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로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약 4년 전의 일이다.
상자의 주인공은
#자아성찰 02. 생일 편에 나온 그 남자친구다.
https://brunch.co.kr/@2ec33353a9e84db/6
아마 그 상자를 열었을 때가
사귄 지 1년은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대는 유난히 핸드폰에 민감했었다.
사생활인 건 알았지만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진짜 어렵게 찾아온 기회(?)로
그의 핸드폰을 손에 넣었고
거침없이 카카오톡 채팅방을 들어갔다.
내 이름을 검색하고
위로 올려보는데 가관이었다.
상대는 평소 욕을 잘 사용하지 않았었는데
내 앞에서만 그런 거였다.
친구들에게 내 욕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지금 더 보지 않으면 평생 못 볼 거 같았기 때문.
또 다른 단어들을 검색했다.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야근이라고 한 날
회사 동료와 스웨디시 뭐 그런 걸 갔던 거다.
피곤하겠다는 내 걱정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그걸 본 순간 나도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 외에도
헌팅하고 싶다.
여자친구랑은 어디 가기 싫다.
00 지역에 그거 할 곳 없나.
뭐 이런 대화들이 가득했다.
일단 내 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감정을 겨우 억누른 채 집에 돌아왔다.
머리가 하얗게 된 상태라는 게 뭔지
피가 쏠린다는 게 뭔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분노감이 뭔지
그때 처음 느꼈다.
배신감, 역겨움,
뭐 그런 것들이 내 머릿속을 장악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이 아일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서 무서웠다.
친구가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무조건 헤어져. 라며
쌍욕을 한참 동안 박았을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알면서도
결국 미련한 길을 택할 거 같았다.
다음날까지 연락을 하지 않자
상대는 뭔가를 눈치챈 듯
혹시 본인의 폰을 봤는지 물었다.
아니.라고 한 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묻자
핸드폰 위치가 달라져있어서 그랬단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너의 폰을 봤다고 말하자
상대는 먼저 화를 냈다.
사생활인데 왜 봤냔다.
그거에 대해선 사과를 했다.
그렇지만 네가 나한테 사과할 게 더 많잖아?
한참의 해명을 듣고
한참의 말씨름을 하고
또 한참을 울었다.
나는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아직은 쌩쌩한 내 마음,
그리고 그동안의 시간, 추억들을
갑자기 누군가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 같았다.
어떠한 것도 확실히 풀리지 않았지만
나는 상대가 해명을 하는 행위 자체에 마음이 풀렸다.
정말 미련했다.
그리고 1년 반을 더 사귀었다.
속 시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우린 그 사이 장거리가 됐었고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갈증에, 잦은 갈등이 있었다.
같은 이유로 매번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다가 진짜 이별통보를 받았는데
장거리다 보니 결국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끝났다.
그게 나에겐 엄청난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났다.
사실 나는 상대를 절대 붙잡지 않으려 맘먹고
판도라의 상자를 내 눈에 보이게 놔뒀었는데
결국 눈을 감고, 여러 번 붙잡았다.
잡히지 않았다.
상대를 생각하면 잘해주지 못했던 게 떠올랐는데
그래서 언젠가 한 번은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그 판도라의 상자를 보게 됐다.
다시 보는 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뭔가 복수를 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글을 올린다거나
회사, 가족에게 뿌린다거나 뭐 그런 복수...!
이제 와서 뭐, 왜! 나한테 남는 게 뭐라고.
그래서 브런치에 왔다.
불특정다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박제하기로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1년 반을 더 사귄 나.
이런 모습을 보이고도 1년 반을 더 사귄 너.
헤어진 뒤 그저 연락 한번 닿으려고 애썼던 나.
미화는 정말 무섭다.
이런 애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 제일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