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
시기적으로는 진작 가을인데
반팔을 입어야 했던 이상기후를 지나
이제는 겨울로 향해가며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요 근래 계속 마음이 헛헛했다.
붕어빵, 어묵, 호떡 따위의 요깃거리가
그 헛헛함을 채워줬으면 좋았으련만
그건 그냥 살만 채워줄 뿐이었다.
바야흐로 며칠 전 회식이 있었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겨우 2차로 마무리된 자리가 아쉬웠던 나는
동료 한 명과 3차를 갔다.
1년을 기다렸던 겨울 간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허기를 술로 채우려고 한 거다.
적당히 기분 좋고 적당히 취한 상태로
이런저런 말들을 털어내고 있었는데
다음날 만나기로 한 A에게 카톡이 왔다.
자기도 근처에 있는데 괜찮으면 합석하자는 것!
옳다구나!
파워 E인 나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건 재밌으니까!
별로면 다음날 1대 1로 만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4차를 갔다.
A를 본 건 두 번째지만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요즘 합법적인(?) 어장을 좀 하고 있었는데
로테이션 소개팅에서 여러 명과 매칭돼
연락을 하고 있던 것이다.
(앞 글을 읽고 왔다면 의문이 들겠지만 다음에 풀겠다.)
겨우 15분 대화를 나눴던 상대를
술자리, 그것도 4차 자리로 다시 만났고
술기운을 빌려도 그 자리는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15분보다 길게 보니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최근 다수와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과는 사귀진 않지만
삼귀는(?) 정도의 관계까지 갔다.
명백히 말하자면 이 관계는 단순히
술 호흡, 술 철학이 잘 맞아서였다.
술 마실 때 나만의 쓰리 '노'가 있는데
첫 번째 노빠꾸로 마실 것
두 번째 2차든 3차든 노래방을 갈 것
세 번째 취하더라도 노가리에 맥주까지 마실 것.
그런 부분에서 현재 일을 쉬고 있어서 시간이 남아돌고
술을 무척 좋아하는 데다가
잘 마시기까지 하는 상대는 최적이었다.
내 헛헛함을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술이라고 생각했으니!
짧은 연락 기간 동안 함께 먹은 술만
소주 15병은 족히 넘었을 거다. (물론 맥주도^^)
그렇지만 이 관계의 문제는 술을 안 먹으면 할 게 없고
이 상대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흐린 눈 했다. 이 정도 알코올 메이트는 찾기도 힘드니.
내가 4차에서 다른 남자들과 술을 먹었다는 건
상대는 전혀 몰랐고 그걸 모르게 하기 위해
바깥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를 받았다.
할 말이 있다며, 끝나고 만나자는 말에 뭔가 촉이 왔다.
"혹시 할 말이 그만 연락하자는 거야?"
"음...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그렇게 나는 5차로 집 앞 국밥집에서 상대를 만났다.
상대는 내가 좋아하던 살코기 국밥을 시켜주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최근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전 여친이었단다.
안 흔들릴 줄 알았는데 흔들렸단다.
그래서 연락을 그만해야 할 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와 나는 장기연애 후 헤어진 시기도 비슷했고
헤어진 사유도 비슷했다.
(그의 전여친이 나와, 내 전남친이 그와 비슷했다.)
당연히 X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었는데
솔직히 나 같아도 전남친에게
연락 오면 흔들릴 거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확실했다.
이해도 됐지만 약간의 짜증도 났다.
어쨌든 나한테 그런 선택지는 없었으니.
5차 자리까지 해서
이미 10시간 넘게 술을 마신 것과 다름없었지만
거침없이 들이켜 부었다.
나는 그냥 노끈이라도
나를 잡아줄 뭔가가 있었으면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마인드 자체가 문제였다.
거침없이 쉽게 잘라버릴 수 있는 노끈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란 걸 몰랐다.
가위가 없어도 한쪽씩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언제 한 몸이었냐는 듯 뚝하고 끊길 노끈 같은 관계.
그렇게 헛헛한 마음만 더욱 커진 채
장장 11시간의 술자리는 마무리 됐다.
다음 날 해장을 하려는데
입술이 너무 따가운 거다.
왜지? 내가 뜯었나?
거울을 보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입술보다는 속이 더 난리였기에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전날 한 술도 뜨지 못해 아쉬웠던 메뉴
살코기 국밥으로 해장을 마쳤다.
몽롱한 정신에도 입술에는 감각이 있었고
점점 따가워졌다.
립밤을 듬뿍 바르고 잠에 들었는데
다음날 립밤을 닦아내니 노란색이 섞여 나왔다.
입술에 수포가 생겨 고름이 나온 것이었다.
검색해 보니 과로, 과음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생길 수 있는 거란다.
과로도 했고 과음도 했고
심지어 뜨겁고 매운 음식을 피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먹었다.
아. 내 몸을 혹사시킨 대가가 이렇게 오는구나.
이제는 고작 숙취로만 대가를 치르는 나이가 아니구나.
만으로도 20대가 될 수 없는 온전한 30대가 되었구나.
몸이 아작이 나고서야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3개월간의 방황, 이제는 방향성을 잡을 때가 온 거다.
다시는 얇고 힘없고 가벼운 노끈에
나를 맡기지 말아야지.
혹여나 노끈에 잠시 기대더라도
자르지 않고 풀 수 있게 묶어야지.
당분간은 4시간에 1번씩
연고를 발라야하는 처지가 됐고
뜨거운 호떡도 먹지 못하게 됐지만
입술 수포가 내게 남긴 건
그 어느 때보다 더 긴 숙취였다.
깨어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술을 먹겠지만
그래도 취해있는 동안은 그저 후회하는 숙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