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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y 22. 2024

일본 시어머니 ‘공경’하기

사전에  ‘공경’ 을찾아보면  ‘공손히 받들어 모시다’라고 나온다.


아~~‘공경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생각한다.  


그깐노므 ‘공경’ 눈 딱감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어머니~~ 오늘은 몸이 좀 어떠셔요?

어머니~~어디 아픈데는 없으세요?

어머니~~저랑 오늘 쇼핑 가실래요?

어머니~~저랑 오늘 맛있는거 먹으러 가요!

이러면 다 된다. 근데 이게 그렇게 어려울수가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내 마음과 갈등한다.  공경이 잘 안된다.



“겐짱! 우체국 까지 산책 좀 하고 올께!”

……. (그냥 대답 하기도 귀찮다. 들었지만 대답을 안한다.)

“겐짱 거기 있냐?”

…아~~네~~~다녀오세요…(대충 대답하고는 ‘그냥 가면되지 씨…)

나도 오늘 쉬는 날이라 좀 푹 쉬고싶지만, 아픈 그녀의 밥을 챙겨 주느라 ‘골’이 나있다.


그녀도 나가고 조용한 집에서 마음편하게 ‘넷플릭스 드라마 ‘오자크’한편을 보며, 소중한 나의 휴일 오후를 좀 즐겨본다.


시계를 보니 그녀가 나간후 한시간이나 지났다.

우체국까지 정상인 걸음으로 3분 거리를 벌써 한시간째 돌아오지 않고있다.


아~ 짜증나!

쓰러졌나? …가슴이 살짝 두근 거린다.

부랴부랴 우체국을 향했다.


우체국 근처 ‘화단’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요 며칠세 부쩍 작아진것 같은 시어머니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왜 이렇게 힘없고, 가여운 이 사람을  ‘공경’하지 못하는걸까!.. 후회가 밀려온다.


저 가녀린 사람을  힘쎈 내가 부축하고  ‘도란도란‘ 재미난 이야기 하며 산책을 하면 좀 좋은가 말이다.


‘시부모 공경’이 그렇게 쉬운것이었다면 세상에

‘양로원’ 따윈 없겠지.




우리집은  효자. 효부의 집, 부모공경 하는 집안으로 어릴적  지역신문에 한번 난적이 있다.  

대가족으로,  삼대가 화목하게 부모를 공경하며 살고 있는  동네 ‘롤 모델’ 가족 이었다.


8살이었던 나는 귀염둥이 손녀로,  갓을 쓰고

흰 수염을 산신령님 처럼 길렀던 할아버지는, 효도 받는 양반 김씨 집안 어르신 모델이 되어, 사진사의

주문대로,  나는 생전 안하던 할아버지 등을 주물려주는 포즈를 취했고, 몇장의 위선적인 사진을 찍었 다. 며칠후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우리 둘의 사진이 실렸다.


신문에 우리가 실린 후, ‘멋진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사람들이 종종 소고기를 사오곤 했다.


충 . 효가 교육의 중심이었던 시절이라 일종의

‘효 계몽 운동’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마을 ‘동장’이 선택한 ‘부모 공경’ 롤 모델이었던

우리집은  ‘싸움질‘ 로 마을 1등 이었지, 결코 ‘효’의 표본으로는 ’어림도‘ 없는 집이었다.


효자로 소문 났던  (그냥 같이 살면 효자) 나의 아버지는  자신이 홀로된 후, 치매가 온 자신의 아버지를,  자신의 큰 아들에게  맞기고 자신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했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  할아버지는 걷으로는 인자한 산신령님 이었지만, 반찬이 맘에 들지 않는 날은 ‘밥상 채로’  마당으로  패대기를  쳐 버리는

괴팍한 성격 이었던 것이다.


그럴때 마다 엄마는 군말없이 먹던 밥도 중단하고 ‘고모네’집이나, 옆집으로 가, 계란이라도 얻어와

다시 ‘저녁 진지상’을 해 바쳤다.


우리들은 자주 있는 일이라 ‘멀뚱멀뚱’ 그광경을 쳐다만 보았고, 그런 할아버지를 우리는 ‘계속 공경했다‘.


교육을 못 받은 나의 부모들은 ‘반란‘을 일으키는것은 상상도 못 했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고, 할아버지가  동네 할배들과 편히 ‘화토’를 즐길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방 환경을 84살이 될때까지 제공했다.  



딸 자식들은 어른들 앞에서는 언제나 두 무릎을

꿇고 살게하고, 아들들은 ‘양반다리‘를 하게 함으로써  딸(여성)의 위치가 낮음을 몸으로 저절로 알게 해 주었다. 여자는 지체가 낮으므로 가장 ‘어른들을 ’공경‘하도록  ’자동 공경교육‘이 몸에 베이게 만들었다.


우리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공경’하다못해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그

‘부모 공경’도 끝이났다.


결국 부모 ‘공경’도 며느리가 없으면 지속되지 못했던것이다.   


장남 (며느리)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계속 ‘공경’하게 만들 요량이었지만, ‘장남’(며느리)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얼마후 할아버지 방문을 다녀온 (집안에서 제일 

똑똑해  입으로 뭐든 하는 삼촌이 )

 할아버지를 구석방에 쳐 넣어 놓았고,  접시도 더럽다고 따로 씻는  ‘나쁜노므시끼들‘ 이라고 욕을 욕을 했다. 소문은 번개처럼 빠르게  친척단체에게 전달되었고, 큰 아들은 진짜 ‘나쁜노므시끼‘가 되었다.

욕하던 친척들은 옷한번, 그릇한번 씻지 않아도

‘욕’만큼은 ‘오지게’ 한다.


실제로 찾아가 보았을때 할아버지는 3평짜리 방에 간신히 누워있었고, 코딱지 만한 ‘간이 부엌’에 그릇 몇개가 있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사간 ‘복숭아 ‘통조림’를 누워계신 할아버지 입에 떠 넣고 싶어, 입을 벌려 보라 했더니 혓바닥이 굳어 아무것도 먹을수 없는 혀가 되어있었다.

‘암덩어리’ 가 분명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남지 안았음을  직감한 나는 할아버지와 낙시하던 추억, 따뜻한 사랑방에서

‘청단‘  ’초단’  ’고도리‘ 칠갑뜨기’를 매일 ‘개인 레슨’해준  나의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목이 막혀 한마디도 할수 없었다.

(시골에는 장난감이 없다. 화토가 참 좋았다.)


나의 엄마를 힘들게 했던, 나의 할아버지는, 인간의

존엄성은 커녕, 최소의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컴컴한 골방에서‘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날 할아버지도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대낮에도 햇볓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에 할아버지를 모신 그놈이 정말 ‘나쁜 노므시끼’ 였나 하면,  


어른이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놈은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것 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퇴근후 힘든 몸을 이끌며 조촐한 밥이라도 차려 드렸다.


 

나는 아버지의 장남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이제 나도 심판대 위에 오를 날이 머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미움과 가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부모 공경’은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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