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짐과 하루의 용서

하루에게 과거이야기를 해준 날

by 감자돌이

하루에겐 날아가 버린, 그렇지만 나에게 있는 하루 사진


커버 사진은 오래전, 하루와 크게 다퉜을 때 하루가 찍어준 것이다. 서로 감정이 격해져 있던 기간이었지만, 하루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늘이 너무 이뻐서 찍었다고 했다. 순수한 하루였다.


더 강한 남자가 되고 싶었지만, 다음 생에 군대 갈게


그때는 대학 2학년 무렵이었다. 사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던 시기였다. 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육군 XX사단 훈련소로 향했고, 낯설기보단 즐거운 환경에서 규율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 이른 새벽, 예고 없이 발작이 찾아왔다. 난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살면서 국군병원을 가본 적 처음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정신을 추스르며 "괜찮다, 계속 훈련받고 싶다"라고 대대장님, 소대장님께 말했지만, 군은 단호했다. 귀가 조치. 그 한마디로 내 모든 의지는 무너졌다. 결국 1년 뒤, 면제 판정을 받았다.


국방의 의무보단, 자기애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 묻는다. 그때의 선택은 내 욕심이었을까. 군대는 내겐 단순한 의무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바꾸려는 실험이었다. 어휘가 조금 그렇지만 시간도, 환경도 나와 잘 맞는다고 믿었다. 체력과 정신력도 자신 있었다. 사상도 군과 맞는다면 아예 군인으로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결심도 있었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 나약한 내 과거를 덮고 싶었다. 중2 때부터 언젠가 터질 불안장애, 걱정, 강박증을 치료할 방법과 힘, 에너지를 얻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 모든 게 무너졌다. 귀가하던 날, 서울역 플랫폼에 앉아 휴대폰을 켰다. 나는 하루에게 연락했다. 하루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탈영한 거야? 나 보고 싶어서 탈영한 거 아니지?” 그만큼 예상치 못한 귀가였다. 하루는 카페에 앉아 내게 편지를 쓰며, 내가 남긴 짧은 영상들을 보며 날 기다렸다고 했다. 그 영상을 보고 있으면, 군대에서 따돌림이나 적응 문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영상 속의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니까.


탓도 지겹다. 반복되는 굴레.


본가에 돌아와 생각했다. 이제는 약을 먹어야 한다. 뇌전증. 나는 원인 불명의 이 병과 이미 오래 함께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약을 제멋대로 복용했다. 필요할 때만 먹고, 귀찮으면 건너뛰었다. 소홀했다. 그 대가로 대발작은 자주 찾아왔다. 쓰러질 때마다, 내가 무너질 때마다, 가까운 미래의 두려움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수명이 단축될까, 치매가 올까,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짙게 드리웠다. 그래서 남 탓을 했다. 부모를 탓하고, 친구를 탓하고, 하루를 탓했다. 심지어 스스로까지 탓했다.


첫 뇌전증 대발작 때 3일 동안 의식이 없었으니 거의 사경이었다.


그때의 나는 분노와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속이 갉아먹히는 기분이었고, 남에게도 그 독을 뿌렸다. 변하고 싶었다. 치료를 받고 싶었다. 몇몇 지인에게 조심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살고 싶다”,

“이상하다”,

“스스로 죽을까 두렵다.”,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됐다"


하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겉보기엔 멀쩡했으니까. 늘 웃으며 농담을 하고, 과제도 하고, 시험도 치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머니와 누나 앞에서 난 강한 사람이었고, 그녀들의 행복을 목표를 세우며 살아갔다. 뭐 강해져야만 했기도 했다. 나는 공감하면서도 내 안의 어둠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횡설수설, 어버버 한 말투로 떠들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병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주변은 깨달았다. “그때 네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지 이제 알겠다”라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스스로를 더 강하게 몰아붙이고 각성 모드를 켜듯 살아갔다. 상태는 심했지만 난 꾹 삼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누나도 결혼하고 어머니도 학교생활 잘하실 때 조용히 터질 거라고. 뇌전증 때문에 대학도, 군대도, 많은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나를 더 옥죄었다. 차라리 첫 대발작 때 내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뇌사되길 희망했었다. 모순적이었다. 그래서 정신병을 공개적으로 털어놓고 치료받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다. 큰 하자가 하나 있는데, 뇌전증까지 꺼내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알았으면 난 죽었을 거다. 규율 위반자 감자돌이


