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이 단어는 유독 그 울림조차 처량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사전에서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기분'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 정의만큼이나 짧고 쓸쓸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외로움은 단순히 혼자 있어서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본질적인 결핍이 채워지지 않아 발생하는 '마음의 허기'에 가깝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누구나 소속감, 사랑, 인정에 대한 욕구를 가집니다. 어쩜 저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 욕구들이 적절히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 뇌는 비상벨을 울리는데, 그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통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체적 상처만큼이나 실제적인 고통으로 뇌가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고통이 짙어질 때, 우리는 종종 부족한 판단을 내린다는 점입니다. 이겨내기 힘든 외로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당장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근시안적인 선택으로 우리를 내몹니다. 큰일이 닥쳤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 이것들이 그릇되게 표출되어 범죄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데이팅 어플을 켜고, 헌팅포차나 클럽의 소음 속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끊임없이 소개팅을 하거나 동호회를 전전하며 사람 속에 파묻히려 노력하죠. 그렇게 하면 해결이 될까요? 저를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저 또한 외로움이라는 깊은 강에 풍덩 빠져 허덕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사랑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없었고, 마음의 구멍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운동에 매진해 봐도, 결국 '이성만이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그것을 갈구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 어렸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아야 할 수용과 이성에게서 느끼는 사랑을 구분하지도 못했으니까요. 나아가 사랑이라는 올바른 정의까지도요.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저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무려 12명의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거듭될수록 선명해지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감정 표현을 수혈받고 싶을 뿐이구나.'
결국 저는 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여자분들에게 또 다른 외로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본인의 결핍을 그릇된 방식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타인에게 상처라는 부메랑을 던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고 제 외로움이 나아졌을까요? 아니요. 정확한 원인을 모른 채 받는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붓는 물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외로움은 실로 위태로운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회적으로도 외로움 때문에 극단적인 마음을 먹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례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내면의 소외감이 외부를 향한 공격성 혹은 슬픔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가끔 길을 가다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절망에 빠진 분들을 보시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외로움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제가 그 방황의 시기에도 자기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로움은 때로 강력한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외로움도 크게 부각해서 바라보면 크지만 작게 보자면 마음속 감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타인과의 연결이 끊겼을 때, 저희는 비로소 '저희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창조적 고독, 파괴적인 외로움이 아닌, 자발적 고독을 통한 고립으로 승화시킬 때 인간은 가장 깊은 사유와 예술적 영감을 얻습니다. 저 또한 그 결핍을 메우려는 본능적인 발버둥 덕분에 역설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외로웠기에 공부했고, 외로웠기에 운동했으며, 외로웠기에 저를 증명하려 애썼습니다. 저도 했듯 독자분들도 나아가 세상의 모든 분들이 하실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외로움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깊은 '나'를 만나기 위해 잠시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상태일 뿐입니다. 타인의 사랑은 잠시 온기를 줄 순 있지만, 내면의 근본적인 결핍을 완전히 메워줄 순 없습니다. 외로움이 밀려올 때, 당장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찾기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