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별을 좋아한다

별을 가져오진 못하지만 훗날 별이 될게

by 감자돌이

기숙사 첫날.


룸메이트와 인사를 나눴다.
스물한 살의 문과 계열의 조용한 형이었고 조만간 군대를 가신다고 하셨다. 중간에 혼자 써야 한다고 했을 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개강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그동안 매 아침마다 몇 시인지도 모른 채 눈을 떴다.
훗날 형과 함께 살아보니, 코를 고는 것만 빼면 무던한 형이었다. 말 수가 많지도 적지도, 늦게까지 깨거나 또 일찍 깨지 않았다.

가끔 형이 “조식 먹으러 가자”라고 말할 땐, 말없이 따라나섰다. 3끼를 결제했지만 정작 1년간 먹은 건 손꼽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아침 먹는 게 힘들어졌다.
급식실은 고등학교 때 기숙사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식당에선 시리얼과 밥 중 하나를 골랐다.
그래도 아침에 우유를 주는 건 좋았다. 다만 조금 늦게 가면 초코, 딸기우유는 다 나가고, 흰 우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매번 우유를 챙길 때마다 아침에 우유 먹는 문화가 당연시된 건 언제부터인 걸까 생각했다.
초콜릿우유를 마시려면 6시 30분 전에 가야 한다는 걸 1년이 지나고 그때 알았다. 밥 맛은 좋진 않았지만 매사 감사하게 느끼고 맛있게 먹었다. 군가 아침에 따뜻한 밥을 만들어놓은 걸 먹는다는 건 좋았다.

형과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주로 대학생활에 대해 들었다. 후배, 동아리, 맛집, 연애사.
식사를 마친 뒤 씻고 돌아와 거울을 바라봤다.
화장실 거울 속 나를 보며 흥얼거리다, 고놈 참 훈훈해하며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기숙사의 암막커튼이 끝내줬기에 오전 11시든 오후 2시든 방은 어두웠다. 난 다시 잠에 들었다.
부쩍 잠이 많아졌었다. 이걸 난 잠의 부채라고 말했고, 고등학생 때 자지 못한 밀린 잠을 잔다고 표현했다.


감자돌이는 하루의 연락을 하루하루 기다립니다.


개강파티, 줄여서 ‘개파’에서 만난 동기들과 자취 친구들이 “나와서 놀자”라고 연락을 보냈지만, 사실 난 그런 연락을 기다린 게 아니었다. 남자들끼리, 우리끼리만 마셨으면 나갔을 법도 한데, 꼭 여성분들이 있어서 나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술 마실 때 여성지인을 부르는 건 이해가 안 된다. 지금까지도 불편하다는 인식이 없지 않아 남아있다. 크게 할 대화도 없고 말이다.

나는 ‘하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연락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긴 했었다.

그렇게 하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오늘 하루, 어제 하루, 내일 하루.

나에게 "하루"는 정말 하루하루 살아갈 이유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가가면 더 부담스러운 걸 알고 있기에, 조용히 기다렸다.


때때로 나랑 함께 대학에 온 고등학교 친구와 캠퍼스를 구경하거나, PC방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질렸다.
고등학생 때 밤새도록 하던 게임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재미가 없었다.

조금 성장했나? 나이를 먹었나? 생각했다.

개강이 올 때까지, 하루에게선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서운했다. 정말 안 오니 속상했다.
이, 속상했다.

톡이 어려운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해했다. 개인사가 있을 것이라고.


3월, 개강이 시작되었다.


하루는 나와는 다른 분반이었지만,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눴다.

하루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늘 인싸(활발한) 그룹과 어울려 다녔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분위기 속에 잘 녹아 있었다. 가끔 생각하면 이끌려 다니거나, 학창 시절에 외향적인 친구들이 친해지고픈 친구랑 같이 노는 것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다른 여자 동기들에겐 인사를 먼저 건넨 적이 없었다. 그저 하루에게만, 하루가 보이면, 후다닥 뛰어가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했다.

사귄 이후로 가끔 하루와 함께, 대학교 1학년 봄날을 떠올리곤 한다.
후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하루는 집안 사정이 복잡했다.
어머니가 가정사로 인해 남자를 경계했고, 그래서 하루도 연애를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가정을 떠받고 이른 취업을 꿈꿨다고 한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결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말해줬다.
개강파티 날, 내가 데려다준 일이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고, 그 후 여러 질문에 시달렸다고.
"감자돌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얘기했어?"
그런 질문들이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 만했다. 처음 만난 사인데 술 마시다가 데려다준다? 의심을 할만했다.


하루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관심이 몰리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나는, 모든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해맑게 하루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지금도 여전히 눈치 없는 남자친구라고 혼이 많이 나며, 낄낄 빠빠가 안된다. 8년 동안 하루 맞춤형 코딩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하루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아무튼 그 탓에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졌다고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다음 날이 되면 나는 계속 인사를 했다. 변한 점이 있다면 하루에게도 하고 같이 있던 여자동기들한테도 했다.

