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
최근 잦은 술자리가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부러 술자리를 가졌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어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된 아는 오빠는
내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집에 데려다주려고 기다렸단다.
기다린 줄 몰랐던 나는
뭐 또 다른 곳에서 술을 먹고 있었고
다음날 술이 깰 때쯤,
그러니까 오후 늦게 연결된 통화에서
"연락이 되지 않아 그냥 갔다.
너 어제 너무 취했더라.
그러다 진짜 낯선 천장에서 눈뜰까 봐 걱정했어.
별일 없었지?"
라는 말을 건넸다.
그때는 "에이 내가 아무리 취해도 집은 잘 가~"
라고 말했지만
그 이후 정말로 낯선 천장에서 눈 뜨는 일이 생겼다.
앞전 글의 제목이 회자정리였고,
거자필반으로 돌아오겠다고 썼었는데
그 사이 짧은 만남들이 몇 번 있었다.
사실 이곳에 처음 글을 쓰게 한 전남친이 아닌
그 직전 3년 사귀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폭풍이 왔는데
사람에 대한 그리움보단
사귐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안정적이지 않은 게 가장 불안했다.
사귀는 사이면 당연했던 것들,
그중에서도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고
내 잉여시간을 함께 해줄 존재가 사라지니
공허함만 남았다.
쉽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이 됐다.
본디 남자친구란 존재는
그냥 호기심, 관심, 호감, 설렘 뭐 이런 감정으로
내 인생에 갑자기 들어온,
길가에서 나눠주는 물티슈 같은 건데
(쓰고 보니 너무 비약 같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 없으니 아쉬워졌다.
없으면 어떡해?
길가에서 나눠주기만을 기다릴 순 없다!
외로움을 채워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급한 성격 탓에 빨리 결괏값을 내고 싶어서
양지와 음지(?) 두 방법을 선택했다.
로테이션소개팅
그리고
나이트.
입장하자마자 부킹 1트만에
(가성비 없게) 2차를 가게 되었는데
맥주집에서 부모님 직업부터 본인의 결혼관,
전여친 이야기까지 꺼내는 성급한 그 애를 보니
마치 나를 보는 거 같았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낯선 천장의 주인공은 그 아이의 집이었다.
숙취로 잠깐 눈을 떴는데
난 사실 그때까지도 우리 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내 이불도, 내 침대도 아닌 거다.
웬걸, 여기가 어디람!
옆을 보니 그 아이가 쿨쿨 자고 있었다.
다행인 건 아무 일도 없었다.
너무 취했던 탓일까.
둘 다 숙면을 취한 거다.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직 알코올이 뇌를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뭐 별다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상대가 일어날 때까지 자는 척했다.
상대가 뒤척거리다 일어나자 그 소리에 깬 척했다.
그리곤 우리 집인 줄 알았는데 놀랐다.
속이 너무 안 좋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지?
이런 뜬소리를 늘어놓았다.
벌떡 일어나서 당장 집으로 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뭔가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건지,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뚝딱거렸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조금 더 누워있으면서
생각할 시간, 그리고 후회의 시간을 벌었다.
눈 뜬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었었고
누워있다 보니 점점 시간은 흘러 오후 3시쯤이 되었다.
해장도 원치 않는 나를 위해
그 아이도 배를 곯으며 기다렸다.
매트리스 위에 가만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아무것도 채우지 않으니, 비워진 걸까.
급 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나 오늘 로테이션 소개팅 있는데?!
근데 내 핸드폰 어딨지?
전날 밤,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위스키 한잔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거실 의자에 두고 온 거 같았다.
아무래도 남의 집이니
갑자기 거실로 나가기도 좀 그래서
내 핸드폰 어딨어? 라며 갖다 주기를 청했다.
투룸 오피스텔이 넓어봤자 얼마나 넓다고.
핸드폰을 갖다 주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핸드폰을 받고
로테이션 소개팅 업체로부터
참석할 거냐는 카톡에 답장을 하고
이제 슬슬 이 자리를
가장 자연스럽게 떠날 방법을 모색하던 찰나.
그 아이가 말했다.
"미안한데 사실 핸드폰 봤어.
로테이션 소개팅 나가?"
내 핸드폰은 비밀번호를 채우지 않아서
알림 뜬 게 다 보였을 거다.
굳이 카카오톡을 들어가서 본 게 아니란 것.
"응?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스러웠지만
티 안내며 대답했다.
무슨 말을 덧붙이면 더 이상할 거 같았다.
내 대답에 본인도 나가봤다며,
어떤 섭리인지를 알려주고는
너가 나가면 인기 많을 거 같다.
뭐 이런 기분 좋은 멘트들을 날렸다.
"그것도 약속이니까 가야겠지...?" 란 질문에
그저 내가 웃자
"약속이니까 가야지!"라며
혼자 또 결론을 내렸다.
로테이션 소개팅 가는 걸 들킨(?) 이상
자연스럽게 떠나기는 실패했고
뭐 그렇다고 갑자기 나 갈게~ 하고 갈 수도 없으니
어색한 기류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 술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막걸리인데
그 아이도 그렇단다.
물론 상대가 먼저 막걸리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거기에 동했다!
막걸리의 매력을 너도 알아?
이렇게 잘 통할 수가!
세상 사람의 반은 아니 삼분의 일
아니 한 십분의 일은 막걸리를 좋아할 텐데
그 순간만큼은 마치 남들이 흔히 좋아하지 않는
뭔가를 함께 좋아하는 덕후가 된 거 같았다.
어떤 막걸리를 가장 좋아하는지
어떤 막걸리를 먹어봤는지
어떤 거랑 섞으면 더 맛있는지
신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점점 집에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슬슬 갈 준비를 하려는 나를 보고 그 아이는
오늘 막걸리 한 잔 할래? 라며 날 꼬셨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로테이션 소개팅 안 가면 안 돼?
거기 가면 100% 표 받을 거고,
너한테 선택지가 늘어나는 게 싫어.
그러면 나랑 연락 끊을 거 같아."
그 말만큼은 진심이 느껴졌다.
그 애의 모자를 눌러쓰고
함께 막걸리를 사러 갔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날씨가
내 기분을 대변하는 거 같았다.
2명이니까 5병이면 되겠지?
낮부터 막걸리를 품에 안고
함께 걸었던 그 순간만큼은
마치 막걸리 홍보대사로 임명받은 것처럼 짜릿했다.
안주로 먹다 남은 찜닭을 데웠고
콩나물 잔뜩 넣은 싱거운 라면,
참치와 마늘을 섞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본인이 즐겨 먹는다는 뭔가로
조금은 허접한 술상이 차려졌다.
괜찮았다.
특별한 안주가 없어도 막걸리만 있다면!
너무 배부르면 막걸리를 많이 못 먹으니까.
앉은뱅이 술답게 5병이 순삭 됐다.
약간의 취기와 함께
또 한 번 막걸리를 사러 원정을 떠났다.
2병만 더 먹자!
각각 3병 반씩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지고 나서야
나는 그 아이 얼굴을 제대로 처음 봤다.
음. 참 술이란 건 무서워.
꽤나 귀여워 보였다.
그날만큼은 참가비를 포기하고
로테이션 소개팅 안 나간 걸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하루 만에 고백을 받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외로웠으니까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하루 사이 이제는 완전 낯설진 않은,
초면이 아닌 구면의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 번 외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