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미화는 무섭다.

#이별로그

by 힘쓰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약 4년 전의 일이다.

상자의 주인공은

#자아성찰 02. 생일 편에 나온 그 남자친구다.

https://brunch.co.kr/@2ec33353a9e84db/6


아마 그 상자를 열었을 때가

사귄 지 1년은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대는 유난히 핸드폰에 민감했었다.

사생활인 건 알았지만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진짜 어렵게 찾아온 기회(?)로

그의 핸드폰을 손에 넣었고

거침없이 카카오톡 채팅방을 들어갔다.


내 이름을 검색하고

위로 올려보는데 가관이었다.

상대는 평소 욕을 잘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내 앞에서만 그런 거였다.

친구들에게 내 욕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지금 더 보지 않으면 평생 못 볼 거 같았기 때문.


또 다른 단어들을 검색했다.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야근이라고 한 날

회사 동료와 스웨디시 뭐 그런 걸 갔던 거다.

피곤하겠다는 내 걱정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그걸 본 순간 나도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 외에도

헌팅하고 싶다.

여자친구랑은 어디 가기 싫다.

00 지역에 그거 할 곳 없나.


뭐 이런 대화들이 가득했다.

일단 내 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감정을 겨우 억누른 채 집에 돌아왔다.


머리가 하얗게 된 상태라는 게 뭔지

피가 쏠린다는 게 뭔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분노감이 뭔지

그때 처음 느꼈다.


배신감, 역겨움,

뭐 그런 것들이 내 머릿속을 장악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이 아일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서 무서웠다.

친구가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무조건 헤어져. 라며

쌍욕을 한참 동안 박았을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알면서도

결국 미련한 길을 택할 거 같았다.


다음날까지 연락을 하지 않자

상대는 뭔가를 눈치챈 듯

혹시 본인의 폰을 봤는지 물었다.

아니.라고 한 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묻자

핸드폰 위치가 달라져있어서 그랬단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너의 폰을 봤다고 말하자

상대는 먼저 화를 냈다.

사생활인데 왜 봤냔다.

그거에 대해선 사과를 했다.

그렇지만 네가 나한테 사과할 게 더 많잖아?


한참의 해명을 듣고

한참의 말씨름을 하고

또 한참을 울었다.


나는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아직은 쌩쌩한 내 마음,

그리고 그동안의 시간, 추억들을

갑자기 누군가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 같았다.


어떠한 것도 확실히 풀리지 않았지만

나는 상대가 해명을 하는 행위 자체에 마음이 풀렸다.

정말 미련했다.


그리고 1년 반을 더 사귀었다.


속 시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우린 그 사이 장거리가 됐었고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갈증에, 잦은 갈등이 있었다.

같은 이유로 매번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다가 진짜 이별통보를 받았는데

장거리다 보니 결국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끝났다.


그게 나에겐 엄청난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났다.

사실 나는 상대를 절대 붙잡지 않으려 맘먹고

판도라의 상자를 내 눈에 보이게 놔뒀었는데

결국 눈을 감고, 여러 번 붙잡았다.

잡히지 않았다.


상대를 생각하면 잘해주지 못했던 게 떠올랐는데

그래서 언젠가 한 번은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그 판도라의 상자를 보게 됐다.

다시 보는 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뭔가 복수를 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글을 올린다거나

회사, 가족에게 뿌린다거나 뭐 그런 복수...!

이제 와서 뭐, 왜! 나한테 남는 게 뭐라고.

그래서 브런치에 왔다.

불특정다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박제하기로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1년 반을 더 사귄 나.

이런 모습을 보이고도 1년 반을 더 사귄 너.

헤어진 뒤 그저 연락 한번 닿으려고 애썼던 나.


미화는 정말 무섭다.

이런 애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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