시인 말뚝을 뽑아내고, 귀족들이 차지한 땅을 가난한 농부들에게 돌려주고 남은 부채를 탕감했다.

빚 때문에 노예로 외국에 팔려나간 시민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빚의 담보로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게 법을 제정했다.

그론데 솔론의 개혁은 당시 아테네 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농민들은 스파르타처럼 부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받기를 원했으나 솔론은 토지개혁을 채택하지 않아서 불만을 표했다

귀족들 역시 지나친 개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구질서를 다시 옹호하게 되었다


한편 솔론은 드라콘법을 폐지하였다.

드라콘법은 BC 621년부터 아테네에서 시행된 법으로 악명 높기로 유명하였다.

사소한 범죄에 대해서도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는데 ‘잉크로 쓴 법이 아니라, 피로 쓴 법’이라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살인뿐만 아니라 채소나 야채를 훔친 도둑에게도 사형을 선고했고, 심지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 법을 만든 드라콘은 모든 범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이유에 대해 “작은 범죄도 사형을 받아 마땅한데, 살인 등 큰 범죄는 사형 보다 더 큰 형벌이 없어 사형을 적용한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솔론은 살인죄를 제외한 모든 사형제도를 폐지하였다.

솔론은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공동체 내에서 생존하고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경제적, 법적인 제도를 정비했다고 할 수 있다.


솔론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면서 정치체제도 개혁한다

솔론의 정치개혁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솔론의 정치체제를 금권정치라고 하는데, 부자가 돈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오늘날의 금권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재산 등급에 따라 전체 시민을 네 계층으로 나누고 정치 참여 기회에 차등을 두었다

‘최고행정관’ 등의 고위직은 최상 계층의 시민들만 맡을 수 있었다

다른 관직 역시 상위 세 계층의 시민들에게만 허락되었다

최하층 시민들은 공직 참여를 배제했다

이렇게 최하층의 공직참여를 배제한 것은 당시 공직자에게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생업을 포기하고 공직을 맡을 수 없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재산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지도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대신 솔론은 최하층에게 민회와 배심원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했다

민회는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이었고, 최하층들도 참여할 권한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솔론은 일부러 법조문들을 모호하게 만들어 최종 재판이 배심원 재판에서 이루어지게 했다

배심원은 모든 시민들에게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서, 재판에 민의를 반영하게 한 것이다

배심원은 추첨을 통해 시민들 가운데서 뽑는다

배심원은 대리석 판에 홈을 내고, 그 안에 이름표를 넣은 다음 무작위로 뽑힌 사람이 배심원을 맡았는데 그 기계가 클레로테리온이다

오른쪽에 이름표를 넣고 왼쪽에 흰돌과 검은 돌을 넣어서 흰돌이 이름표에 걸리면 배심원이 되는 추첨기이다

현대 로토(Lotto)의 어원이 여기에서 왔다고 한다

최하층 시민들의 정치적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다수의 최하층 시민들은 정치 참여의 기회를 잃었지만, 민회와 배심원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후대 학자들은 솔론을 민주정치의 시조로 평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개혁’이 갖는 민주적 성과를 세 가지 측면에서 지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한 것, 둘째는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원하는 사람이 구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한 것, 셋째는 배심원 재판에서 상소심 재판을 하게 함으로써 대중의 힘을 강화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스 경제개혁과 민주주의는 그 시기 다른 곳에서 성립된 강력한 왕정과 비교하면 훨씬 진전된 자유주의적 사회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우선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점차 폭력적 지배체제인 법과 정치체제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솔론의 개혁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모든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권력에서 물러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한때 내게 엄청난 기대를 걸더니, 지금은 화가 나서 나를 원수처럼 노려본다.”

솔론은 오랜 기간 해외를 떠돌아만 했다

2천5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개혁은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오고, 권력에게는 스스로 장애물을 만드는 후폭풍이 되었던 것 같다



솔론이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헤르도투스의 ‘역사’에는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유명한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솔론이 생각한 인생과 행복에 대한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다

크로이소스는 소아시아에서 거대한 제국을 이룬 리디아의 왕이었다

이 왕은 아테네의 현자 솔론이 리디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그를 초청한다

솔론과 크로이소스. 벨기에 화가 프란스 프랑컨 2세

거대한 제국의 왕이고, 왕궁의 창고에는 보물로 가득 찼으며, 두 아들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었다

솔론이 왕궁을 방문하자 그는 자신의 행복을 확인받고 싶은 욕심에 솔론에게 물었다

“그대가 정말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자를 만난 적이 있는지 간절히 묻고 싶소. “

솔론은 부유한 권력자의 질문에 답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죽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솔론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텔로스를 꼽았다

평범한 아테네 시민이었지만 훌륭한 자녀를 두었고, 자신의 나라에서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그는 아테네를 위한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죽음으로 칭송받았다

솔론은 텔로스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크로이소스는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지 재차 물었다

솔론은 두 사람의 형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는 아르골리스 지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두 형제는 어머니가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헤라의 신전으로 갈 때, 그들은 소를 대신해 수레를 끌고 어머니를 태우고 갔다

감동한 어머니는 여신 헤라에게 아들들이 최고의 보상을 받도록 기도했다

해라는 두 형제를 신전에서 깊은 잠에 들게 하고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게 했다

현실의 고통을 면하게 한 것이다

솔론은 아테내 사람들이 형제의 헌신과 경건함을 기리고 그를 사랑했다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산 자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솔론은 이렇게 답을 한다

“크로이소스여,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한 존재입니다. 지금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대단히 부유하시고 많은 사람들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전하께서 유복하게 생을 마감하셨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전하께서 저에게 물으신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대부호라고 해도, 행운이 그를 잘 보살펴 결국 그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삶을 잘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하루 벌어 사는 자보다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론은 인생의 불확실함과 우연성에 대해 경고한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을 가졌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나중에 크로이소스왕은 페르시아 키로스왕에게 패배하였고, 리디아 제국도 멸망한다

전쟁에서 패한 크로이소스는 키로스 앞에서 화형장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솔론! 솔론! 솔론!”