그 와중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바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 공허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탈. 하루가 있었음에도, 나는 텅 빈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감정에 서툴렀지만 공허함이 이성이 주는 사랑과는 거리가 달랐다. 집안 문제, 환경 문제, 죽음들, 질병, 혼자 살아보기. 복잡 다난하게 공허함이 생긴 거였다. 이 또한 다 핑계겠지만 말이다. 난 어느 날, 술자리에서 호감을 보이던 여자와 마주 앉았다. 술잔은 오갔고, 분위기는 점점 위험한 쪽으로 기울었다. 조용한 방, 불 꺼진 공간, 단 둘만의 공기.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 흔들렸었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한심한 놈, 그깟 외로움, 공허함 때문에 뭐 하는 거냐. 정신 차려라.”


결국 그 여자를 재우고 돌려보냈다. “다신 연락하지 말자”는 말과 함께. 찬물로 세수를 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눈앞에 겹겹이 껴 있던 그릇된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진 자리에는 날 선 죄책감이 남았다. 윤리적 기준이 무너진 흔적, 금이 간 자존심. 금이 가버린 도덕적 양심.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자. 하루야 미안해


다음 날 아침, 하루를 불러냈다. 새벽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루는 내 표정을 보며 이미 짐작한 듯했다. 술냄새, 이른 아침, 그리고 사과. 모든 정황이 무겁게 겹쳤다. 하루는 바람을 특히 싫어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하루의 아버지가 바람과 술,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는 늘 말했다.


“난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기 싫어. 그래서 널 만난 거야. 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부분을 다 갖췄는데 여자를 한 명 한 명 소중히 대해주잖아.”


그런데 내가 하루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 바람, 사실이 가슴을 찔렀다. 한 시간 넘게 우리는 길을 걸으며 대화했다. 나는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고 하루의 결정에 맡겼다. 결국 하루는 깊이 고민하다 말했다.


“용서해 줄게.”


그 한마디는 구원 같았고 동시에 더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난 하루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긱사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내 실수로 우리의 관계가 어색해짐이 미안했다. 그날 맹세했다. 용서해 준 하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깨진 항아리를 다시 이쁘게 만들어보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성인이면 모를 수가 없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정말 어렵다 못해 불가피하다고 보이곤 한다. 특히 감정이 섞인 부분에 대해서는 크다. 하루는 어느 날,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마 날 이해해보려 한 것 같았다. 워낙 독특한 남자라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고 퍼져버린 소문도 한 몫했다.


하루가

"벌써 우리가 연락을 한 지, 1년이 지났는데 난 아직도 널 잘 모르는 것 같아. 친구들도 네가 자꾸 과거를 숨긴다고 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지금까지 만났던 이성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밝은 이야기도 아니라 그간 말하지 않았지만 하루에게는 말하기로 했다. 이번 화를 쓰는 순간, 하루가 어쩌면 어머니나 누나보다 날 잘 알 것 같다고 생각된다. 하루와 난 엄청 걸었다. 이른 저녁초부터 다음날 새벽 해가 뜰 때까지. 난


"나의 삶을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이 잘 없어. 그러니 하루가 물어보면 부분 부분 말해줄게"


하루의 감자돌이 취조가 시작됐다.


"정말 날(하루) 결혼할 생각으로 만난 거야?"


"응, 최대한 사귀기 전 오래 신중히 보고 결정하려 했어"


"4월 달엔 말없이 왜 사라진 거야"


"있는 그대로를 말하면, 4월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내가 뇌전증으로 3일간 눈을 뜨지 않았고, 누나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한 달이거든. 악재가 겹치는 달이라서 연락을 못한 건 미안해."


"왜 이런 걸 미리 말 안 해준 거야?"


"내가 늘 빙빙 돌려서 말해서 미안하지만, 난 하루 네가, 날 있는 모습 그대로 봐줬으면 했어."


"왜 나였어? 너 지금도 그때도 인기 많았잖아"


"하루, 너를 처음 만난 날, 느꼈어. 얘다, 그래서 너야."


이런저런 과거, 가출한 이야기, 경찰서, 해킹, 선수시절, 화상, 교통사고, 손가락 잘림, 등등 나열하기도 많은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되게 스펙터클한 삶을 살았네"


하루는 그러고 날 포근하게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