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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마마 Aug 17. 2024

덜어내는 삶 D-day20

오늘은 뭘 덜어냈지?


몰라요.


냉장실을 비웠잖아.


몰라요.


사춘기?


모른다니까요.


덜어낸답시고 엄한 부산을 떨었다.


어릴 적 우리 집 냉장고엔 뭐가 별로 없었다.

김치 하나 정도 있었나?

김솔로 참기름을 발라 맛소금을 뿌려 석쇠에 구워내서 먹기 좋게 잘라 은박 호일에 잘 싸둔 김.

맥심 알커피 유리병 빨간 뚜껑 안에 들어 있는 노란 성게. 이것은 아빠가 바다에서 잡아온 성게와 솜을 엄마랑 찻술갈로 빼내서 저장해 둔 날 것이다. 바닷물이 자연스레 가미되어 짭조름하고 며칠간 냉장실에 두어도 쉬이 상하지 않는 귀한 것이다.

어릴 적 마농지의 마늘대는 엄청 두꺼웠던 거 같다. 거기다 엄청 짭조름해서 물에 만 밥 한 숟갈에 한 겹씩 찢어 올려 먹었는데 마늘대 한 조각이면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던 거 같다.

주로 아침에 주재료 하나를 사 왔다.

돼지고기는 친구네 정육점에서 사고 왔다.

꼬막도 친구네 슈퍼에서 사고 왔다.

오일장이 서는 날엔 장에서 사왔다.

돼지고기는 마늘과 대파, 소금과 고춧가루만 해서 볶아 먹었다.

장조림을 해뒀다가 한 조각씩 꺼내 조금씩 찢어서 밥 위에 얹어서 먹었다.

불고기 양념을 해서 스테인리스 통에 담아 냉장고에서 잘 재워두었다가 넓적한 팬에 물을 약간 가해 뚜껑을 덮어 부드럽게 익혀 스끼야끼를 해서 먹었다.

“멜 삽서~~ 멜! 자리 삽서~~ 자리!” 하는 소리에 나가 동네를 천천히 누비는 트럭에서 사 오기도 했다.

멜국, 각재기국, 자리조림, 우럭조림 노란 된장콩이 들어간 우럭조림이 생각난다.

고기든 생선이든 뭐든 그 한 가지를 양념해서 먹었다.

고등어, 삼치, 갈치는 손질해서 소금을 뿌려두고 한 끼니때 딱 먹을 만큼씩만 조리해서 먹었다.

구워 먹거나 조림을 해서 먹거나 국을 끓여 먹었다.

옥상 아래와 옥상 올라가는 중간에 항아리들이 있었다. 옥상 아래는 오이지 항아리가, 옥상 위에는 된장 항아리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는 마트서 사 온 된장, 고추장, 쌈장까지 이미 있었다. 오늘 새로 산 김치까지 냉장고에 넣으려니 공간이 부족했다.

몇 년 동안 쌓인 각종 장아찌들 풋마늘 장아찌, 마늘장아찌, 무말랭이 장아찌, 양파장아찌, 고추장아찌, 매실장아찌까지 싹 다 버렸다.

무채김치, 깍두기김치도 오래된 거라 버렸다.

사랑하는 자리젓도 너무 짜서 버렸다.

아무래도 떫은 아로니아청도 버렸다.

수개월 전에 만든 아로니아잼과 귤잼도 버렸다.

크지도 않은 냉장고 안에서 락앤락통이 두 다라가 나왔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있어도 안 먹고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 공간이 생겨 오히려 좋다.


화단에 아로니아 나무 한 그루가 있다.

퇴사할 때 그 건물에 살았던 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았다. 홀로 아들을 변호사로 키워낸 분이시다. 그 건물에서 나가서도 화분들은 남겨두었다가 물을 주러 오셨다. 흙이 있는 곳이면 뭐라도 심는 할머니. 달걀껍데기나 생선뼈도 모아두었다 거름으로 만들어 쓰시는 알뜰살뜰한 분이셨다.

아로니아가 매해 점점 더 많이 열리고 있다.


내일은 냉동실을 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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