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년을 2번이나 보냈구나
본래는 하루와 대학 시절을 회상하려 했지만, 어제 퇴근 후 나눈 좋은 대화가 떠올라 잠시 적어본다. 문득 휴대폰을 보니 2919일이 되어야 하는데 2922일이었다. 날짜 차이는 윤년 때문이라고 하루가 말했다. 4년에 한 번 오는 윤년, 우리는 2020년과 2024년 두 번을 함께 보냈다. 특별한 해를 함께 보냈다는 것이 행복했다. 누구보다 시간에 집착을 하며 살았지만 정작 의미부여를 해본 적은 없었기에 좋았다.
서론은 이쯤 하고, 하루와의 이야기를 적어보겠다.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듯 마음속엔 후회가 많고, 밤이 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을 거부한다. 그럴 때마다 하루는 나를 재워주곤 했다. 나는 늘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지만, 하루는 토닥이며 잠들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불안하고 무서운 게 있으면 언제나 하루에게 안기며 털어놓아도 좋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런 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하루에게 털어놓아도 되는데, 그 당시 난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서 혼자 해결하려 했고, 쓸데없이 가부장적인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여행을 가면 하루는 항상 말했다.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늦더라도 연락 오면 연장하자. 너 깊게 자면 푹 잘 수 있으니까. 돈보단 잠이 더 중요해. ” 난 하루를 먼저 재우고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지만. 다음 날 하루 덕분에 오후 2시까지 깊게 잤다. 정말 ‘푹 잤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개운하고 행복했다. 이 당시에 잠의 행복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날 하루는 기장을 가자고 했다. 버스를 타고 기장에 도착해, 한식 러버인 하루가 추천한 연잎덮밥을 먹었다. 피곤했을 텐데도 웃고 챙겨주는 하루가 고마웠다. 나는 아직 대학 1학년이라 차도 없고 운전도 못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함께 밥을 먹고, 기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좋았다. 하루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렇게 우리의 첫 여행은 끝이 났다. 앞으로는 언제든, 또 많은 여행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루. 어느 날 하루와 함께 이마트에 갔었다. 문득 하루가 많이 먹지 못하고, 집에 먹을 것도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하루는 이래야 이뻐 보인다고 말했지만 그저 나한텐 걸어 다니는 선인장, 어서 먹여서 통통하게 찌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너무 말랐었다. 하루는 알바를 여러 개 뛰며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위해 장을 보기로 했다.
“하루야, 먹고 싶은 거 다 사. 비용 생각하지 말고, 눈치도 보지 말고. 그동안 먹고 싶었던 걸로 냉장고를 가득 채워. 남으면 내가 같이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마. 돈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다 잘될 거야.”
나는 돈이 없을 때의 피곤함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 보는 카트를 끌며 하루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루는 늘 적은 돈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내며 살았기 때문에, 경제관념이 철저했다. 물건을 꼼꼼히 비교하며 고르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야채를 고른 하루는 내 눈을 바라봤다. 거의 다 샀다는 신호 같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담자고 했다. 고기도 있고, 바닷고기도 있고, 간식도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고기 코너에 가니 하루는 늘 앞다리살과 뒷다리살만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양한 부위를 담았다. 목살, 삼겹살, 소고기까지. 또 물고기도 자주 못 먹어봤다길래 챙겨 넣었다.
카트는 어느새 한가득 찼다. 나는 “이건 다 하루 거야”라고 말했다. 하루는 비용을 걱정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채워주고 싶었다. 햇빛 쨍쨍한 날씨, 우리는 많은 짐을 어떻게 들고 갈지 고민하다 택시를 타고 하루의 집으로 향했다. 하루의 냉장고에 하나둘씩 채워지는 음식들. 나는 하루가 매일 배부르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길 바랐다.
연인들의 계절 속에서 하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나와 같은 마을 출신에, 같은 초중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그때 하루를 몰랐다. 하루는 운동회에서 달리기도 했고,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운동부였기에 학교 생활을 잘 못해서 그런가, 학교에 폭력이나 왕따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마스에 하루는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루는 예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로 인해 대학생이 된 후에도 학생부 친구들이나 번호를 따간 남자들이 다가와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바보 같고, 순수하고, 무해한 생물처럼 생겨서 맘에 들었고 편했다고 한다. 하루는 행복했으면 했다. 과거가 어떻든, 주변 환경이 어떻든, 하루에게 한 가지 부탁했다.
“주변이 어떻게 평가하고, 행동하고, 말을 하든, 우리 둘이 똘똘 뭉치면 이겨내지 못할 건 없어.”
우리는 그렇게 조용하고 한적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하루는 6주년 이후부터 인파가 많은 곳에 놀러 가자고 가끔 말한다. 나는 그럴 때면 ‘드디어 나도 가보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하루가 괜찮을까 관찰한다. 하루가 두려워할 때도, 나는 듬직하게 하루를 지키며 함께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이 글이 브런치에 올라갈 때면, 8주년을 지나 4일이 흘렀을 것이다. 원래는 여행 가서 하루에게 축하 선물을 주려 했지만, 하루는 이번 주 화요일에 먼저 나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선물을 주었다. 손편지와 꽃. 그중에서도 하루가 예쁘다며 추천받아온 리시안셔스 꽃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꽃말처럼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느껴졌다.
우리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하루가 참 좋았다. 초 8개를 케이크 위에 꽂으니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촛불을 끄며 영상도 남겼다. 원래는 소감 같은 걸 말하지 않던 무뚝뚝한 내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초를 후— 불며 끄고 나니, 문득 80주년을 상상했다. 그땐 케이크 전체가 초로 가득 덮여 있을 테고, 그 모습은 정말 인상적일 것이다. 20세에 만나 80주년을 맞는다면 우리는 100살. 그날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하루는 부탁을 했다. 과거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지 말고, 오히려 앞으로는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심을 조금은 순화시키라고, 평범해지라고 했다. 하루와의 8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