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사랑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by 감자돌이

하루야


하루야, 넌 세상에 하나뿐인 아이야. 자기 자신을 사랑해 줘.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만큼은 스스로를 꼭 아껴주길 바라.


2학년이 되면서 우리 둘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저녁을 먹은 뒤, 도서관 2층이나 3층 옆에 나란히 앉아 공부했다. 노을이 물들면 잠시 교정을 걸으며 숨을 고르고, 그때 난 하루가 좋아하는 식혜를 건네주곤 했다.


사실 식혜엔 하루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하루는 늘 돈을 아껴 써야 했기에 식혜를 대량으로 사서 하루에 하나씩 먹었다고 했다. 식사 대용이었다. 힘든 시절엔 사흘에 한 번씩만 입에 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하루는 여전히 식혜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그 좋아함이 과거의 궁핍한 기억에 묶여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그 기억을 놓아주었으면 한다. 궁핍한 기억대신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찬 기억을 사랑해 보자.


늘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부딪힘은 어쩔 수 없어


다시 글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가끔 편의점이나 야식으로 작은 데이트를 하고 도서관으로 돌아와 공부를 이어갔다. 하루를 마칠 때면 서로를 데려다주며 발걸음을 맞췄다. 늘 내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하루가 있었다.


길을 걷다 보면 학점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하루는 성적이 좋지 않다며 1학년 때 학사경고를 맞았다고 했다. 밤새워 공부했는데도 시험을 놓친 적도 있었고, 알바로 지쳐 잠들어 시험을 놓친 적도 있다고. 그러면서 속상해했고, 자책과 자기비판에 갇히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 과거가 겹쳐졌다. 나도 무리해서 무엇인가를 놓친 적이 많았다.


“여긴 내가 올 자리가 아닌데 괜히 왔다.” 하루가 처음에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하루를 다독였다. 면접도 당당히 치르고 성적도 충분히 되고, 공대에서 단 몇 명만 뽑히는 자리에 들어간 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에겐 집안 사정까지 겹쳐 힘든 일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그래서 나는 더 하루를 돕고 싶었다. 내가 안 좋은 일이 닥쳤던 시절,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누구나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닮아 있었다. 남에게 쉽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버텨온 만큼 신념이 단단했다. 하지만 하루 입에서는 종종 체념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공부는 나랑 맞지 않아. 어차피 평생 집에 묶여 내 삶은 못 살 거야. 결국 마을에 갇혀 알바나 공장 일을 하게 될 거야.” 처음의 빛나던 하루는 사라지고, 부정적인 하루가 눈앞에 있었다.


그럴 때 나는 헤어짐을 생각할 수도 있었다. 차마 "나약하다"라는 말을 뱉을 수 없었다. 하루는 내가 아니니깐, 존중해줘야 했다. “그만하자, 하루야.” 그 말을 내뱉었다면 지금쯤 나나 하루나 다른 사람 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순수하게 서로가 좋아서 만났고, 함께하자 약속했기에, 크나큰 잘못이 아니고선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저 하루의 삶이 힘든 거였으니깐. 난 하루를 사랑했다. 아직까지도 사랑한다.


나는 하루 손을 놓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와 누나, 내 삶을 지탱해 온 두 여자의 모습이 하루에게 겹쳐 보였다. 알고 있었다. 하루의 과거가 아프고 힘들었기에 우리의 여정이 길고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한창 사랑과 알콩달콩함으로 그림을 그려도 시간이 모자랄 거라는 거. 그럼에도 나는 감내하기로 했다. 오히려 그 고통마저 하루와 함께 겪기로 했다. 늘 말했었다. 하루를 사랑했다. 대가가 어떻든 이겨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하루가 체념에 기울 때마다 반대편에 서서 하루를 어루만지고, 조금이라도 희망을 붙잡아주려 했다. 세상은 좋다고, 밝고 재밌으며 긍정적이라고.


사랑하지만 부딪혀야 할 것 같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그 스트레스 속에서 알바를 해야 할 이유, 대학을 다닐 이유, 나와 사귀어야 할 이유, 나아가 살아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했다. 하루는 장미 같았다. 내 속을 후벼 파면서도 스스로 말했다.

“감자돌아, 넌 세상에 좋은 남자가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남자야. 난 널 정말 좋아하지만, 이런 여자야. 이것밖에 안돼. 그러니 날 놓아주고 좋은 여자 만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하루의 탄생화처럼, 우리 커플의 행복은 언젠가 올 수 있지만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 시기 나 역시 힘들었다. 힘들었지만 오히려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가끔 자해를 했다.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가시가 돋친 장미 같은 아이였다.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가시가 나를 찔렀고,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조차 아픔을 느꼈다. 장미 덩굴 속에 울고 있는 어린 하루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안아주는 거였다.


우리가 처음 싸웠던 날을 기억한다. 비 오는 날, 호수 앞. 처음 내가 화를 낸 날이었다.

하루는 울며 말했다.

“감자돌아, 헤어지자.”

그 말속에 얼마나 큰 고통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루가 쉽게 꺼낼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힘든 아이를 억지로 붙잡는 대신 놓아주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란 확신도 들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하루는 울었다. 우산을 놓친 채, 나를 밀치기도 하고 손톱으로 할퀴기도 했다. 나는 더욱 세게 안아주었다.

“고통스러웠구나. 괜찮아, 내가 있어. 끝까지 해보다가 안 되면 그때 내려놔도 돼.”

그 순간, 세상은 사라지고 오직 하루와 나만 남아 있었다.


하루는 말했다.

“상처 안 주고 헤어지려고 마음 굳게 먹고 왔는데, 왜 안 헤어져?”

나는 대답했다.

“처음에 말했잖아. 헤어질 행동을 해야 헤어지는 거지. 마음이 떠나야 끝나는 거지.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들을 이렇게 끝내려던 건 아니잖아.”


나는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물을 닦아주고, 차가워진 어깨 위에 겉옷을 덮어주었다. 출출해진 하루와 함께 음식을 먹으러 갔고, 가는 길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하루는 조금씩 진정되어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렇게 좋아?” 하루가 물었다.

“응. 난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 너도 내가 도와줄게. 처음 우리가 사랑을 말했을 때를 기억해. 힘들고 지쳐도 난 이겨낼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네가 날 싫어지면 그때 떠날 거야.”


하루를 집에 데려다주며 말했다.

“푹 씻고, 나쁜 마음 갖지 말고, 푹 자.”

하루는 비 맞지 말라며 우산을 내게 건넸지만, 나는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기숙사까지 걸어갔다.

수많은 변수와 하루에 관한 미래를 예측하면 나의 미래를 생각하며 걸어갔다. 이때는 몰랐다.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를 하나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