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류, 모든 거에 대한 결정을 미룬다

후회되는 지난 날들, 나 때문에 몇 명이 상처를 입는 걸까

by 감자돌이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도, 만나주는 너에게 너무 미안했다.


양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는 내 연락을 받아주었다. 받아주는 친절함 뒤에는 속상함과 짜증, 그리고 화가 숨어 있었다. 나는 하루가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잠깐의 순간일지라도, 단순히 사랑에 쉽게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소위 ‘첫눈에 반했다’는 말처럼, 정말 운명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놓고 싶지 않았고, 반드시 함께하고 싶었다.


하루는 내가 그동안 군대에 간 줄 알았다고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특전사에 입대한 줄 알고, 일부러 연락을 끊고 떠난 줄 알았다고 했다. 당황했지만, 나는 하루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양심이 없었다. 하지만 약속했다. 하루에게 말했다.


“나는 대단하거나 멋진 남자로 보이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널 평생 사랑하고, 너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할 자신은 있어. 언제든 나보다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난다면 떠나도 좋아. 하지만 나는 더 노력할 거야. 네가 떠나지 않도록, 네가 행복하도록.”


지금도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지만, 여전히 나는 가끔 그 말을 꺼낸다.


하루는 그런 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었다. 단, 다시 이러면 영영 안 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다. 같이 걷기, 수다 떨기, 데이트하기… 소위 ‘썸 탈 때’ 하는 그런 일들이었다.


하루가 들은 단어, "보류"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하루가 내게 고백을 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하루라는 아이를 더 이해하고, 천천히 다가가고 싶었다. 첫인상부터 가시가 돋은 장미 같았기에, 시간을 두고 싶었다. 미래를 함께하고 싶었기에 적어도 1년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고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먼저 고백할 줄은 몰랐다.


학교 서랍장을 닫던 날, 하루가 유독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다가왔다.


“감자돌이야, 나 너 좋아하는데… 나랑 사귈래?”


얼굴이 붉어졌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오래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보류할게.”


그 한마디에 하루는 얼마나 더 당황했을까. 좋으면 사귀면 되고, 싫으면 거절하면 되는 건데, ‘보류’라니. 하루는 자신이 어장 관리당하는 줄 오해했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했다. 내 뜻과 과거를 알 리 없는 하루의 친구들까지 주위에서 ‘어장 친다, 간 본다’라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내 성격을 아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를 붙잡고 진솔한 대화를 해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하루는 통금이 있는 아이였고, 마주 앉아 말할 틈이 많지 않았다. 애매하게 말하느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통학 때문에도 힘들어했다. 하루 왕복 4시간. 그 이야기를 듣다 문득, 묵혀둔 방이 떠올랐다.


“안 쓰는 방이 하나 있는데, 이미 1년 치 월세는 다 내놨어. 월세는 필요 없고, 가스비랑 전기세만 내면 돼.”


하루는 고맙다고 했지만, 어머니께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하루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훗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을 때, 하루는 세 가지가 이상했다고 말했다.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하루도 사람들에게 많이 데고, 힘든 과거가 있었기에 쉽게 믿지 못했다. 그때는 한창 몰래카메라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였다고 했다. 나는 세상일에 무심했고, 분위기를 간과했다. 왜 그 방을 팔지 않았는지 의아했다고 했다. 돈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기숙사에 붙었으면 승계를 하는 게 당연한데 왜 그러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승계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화를 내셨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하루는 새내기 시절에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사귀고 난 뒤에는 그 이야기를 하며 신기한 아이 같다고 했다.


시험 기간이나 공강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곤 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 꿈도 없었고, 건강도 잃었고, 목표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성적은 의외로 잘 나왔다. 4.4. 물리학 교수님이 말했다.


“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나? 보통 두꺼운 책을 스스로 풀어보는 학생은 드물어. 교수의 길은 생각 없나?”


혹했다. 물리학 교수라니, 너무 멋져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썸을 타는 사이였지만 내게 도전해 보라고 했다.



과거의 에피소드 – 복숭아 씨와의 과팅


이제야 적는 과거의 에피소드다. 나는 하루에게 소개팅이나 과팅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은 꽤 나갔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처음은 과팅이었다. 우리 학과와 경영대학 ○○과가 함께하는 자리. 남자 4명, 여자 4명. 학생부 여자애들의 부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하루와 연락이 뜸했고, 나도 외로웠다. 어쩌면 가벼운 만남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약속은 저녁 6시, ○○ 건물 3층 룸술집.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한 여성분이 들어왔다. (이 글을 하루가 본다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첫인상은 예뻤다. 긴 생머리, 샤브테 향 향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트렌디했다.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까진 몰랐다. 들어온 순서대로 짝이 된다는 사실을. 이후 친구들과 다른 여성분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선배가 말했다.


“재밌게 놀아라. 커플 탄생하길 응원한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이 참 예뻤다. 그러나 나는 맞은편의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옆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대화했지만, 나는 묵묵히 술만 홀짝였다.


“이름이 뭐예요? 마주 앉은 지 10분이 지났는데 아직 소개도 못 했네요.”

“안녕하세요. 감자돌이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례했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저는 복숭아(가명)예요.”

“아, 네.”


차갑게 답했다. 훗날 이 일로 학생부 친구들에게 한 소리 듣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여성분들은 분위기를 살리려 게임을 제안했다. 손가락 접기, 진실게임, 투표 게임. 예쁜 여성분들이 나를 몇 표 찍어줬다. 괜히 기뻤다.


“감자돌이가 사실 컴공에서 제일 괜찮은 애야. 차가운 게 매력이지.”


그때 복숭아 씨가 물었다.


“과는 마음에 드세요?”

“네, 괜찮습니다.”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어…”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그분은 경영대학에서 ‘여신’이라 불리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땐 알 바 아니었다. 내 머릿속엔 하루에 대한 미안함, 내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다가올 대가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다.


밤 10시, 1차가 끝났다. 대부분은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며 2차로 향했다. 나는 갈 생각이 없었다.

그때 복숭아 씨가 말했다.


“우리도 2차 갈래?”

“괜찮습니다. 그건 힘들 것 같네요.”

“그럼 술 깰 겸 학교라도 같이 걷자. 혹시 모르잖아”

“그래요.”


그녀는 말이 많았다. 나는 걷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여자친구 사귀어 본 적 없어?”

“있습니다.”

“아, 그럼 스킨십이나 가벼운 거에 부담스러워하는구나.”

“없지 않아 있죠.”


학교 편의점에서 음료수와 라면을 먹으며 잠깐 더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늦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며 말했다.


“2차 같이 못 가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복숭아 씨가 말했다.


“처음인데, 번호 좀 줄 수 있어?”


폰에 번호를 찍어주고, 나는 조용히 기숙사로 걸어왔다.


걸어오면서 후회가 밀려왔다. 복숭아 씨와 잘 안 된 걸 후회한 게 아니라, 내 태도였다. 무례했고, 예의가 없었다. 그분은 분명 기대하고, 준비해서 온 자리였을 텐데 나는 그걸 무너트린 게 아닐까. 하지만 그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게 더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