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에 대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동경해본 경험은 살면서 한 번쯤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대상은 짝사랑 상대일 수도, 특정 분야의 선생이나 선배일 수도,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아티스트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를 다듬어 가는 과정은 어쩌면 사랑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은, 18세 소년 ‘정세훈’의 입을 통해 무대 위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190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일은 그 자체로 저항이자 용기였다. 그럼에도 글을 향한 열망이 깊었던 소년 정세훈은 ‘히카루’라는 여성 필명을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현실의 정세훈과 달리, 히카루는 당당하고 총명한 작가적 자아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러한 히카루의 글에 매료된 이는 정세훈이 깊이 동경하던 작가 김해진이었다. 그러나 여성적인 필명 탓에, 김해진은 히카루를 여성 작가로 오해한다. 그리고, 글을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명일일보 편집실에 급사로 들어간 정세훈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폐병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히카루의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생생히 살아나는 김해진의 모습을 보며 정세훈은 깊은 갈등에 빠진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끝까지 속일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선택을 넘어, 사랑과 존경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처럼 다가온다.
극 밖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팬레터]는 나에게도 애틋한 공연이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의 나는 정세훈과 비슷한 나이였다. 공연의 규모도, 출연진도, 그리고 나 자신도 많이 달라졌지만, 매 시즌 공연장을 찾을 때마다 고등학생 시절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야기 속에서 정세훈은 결국 선생님을 완벽히 속이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존재의 마지막 남은 삶의 희망과 즐거움을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그의 나이와 엇비슷했던 나는 그런 정세훈의 선택이 이해되었다. ‘우체국으로 가며 마음 졸이던, 밤이면 소설을 쓰며, 낮이면 당신의 곁에서 글 쓰는 걸 지켜보던 나날.’ 이 가사는 좋아하는 것을 지키고 싶고,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 수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다루기에는, 열여덟이라는 나이는 분명 서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4연, 5연째 공연을 다시 본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정세훈보다는 김해진의 나이에 가까워졌고, 실수는 빠르면 빠를수록 바로잡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속된 말로, 'T'가 되었다.) 만약 내가 정세훈이었다면, 글로든 말로든 어떻게든 자신이 히카루라는 사실을 더 일찍 전하려 애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정세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동경하는 예술가와 선생님들이 있었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내 작업을 한 번 봐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행복했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 기쁨은 너무도 달콤하고 단단해서,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어진다. 극 속의 정세훈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서툴렀기에, 그리고 너무 사랑했기에, 되돌리기엔 복잡해진 선택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팬레터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남는지를 조용히 묻는 작품이다. 무대 위의 정세훈을 보며 우리는 각자의 첫 마음과 서투른 선택을 떠올리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했던 책임까지도 함께 말이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 공연이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관객이 서 있는 자리만큼이나 이야기의 얼굴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2016년 초연 이후 1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팬레터가 꾸준히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특정 시대의 비극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성장과 동경의 본질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팬레터는 끝내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경을 지나 삶으로 나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조용한 위로처럼 남는다. 이처럼 올 겨울, 관객에게 다정한 위로가 되어줄 뮤지컬 [팬레터] 는 2월 22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