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바람

#이별로그

by 힘쓰기

그가 나를 알기 전부터 여자친구가 있었으니

그렇다면 내가 바람 상대? (03편 참고)

머리에 피가 쏠린다.

잠깐 피를 돌게 하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 본다.


꼬꼬무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2살부터 24살까지 만났던 남자친구.

내가 만났던 사람 중 외적인 건 가장 별로였지만

난 여하튼 그를 좋아했다. 사랑도... 했다.


그를 알게 되고 순간적으로 팍! 뭔가 튀었다.

그도 그랬단다.

몇 번의 데이트와 술자리 끝에

우리는 어느새 사귀고 있었다.

아마도 내 성격을 받아준 게 가장 컸다.


내로남불.

고집불통.

개사이코.

왕싸가지.

애정결핍.

나를 칭하는 4글자 단어들을 꼽자면 뭐 이렇다.

(오! 진짜 별로다!)

처음에야 대충 베일에 싸서 감출 수 있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결국엔 들통날 수밖에 없는 성격.

그래서 안 감추기로 했다.

맘껏 드러냈는데 그럼에도 내가 좋단다.


하루에도 100번씩 만약에 테스트를 하고,

아는 오빠들과 술 마시러 가면 어떻게 할 건지

반응을 묻고,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면 어쩔래?

이런 시답잖은 질문들로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위에 말했듯 나는 애정결핍이 좀 있는데

그걸 저런 질문들로 채우고 싶었다.

근데 내 애정결핍의 독은 콩쥐의 독과 같아서

두꺼비가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줄줄 새어나갔다.

완벽히 채울 수 없었단 이야기다.

그러니 더 들들 볶았고 상대는

뜨거운 팬에 준비 없이 입수된 들깨처럼

그저 달달 볶이게 뒀다.


100일, 200일, 300일 그리고 1년.

몇 번의 고비도 있었지만 잘 사귀었다.

(눈물의 재회 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아마 걔의 인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실수였을 거다.)


그맘때 그는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사는 지역에서

아주 좋지만은 않은 환경으로 일하고 있었고

나는 탱자탱자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었다.


겨우 한 살 차이인데

돈을 버는 사람이냐 쓰는 사람이냐로

일상이 달라진 거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누군들 얼마나 이해하리.

나는 그의 힘듦을 전. 혀 공감하지 못했다.

퇴근 후 지친 목소리로 통화하는 게 서운했고

피곤하다면서 캔맥주 하나 깠다는 말이 싫었다.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생긴 회식에는

히스테리를 부렸고

퇴근 후 친구와 함께 헬스장을 다닌다는 말에는

정말 개지랄을 떨었다.

안 그래도 만날 시간이 부족한데 헬스장?!

(오! 나 진짜 진짜 별로다!)


그때는 뭐 나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적극적으로 변호할 생각은 없고

그저, 그런 곳에

에너지를 쏟을 시간이 남아돌았을 뿐이다.


가끔 시계를 보며 시침, 분침이

화살같이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냥 내 시간이 남아도니 그 화살이 걔한테 간 거다.


그런 와중에

상당히 고달팠을 그에게도 잠깐의 짬이 생겼다.


나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즐기는 시간!

내가 해외여행을 가게 된 거다.

아마 신데렐라가 12시가 되기 전까지

신나게 즐긴 것처럼

그는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놀지 않으면

더 이상의 자유는 누릴 수 없고

심술이 덕지덕지 아주 못된 계모+언니들을 합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성공했다.

환승연애할 상대를 찾았다.

나의 가스라이팅으로 자신을 좋아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믿었을 텐데,

본인을 좋다고 하는 여자를,

그러니까 유리구두를 찾은 거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온 나는

면세점에서 산 선물들을 들고

나의 신데렐라를 찾아 나섰다.

으흠 유리구두를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데, 내가 준비한 유리구두는

이제 그의 발에 더 이상 맞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년간 혹독하게 자신을 깎으며

새로운 유리구두를 신을 준비를 해왔던 거다.


그걸 몰랐던 나는 울며불며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수를

또 하고 싶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서였는지 여지는 남겼다.

보고 싶을 때 와주겠다고.


나는 여러 번은 안 와줄 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참았다.

진짜 제일 보고 싶을 때 말하려고.


참는 건 힘들었다.

그 속 쓰림을 달래려 더 큰 속 쓰림을

자주 소환하곤 했다. (친구와 술을 먹었단 뜻이다.)


그날도 역시나 그리운 마음에

그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봤을 뿐인데

어! 환승연애 흔적을 찾았다.

아무리 흐린 눈을 하려고 해도 빼박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친구가 말렸다.

술을 진탕 마셨는데 이번엔 술이 졌다.

2년 사귄 남자친구의 환승연애 사실은

너무나도 속이 쓰렸다.

막걸리를 진탕 마신 다음날보다도

토와 머리아픔이 동반된 술병보다 더 힘들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했던 거 같다.

연락을 안 했으니까.

근데 또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됐던 것도 같다.

후회하며 연락올 거라고 생각했으니.

(이게 꽤 오래전 일인데 아직까지 연락은 안 왔다.)


나는 여기서 딜레마를 느꼈다.

자, 이제 그럼 누가 나쁜 거지?

사귀는 동안 힘들게 한 나일까, 끝이 비겁했던 너일까.

환승연애를 하게 만든 내 잘못일까,

솔직하지 못했던 너 잘못일까.


최근 이 생각의 종지부를 찍었다.

지금까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건,

나도 내가 나빴다는 걸 인정하는 거란 걸.

직접적으로 용서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용서했다.

그리고 너는 그냥 날 이미 잊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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