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다
어느 날, 낯선 단톡방에 초대됐다.
‘XX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신입생 단톡방.’
간단히 인사만 남기고, 그 뒤로는 톡을 잘 열어보지 않았다.
하루에 수백 개씩 쌓이는 메시지를 언제 다 읽겠는가.
게다가 나는 재수나 반수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목표를 잃어버린 채 입학과 동시에 자퇴까지도 생각했다. 이 대학은 ‘완전히 몸을 담을 곳’이라기보단, 잠시 거쳐가는 곳. 솔직히 말하면 주변의 말에 떠밀려 온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회 누나였다.
“감자돌이야, 개강 파티 공지 봤어? 투표를 아직 안 했더라고 올 거야?”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갈게요.”
솔직히 전화가 온 것부터 마이너스였지만,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자, 그냥.
학생회 누나는 덧붙였다.
“그날 신입생 설명회도 있으니까 아침 10시까지 ○○호실로 와야 해. 그럼 그때 보자? 누나 폰 번호 저장해 두고!”
"네"
전화를 끊자마자 부랴부랴 단톡을 훑었다. 공지와 대화를 스크롤하며, 앞으로 4년을 함께할 친구들의 이름을 읽었다.
그때였다.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단톡에서 스친 이름 하나.
‘하루.’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잠시 뒤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시절, 내 운동부 친구가 사귀던 여자친구 이름이었다. 그때 친구는 자주 자랑하며 말했다.
“엄청 예쁘고, 뽀얀 피부에, 말도 별로 없는 조용한 애야.”
사진으로 자랑을 해도, 나는 대충 보기만 할 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정처 없고, 목표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여자에게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혐오했다.
혐오와 외로움.
그때 내가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딱 그랬다.
훗날, 하루와 내가 연인이 된 후에서야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친구와 약속 문제로 헤어졌다고 했다. 데이트 전날, 친구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약속에 나오지 못했다고. 되게 실망을 했다고 했다. 신기한 건, 그 이별 뒤에 친구가 하루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다.
“내가 아는 애 중에 약속 잘 지키고 괜찮은 애가 있어.”
“누군데?”
“운동했던 친구인데 여자에 관심 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묘한 친구 있어”
그게 바로, 나였다. 같은 마을에서 자란 우리는, 어쩌면 좁은 인연의 고리 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만났으니,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아니었을까.
과거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한다.
톡방에서 ‘하루’라는 이름을 봤을 때, 나는 반가움에 아니, 사실은 낯섦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는 친구가 없으니 뻘쭘했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 출신이라면 어딘가 접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하루가 누군지 몰랐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하루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조용한 아이였던 거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세상 모두는 친구’라는 마인드로 살았다. 그래서 무심코 톡을 보냈다.
“안녕.”
“어, 안녕.”
그게 전부였다. 형식적인 인사. 할 말도 없었다. 그냥 같은 마을 출신이니까, 예의상 한마디 건넸을 뿐이었다.
괜히 연락했나 싶을 정도로, 무안했다.
방에서 게임을 하다, 운동을 하다 결국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가기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밀어냈다. 도보 5분 거리라더니, 학과까지는 족히 20분은 걸렸다. 덕분에 학교 앞 상가들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대학교는 처음이었다. 풋풋한 얼굴들, 과하게 꾸민 사람들, 나는 후드티에 반바지, 모자를 눌러쓰고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할 것도 없는데 괜히 텅 빈 폰 화면을 스크롤했다. 혼자인 게 쓸쓸했던 걸까. 주변을 힐끔거렸다. 근처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며 이미 친해진 듯 보였다. 나는 그날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왠지 그런 분위기엔 끼고 싶지 않았다. 말투며 몸짓이 가까워지고 싶은 부류는 아니었다. 그래도 인사는 주고받았다.
가만히 있어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걸고, 번호를 물었다. 조금 자만을 보태자면, 그 시절 나는 꽤 괜찮은 외모였으니까.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오자, 나도 결심했다. 하루에게 가보자. 친하게 지내보자.
솔직히 얼굴은 흐릿했다. 옛날 친구가 보여줬던 사진을 떠올려봤지만, 또렷이 기억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단아하고 순수하며 꾸밈없는 동기 한 명. 그게 하루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녕.”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카톡으로 연락 줬던 감자돌이야.”
“알고 있어. 학창 시절에 너 봤어.”
“아, 그랬구나.”
순간, 공기가 뻣뻣해졌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머릿속이 멈췄다. 안 그래도 말을 잘 못하는데 얼굴도 빨개졌다.
