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용서를 구합니다
사과는 생존 전략이 아닐까?
사과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유독 을의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저는 용서를 사과와 동일시했고, 사과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이가 상대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비굴하고 나약한 상태라 여겼습니다. 제게 사과란 진심 어린 뉘우침보다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머릿속 저울 위에서 치밀하게 설계된 ‘생존 전략’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일까, 저는 사과를 구하는 일에 유독 서툴고 인색했습니다. 내가 압도적으로 강해진다면, 누군가에게 사과를 구할 일 따위는 영영 없을 거라 믿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용서해 줄 필요조차 없는 무결한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세상의 섭리.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역설적이게도 사과란 결코 약한 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고개를 숙이는 그 행위야말로, 엉켜버린 관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다시금 주도권을 쥐려는 가장 강력한 의지일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 관계를 회복할 '키'를 상대방이 쥐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과라는 단어에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감정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어 하는 불쾌한 감정들입니다. 하지만 이 감정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흥미롭게도 용기(勇氣)와 용서(容恕)는 한자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하나로 맞닿아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타인의 과오를 품어주거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것 모두 거대한 심리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이란 단어의 무게.
어린 시절, 친구와 술래잡기를 하다 실수로 문에 친구의 손가락이 끼어 잘리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황스러움과 죄책감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때, 저는 제 손가락을 대신 내어주고 싶을 만큼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인간은 강렬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심리학적으로 죄책감은 ‘내가 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바로잡으려는 에너지를 주지만,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여 우리를 숨게 만듭니다.
특히 저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사과란, 나의 완벽함(강함)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이때 발생하는 '인지적 부조화',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흔히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상황을 회피하거나 합리화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란 이 부조화를 뚫고 자신의 과오를 직시하는 '도덕적 각성'에서 시작됩니다.
여전히 어렸던 나의 사고.
사실 저는 본래 사과를 잘 구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유독 강했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탓에 타인의 섬세한 감정선을 읽어내는 데 서툴렀습니다. 내 잘못이 논리적으로 완벽히 증명되지 않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소위 일컫는 '인지적 오만'이 제 눈을 가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과와 용서란, 내 마음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한 번 더 헤아리는 '정서적 조율'의 과정입니다. 나를 방어하려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입힌 상처의 깊이를 온전히 가늠해 보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관계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건 상대의 결정에.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냉혹한 사실이 있습니다. 용서는 지극히 ‘받는 자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용기를 내어 사과를 건넸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화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너그럽게 받아주겠지만, 누군가는 침묵할 것이고, 누군가는 도리어 더 큰 분노를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용서의 결과는 각자의 마음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비대칭적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결과와 상관없이 나의 과오를 직시하는 것 자체가 나를 성장시키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용서를 구합니다.
사과는 나를 ‘을’로 만드는 굴욕이 아니라, 엉켜버린 감정의 파편들을 수습하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면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과라는 문을 여는 열쇠는 타인의 자비가 아닌, 내 안의 가장 뜨거운 용기에서 나옵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 찰나의 순간, 당신은 비로소 상처 입은 과거를 지나 행복한 관계의 주인으로 다시 서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