하루도 점점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어색했지만,
“안녕.”
그 짧은 인사 하나가 조금씩 사이를 이어줬다.



현재, 난 기억력이 안 좋아졌다. 특히 이런 과거를 회상할 때면 하루에게 기억의 실마리들을 물어보고 한다.



3월 중순이었다. 첫 데이트


나는 하루에게 같이 걷자고 했다. 걷고 싶었다.

날씨도 좋고 따뜻했다. 서로의 다른 차가움을 가진 우린 햇빛에 녹을 필요가 있었다.
마침 공강 시간도 길고, 약속도 없던 날이었다.
데이트라고 하기엔 민망했지만, 그냥 보고 싶다고 했다.

하루는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어색하지만 뚝딱거리며 만났다.
처음이었다. 단둘이. 분위기가 팡하고 퍼져갔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 자아는 이미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결혼, 신혼집, 아이 이름까지도.
심박수가 40~50이던 나는, 그날 100을 훌쩍 넘은 채로 그녀 앞에 섰다.

패션이나 외적인 묘사는 익숙하지 않지만,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자면
단아한 쇼트커트, 동그란 얼굴, 귀걸이, 짙고 깊은 눈매, 오뚝한 코, 작은 입술. 이국적인 외모였다.
그리고 뽀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치마.
블라우스에 가볍게 메고 있던 크로스백까지 그녀는 단정했고, 고왔고, 눈부셨다.

그에 비해 나는 운동바지에 맨투맨, 그리고 모자.
‘꾸밈없는 꾸밈’이란 이런 거겠지.
조금 민망했지만,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다가갔다.

그녀와 나란히 걷기만 해도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머릿속은 온통
"이게 진짜 사랑인가?"
"무슨 얘기를 하지?"
"어디로 가지?"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하루 씨, 일단 카페 가요.”
“네, 어디로 갈까요?”

사실 카페를 거의 안 가봐서 딱히 정해둔 곳은 없었다. 나의 삶 첫 경험들은 대부분 하루와 함께였다. 여자와 영화관, 포옹, 등등.
그런데 정문 너머로 어썸플레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말했다.
“저기, 어썸플레이스로 가시죠.”

하루가 물었다.
“어디요?”
내가 말이 작았나 싶어 다시 말했다.
“어썸플레이스요.”

하루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켰다.
“A Twosome Place… 아, 투썸플레이스요?”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걸 어썸이라고 하신 거예요? A가 있으니까?”

나는 웃으며 민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웃었다. 난 말했다. A가 T와 너무 가깝게 있다고.
그 짧은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카페는 썸을 타는 커플들로 가득했고,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프라페요.”

영화 "바람" 명대사를 치려다 참았다. 조금은 진중하게 보이고 싶었다.
나는 캐러멜 마끼아또를 골랐다.

지금 생각하면, 주문받고 5분 만에 마끼아또를 물처럼 마셔버린 나. 그리고 해맑게 정말 맛있다며 막 설명을 했다.
당시에는 눈치가 없었고, 하루는 다소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우리에겐, 웃음이 피었다. 서로 좋아했다.

같은 마을, 같은 학창 시절, 같은 대학교, 같은 과,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있는 서툰 인연의 시작이었다.

‘어썸플레이스’라는 나만의 발음 실수도 이제는 웃음이 나는 추억이 되었다.


이어 과거를 회상하면, 카페는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여성분을 대하는데 어색했고 숨이 턱턱 막혔다. 래서였을까, 괜히 하루와 밖으로 나와 걷고 싶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내가 하루에게 던진 첫 질문이 떠오른다.

“하루 씨는 달이 좋아요, 해가 좋아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질문이었지만, 사실 내게는 꽤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달은 내면의 고요함과 외로움을, 해는 밝음과 생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별이요.”
의외였다. 그리고 그 대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별이 좋다는 이야기를 참 예쁘게도 풀어냈다.
별빛이 반짝이는 순간, 그 조용한 존재감,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는 그 느낌까지.

나는 어느새 질문의 의도도 잊은 채, 하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저, 그녀 곁에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학교 안을 오래도록 걸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리 많이 아프지 않아요? 좀 쉬었다 가도 괜찮고 배고프시면, 뭐 먹고 싶은 걸로 가요.”

"감자돌이씨는요 뭐 좋아하세요?"

"전 다 좋아해요, 감자돌이씨가 먹고 싶은 걸로 가요"

젤 어려운 답변이었다.

국밥, 고기, 무한리필, 분식, 치킨, 피자, 찜닭, 냉면 무엇을 먹지 고민을 했다.

시간도 늦었고 하루는 조용한 장소를 좋아했으니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분식집을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