느닷없는 외침에 키로스도 궁금해져,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자초지종을 전하자 키로스왕은 마음을 바꿔 화형을 중지시켰다.

키로스는 크로이소스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조대호 연대철학과 교수 동아일보 기고문)


아테네 민주주의가 자유체제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은 왕정에 비해 획기적인 사회체제를 성립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된 시기는 대체로 페리클리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는 시민들이 각자가 주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시민 누구나 정치 참여 기회를 가져야 하고, 고대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이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민회에서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되었다

500인 회의를 통해 시민의 의사를 묻는 민회가 설립되고,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한 것이다

대표자를 뽑는 방식도 독특하다

처음에는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였는데, 페리클리스는 추첨식으로 바꿨다

국가안보상 중요한 군사와 재정담당관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직책은 제외되었다

추첨 제도를 도입해 신분과 재산, 학식에 관계없이 공직에 임명되었다

고대 아고라 박물관(아테네)의 클레로테리온

공직에 참여한 시민들은 처음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에게 수당을 주는 법안이 통과되고, 민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일당을 지급했다

공직자에게 국가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생업에 종사해야만 하는 서민들에게도 공직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무작위 추첨 혹은 제비 뽑기에 의한 공직자 선출이 참여민주주의의 기초가 된 것이었다

대표자 추첨제는 균등한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공직자 교체로 부패를 예방하는 장점이 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참여민주주의를 무시했다

“가축 떼도 아닌 우리들이 제비 뽑기로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국가’, 제8권)”며 비난한다


페리클리스는 유명한 연설가이며 탁월한 대중선동능력을 갖춘 지도자였다

그의 연설 중에 가장 유명한 내용은 BC 43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에 전몰자들을 위한 추도 연설문이다

이 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실려있다

여기서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해 역설하며, 전쟁에서 죽어간 병사들이 아테네의 정신적 가치를 위해 희생했음을 강조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학교’가 되었고, 다른 도시국가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고 선언한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민주정치라고 부르고,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은 자유와 평등,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민주정의 기본가치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은 아테네의 가치를 위해 대중들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주의적 관점을 보인다

시민들에게 애국주의를 강요하고, 이상적인 사회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였다

아테네 전사들이 공포보다는 명예로운 상태에서 죽어갔으며, 살아있는 시민들도 아테네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정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시민들에게는 국가를 위해 더 많은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늘날의 잣대로 과거를 평가할 수 없지만 고대민주주의에도 개인 보다는 국가우선적 경향이 있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시민 누구나 정치 참여 기회를 가져야 하고, 일종의 의무이기도 했다

모두가 참여하는 민회에서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되고, 시민들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여성과 노예, 외국인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민회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남자 시민들만이 참여하는 제한된 리그라고 할 수 있다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도편제도라는 독특한 제도도 있었다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인데, 시민들이 도자기 조각에 적어 투표한 결과 6,000표 이상이 된 사람에게는 국외로 10년간 추방하는 명령이 내려진다

민주정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나 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쓰고 그 인물을 추방했다

기소나 변론할 기회가 없었고, 추방이 결정되면 실행돼야 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정치가들이 자신의 정적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려서, 나중에는 결국 도편제는 폐지되고 만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다수의 폭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으로 다양한 제도가 실행되었고, 현대 자유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정이라는 사회체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근대 서구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을 끝내고 국민의 대표자들이 모여 법을 만들고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스에서 실행된 민주정이 근대국가 체제의 모범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민주정은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정치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절대적 권한을 가진 왕이나 종교지도자가 나타나 전체 구성원을 다스리는 계급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독특하게 왕이나 참주가 없는 정치체제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정 자체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제도가 도편제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같은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의사소통이 확대될수록 사람들은 특정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자기 집단과 다른 집단을 가르게 되며, 집단 간에는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를 마치 이념처럼 떠받들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으로 삼아 버린다

우리식 민주주의가 따로 있고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 주장을 매도하고 악마화한다

민주주의를 성역화하는 법률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마치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외친다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은 정파마다 다르고, 집권할 때와 실권했을 때 주장이 다르다

민주정은 다양한 생각과 시도가 있을 수 있고, 여러 신념이 용인되는 체제이다

근대에 발전한 자유주의에서는 다양한 사상을 인정하고, 소수를 다수의 폭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한편 고대 민주정에서는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겼다

솔론과 같은 개혁가들도 정치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하는 것에 매우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찬성, 반대입장을 취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은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다다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잘못된 결정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대 자유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고, 정치 자체에 반감을 가질 수 있어도 된다

개인들은 정치 자체와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제3자적 관점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가들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결정은 방임하면서, 자신들의 생계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정치적 무관심은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접은 것일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야 해결책을 강구하는 정치의 후진성에 기댈 것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자유주의체제에서는 정치를 더 이상 의무로 여기지 않고 정치참여 문제를 도덕적 잣대로 저울질 하지도 않는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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