학생회의 소개, 교수님 소개, 학교 건물 안내가 이어졌다. 그리고 점심시간. 맘스터치 햄버거가 나왔다.
내 인생 첫 맘스터치였다.
난 하루가 좋았다. 조용했고,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돈 문제도, 감정적인 기싸움도 없어 보였다. 나는 어색함을 덮으려 말문을 열었다.
“이거 맘스터치 햄버거 처음 먹어봐.”
“진짜?”
“응. 그리고 폰도 얼마 전에 처음 샀어.”
하루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맘스터치를 처음 먹는다고? 폰을 이제 샀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말 안 해도 될 TMI였다. 하지만 하루는 잘 들어줬다. 지금 떠올려도 그때 나는 헛소리를 많이 했고, 꽤 시끄러웠을 거다. 그래도 괜히 대화하고 싶어서 맘스터치 햄버거를 묘사했다.
“빵은 부드럽고 무엇보다 나는 튀긴 패티를 처음 먹어봐 그리고 양상추가 되게 신선한 것 같아.”
하루는 피식, 웃었다. 그게, 우리 첫 대화였다. 그렇게 대학교 견학을 마치고, 우리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하루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남자 동기들과 어울렸다. 하루 주변은 붐볐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자 동기들과 남자 동기들이 북적였다. 그래도 무덤덤한 채 주변에 관심을 안주는 하루였다.
돼지고기 파티가 열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연히도 학생회장 선배 맞은편이었다. 고기를 먹을 생각에 괜히 들떴다.
어쩌다 보니 내가 고기를 굽고 있었고, 타지 않게 신경 쓰며 생각했다.
‘역시 운동부 짬밥은 어디 안 가네.’
술은 적당히 마셨다. 분위기는 따르되, 취하고 싶진 않았다. 중간중간 슬쩍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하루를 바라봤다. 120명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던 하루. 창가자리 한가운데서 유독 조용한 사람이었다. 표정엔 지루함이 묻어 있었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왜인지 자꾸 시선이 갔다.
"혹시, 나처럼 이런 자리가 어색한 걸까?"
그러다 하루가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고기를 굽다 말고 담배를 피우러 간다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편의점에 들러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숙취해소제를 하나 집었는데, 마침 1+1이었다. 한 병은 자연스럽게 하루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밖에서 마침 하루가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말을 걸었다.
“벌써 집에 가시나요?”
“네. 통학이라서 지하철 막차 끊기기 전에 집에 가려고요.”
나는 왜 갑자기 존댓말이 나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럼 제가 역 앞까지만 같이 걸어도 괜찮을까요?”
“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오늘 개강파티, 어떠셨어요?”
“그저 그랬어요.”
잠깐, 내가 너무 부담스러웠나? 말을 걸지 말 걸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저 감자돌이예요.”
“네. 전 하루예요.”
그녀는 살짝 웃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지하철역까지는 고작 300미터 남짓한 거리.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서로의 발걸음을 의식하듯, 딱 반 박자씩 맞춰가며.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가볼게요. 파티 재밌게 놀다 가요.”
“아, 조심히 가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네.”
“그리고 이거 하나 드세요.”
나는 숙취해소제를 건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지하철 계단 앞에서 그녀가 내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녀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게, 우리가 두 번째 나눈 인사였다.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길었던.
그게 곧, 8년 후 오늘의 우리,
‘감자돌이와 하루’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나는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폰 화면만 바라봤다.
알림은 없었지만, 그녀는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쇼트커트에 뽀얀 피부. 귀에는 작은 귀걸이가 반짝였고, 약간 까칠해 보이는 고양이상 얼굴, 오뚝한 콧대, 선명한 눈매. 흰 셔츠에 치마, 그리고 부츠까지.
하루의 모습은, 마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박혔다.
그날 밤, 다시 돌아온 술자리에서 나는 이미 개강총회를 잊고 있었다. 2차로 가자는 말도 마다하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에 돌아와도, 머릿속은 온통 하루 생각뿐이었다.
그 짧은 만남이, 이상하리만큼 깊게 남아 있었다.
기숙사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짐을 옮기고 나자, 자취방은 이제 내 공간이 아니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냥 빈방. 그렇게 개강이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하루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나는 서툴렀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대화 주제도 잘 몰랐고, 내 머릿속은 여전히 운동, 게임, 건축, 과학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학교에서 마주칠 때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여전히 조용했고, 나는 여전히 그 모습이 좋았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