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과 불연속 사이
2학년과 3학년의 시간은 하루와 감자돌이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문득 미적분이 떠올랐다.
문제를 풀다가 가끔 불연속점이 나타나듯, 우리의 관계도 매끄럽지 않았다.
인생은 시간이 포함된 이상 연속성을 띨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결국 내가 포기하면서, 쉼표와 함께 불연속점을 찍어야 하는 걸까.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수학과 사랑은 다른 개념이었다.
2025년의 긴 추석 연휴.
하루와 데이트를 하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 아이와 가정을 꾸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계획 예정 대로라면 곧 멀지 않아 하루, 감자돌이의 2세는 세상에 있을 것이다.
하루는 내 추석에 얽힌 좋지 않은 기억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그 추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식사 도중 하루가 유난히 예뻐 보였다. 이 여자와 함께라서,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너라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우리는 종종 과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이나마 하루가 과거의 풋풋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고, 그때만큼 핑크빛이 도는 연애는 이제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연애에 비하여 지금 연애가 훨씬 좋고 편하지만, 하루는 여자라면 알콩달콩하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던 썸때와 연애 초창기를 무척이나마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루가 나를 두 번째로 떠났던 날, 그날도 비가 왔다.
“이런 싸움뿐인 연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정말 최악이야. 그만하자.”
하루는 그렇게 말하고, 내 곁을 떠나겠다고 했다.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그날 하루는, 아직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고 한다.
“다 내 곁을 떠난다고, 엄마도, 아빠도, 누나도, 할머니도, 다 내 곁을 떠난다고. 난 함부로 남을 대한 적이 없는데. 다들 나쁘다.”
무겁고 낯선 말이었다.
나는 울지 않았지만, 하루는 나를 달래주었다.
그날은 하루가 처음 본 나의 어두운 모습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강하고, 듬직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하루는 당황했지만,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울지 마. 그래도 나 때문에 네가 힘들잖아. 감자돌아, 좋다고,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걸 이겨낼 순 없어.”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다 이겨낼 수 있어? 공부할 열심히 할 때도, 운동을 열심히 할 때도, 삶에 있어서도 절대 포기란 걸 몰랐는데. 그 모든 걸 버텨도 이길 수가 없었어. 그래서 생각해 냈던 게 감정이었는데, 감정도 아니라면 그럼 무엇이 모든 걸 이겨내게 할 수 있어?”
우리는 비를 맞으며 말을 잇지 않았다.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 부딪혔다.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문제 해결도 되지 않았다.
하루는 “이건 문제가 아니야. 감정의 부딪힘은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수치화하려 했지만, 하루는 감정에는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 삶 속 여성들은 언제나 눈물과 함께 있었다.
폭력과 두려움, 압도적인 공포와 무기력 속에서 울던 누나와 어머니.
죽음을 마주하고 흐느끼던 친척과 지인들.
그리고 내 앞의 하루까지.
‘내가 삶을 잘못 살아온 걸까. 그래서 내 주위의 여성들이 이렇게 울어야 했던 걸까. 내 가치관이, 내 마인드가 잘못된 걸까.’
그때 머릿속의 또 다른 내가 대답했다.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너 스스로 도망칠 것 같다면, 그건 잘못된 신념이야.”
나는 잘못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주어진 대가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삶이었다.
후회 없는 선택을 믿으며.
나는 하루에게 약속했다.
“하루가 다 낫고, 마음도 현실도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헤어질지 결정하자.”
그만큼 하루가 좋았다. 이 순간을 달콤한 말로 넘길 정도로 하루를 더 보고 싶었다.
매년 4월 xx일, 나는 수업이 있든 없든 조용히 사라졌다.
그날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적적한 곳의 벤치에 앉아 그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나는 하루를 위해 노력했다.
매일 일기를 썼고, 바른 몸과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예쁜 말들을 건넸고,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그 시간들은 행복했다. 하루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와 실습실에서 전기회로를 만지며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다음 날 아침,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나는 학교 정문 앞에서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구급차 안이었다.
“여기 어딘지 알아요? 이름이 뭐예요? 어제 뭐 했는지 기억나요? 오늘이 며칠이에요?”
응급대원의 질문에, 나는 내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과거들.
의사 선생님이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넌 대발작을 해도 회복이 빠르다.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릴 때 운동을 많이 해서도 있을 거고, 간절하기도 하니깐 그렇겠지. 하지만 그 간절한 이유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짊어진 짐이 많아서인데 그게 너의 신경을 폭주하는 거야. 악의 순환이지. 하지만 그렇게 버티다 보면 네 건강과 삶이 갉아먹힌다. 이제 그만해라.”
고개를 돌리자 하루가 있었다.
응급대원이 물었다.
“이 여자분 누군지 알아요?”
나는 힘겹게 말했다.
“하루예요.”
그리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
하루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정말 마음이 아팠어. 누구보다 강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쓰러지는 걸 보고 인간은 컴퓨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응급차가 병원에 늦게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했다고 의사는 응급대원들을 혼냈다.
의사는 날 보며 말했다.
“몇 번째인지 알지? 이제 그만해라. 무슨 말하는지 알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더 해볼게요. 아직 몇 번 남았잖아요.”
병원을 나서며 하루는 울었다.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하루는 내게 속삭였다.
“아프지 마, 이 바보야.”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오래 남았다.
우리는 여전히 불연속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불연속이기에, 서로의 결핍과 감정이 보였다.
미적분의 그래프처럼, 인생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진다.
이제 안다.
모든 걸 이겨내는 건 이성도 감정도 아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일.
그게 진짜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