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 시대(3)
금옥장교(金屋藏嬌) : 한 경제는 정실 부인인 박황후와의 사이에는 후손이 없었으나, 6명의 후궁들과의 사이에 열넷이나 되는 아들들을 두었다. 재위 4년째인 기원전 154년, 경제는 율희라는 후궁과의 사이에 낳은 장남 유영을 황태자로 세웠다. 경제는 유영의 황태자 책봉 후 박황후를 폐하였으나, 황태자의 모친인 율희를 황후로 들이지는 않았다. 한편, 경제의 누나인 장공주 유표에게는 진아교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장공주는 딸을 장차 황후로 만들겠다는 욕심에 율희에게 사돈을 맺자는 청을 넣었다. 율희는 장공주가 평소 경제에게 미녀들을 소개해주는 뚜쟁이 역할을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터라 장공주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 와중에 경제의 열째 아들 유체의 모친인 왕지가 장공주에게 접근했다. 하루는 왕지가 아들 유체와 함께 장공주의 궁을 찾았다. 장공주는 어린 유체에게 주위의 수많은 궁녀들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유체가 없다고 하자 장공주는 곁에 있던 자신의 딸 진아교를 가리키면서 아교는 어떻냐고 물었다. 유체는 진아교를 배우자로 얻는다면 황금으로 된 집에 아교를 살게 하겠노라(金屋藏嬌)고 대답했다. 유체의 답에 흡족해진 장공주는 왕지와 사돈을 맺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리고는 경제를 만날 때마다 율희에 대한 험담과 함께 왕지와 유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장공주의 목표는 유영의 황태자 자리를 뺏아 유체에게 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다혈질이었던 경제가 갑자기 병에 걸려 상태가 위중해졌다. 죽음을 예감한 경제는 율희를 불러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남은 자식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조만간 황제가 될 아들과 함께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이라 믿은 율희는 경제의 부탁을 외면했다. 경제는 율희의 태도에 분노했지만 화를 내면 병이 더 깊어질 것을 우려해 말을 아꼈다. 성정을 다스린 덕분인지 병에서 회복한 경제는 병상에서 일어나자 마자 황태자를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장량 등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황태자를 바꾸지 못했던 할아버지 유방과 달리 경제는 결단력이 있었다. 기원전 150년 경제는 승상 주아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영을 대신하여 유체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정의 율희 세력을 일소하였다. 경제는 황태자 책봉과 함께 유체의 이름도 유철로 바꾸었다. 일세를 풍미한 군주인 한 무제의 등장이었다. 후일 무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비에서 황후가 된 진아교는 자신의 어머니 덕으로 황제가 된 무제를 가벼이 생각했다. 한편 무소불위의 자리에 오르게된 무제는 고종사촌간이었던 진황후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자 총애를 내릴 대상을 따로 찾게 되었다. 오만한데다 질투가 심했던 진황후는 호색의 영웅이었던 무제의 여성 편력에 투기를 부리다가 결국 황후 자리에서 쫓겨난 후 냉궁(冷宮 : 황실에서 죄 지은 황족들과 비빈들을 유폐해 놓는 공간)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했지만 배우자인 무제의 애정이 없는 금옥장교의 삶이 진아교에게는 냉궁보다 더한 감옥과 같았을 것이다.
선거(選擧) : 기원전 141년, 경제의 사망에 이어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무제는 의욕과 패기가 넘쳤다. 무제는 즉위하자 현량방정(賢良方正 : 품성이 어질고 행동거지가 올바름)하고 직언극간(直言極諫 : 몸을 사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함)하는 인재를 추천하면 가려 뽑아 등용(選拔擧用)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선발거용, 또는 선거(選擧) 제도를 통해 동중서로 대표되는 일련의 유학자들이 한나라의 정치 일선에 참여하게 되었다. '춘추'를 연구하는 유학자였던 동중서는 무제의 올바른 정치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천인삼책(天人三策)’이라는 유학에 근거한 대책을 제시하여 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앞선 문제와 경제시대의 정치적 과제는 진한(秦漢) 교체기의 혼란에 이어진 한나라 초기 제후들의 반란 등으로 긴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 었다. 이에 따라 문경의 치세에서는 도가의 사상에 근거한 무위(無爲)의 정치로 백성들의 삶에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것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의욕이 넘쳤던 젊은 무제는 도가보다는 인의와 예악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유가의 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집권 초기 무제의 유교 체제 도입 시도는 도가의 황로사상에 심취해 있던 할머니 두태후(효문황후 두의, 문제의 황후이자 경제의 모친으로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조실부모하면서 여후의 궁녀가 되었다. 여후에 의해 대왕(代王) 유항의 후궁으로 보내졌다가 유항의 본처가 사망한 후 정실이 되었으며 유항이 황제(문제)가 되면서 황후가 되어 말 그대로 인생역전(人生逆轉)을 이루어 낸 인물이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135년, 두태후가 사망하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식 학교인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는 등 유교체제 도입을 본격화하였다. 다양한 경로로 추천된 후보와 황제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선거 제도는 황제 본인의 통치철학에 부합하는 인물을 등용하는 경로가 되었다. 여기서 유래한 선거라는 말이 오늘날에 와서는 대의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지도자를 뽑는 시스템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령부득(要領不得) :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북방 오랑캐인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도 흉노는 여전히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경제가 주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순한 흉노의 수장들을 제후로 봉한 것도 흉노에 대한 선전 전략의 일환이었다.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무리한 대외 원정은 가급적 실시하지 않았던 문경〮제 시대와 달리 무제는 흉노에 대해 적극적인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기원전 139년, 무제는 흉노의 적국이던 월지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월지가 소재하고 있다는 서역으로 낭관(郎官) 장건을 보냈다. 장안을 출발한 장건 일행은 월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흉노의 땅을 지나다가 황하 서쪽 부근에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건은 10년 간의 억류생활 끝에 간신히 탈출하여 월지에 도착했지만 월지의 국왕은 흉노와의 전쟁에는 뜻이 없음을 밝혔다. 동맹 체결에 실패한 장건은 1년여를 월지에 머물다가 흉노가 지배하는 지역을 피해 티베트의 남쪽을 돌아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건이 지나가려 했던 지역에 살던 티베트 족 역시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터라 장건은 또 다시 억류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장건은 장안을 출발한 지 13년만에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제는 장건이 비록 월지와의 동맹이라는 요구된 강령(要領)은 얻지 못하였지만(不得) 그의 변함없는 충성심과 그가 가지고 온 서역에 대한 정보에 감복하여 그를 박망후(博望候)에 봉하였다. 장건이 월지를 오가며 열은 서역으로 가는 길은 후일의 실크로드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장건의 이야기에서 나온 요령부득이라는 표현은 말이나 글이 논점을 잃고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 한 무제는 재위 기간이 무려 54년에 달하여 61년간 재위한 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그 기록이 갱신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황제의 자리를 지킨 인물로 남아있었다. 반백년 이상을 재위한 만큼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걸출한 인물들 중에는 무제의 시대를 활동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동방삭이다. 동방삭은 동중서와 함께 무제가 즉위 직후 실시한 선거 제도를 통해 등용한 인물이었다. 정통 유학자 출신인 동중서가 한나라 통치시스템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라면 동방삭은 거침없는 말솜씨와 파격적인 태도로 무제를 사로잡은 일종의 기인(奇人)이었다. 무제는 동방삭에게 고위 관료의 자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세상일에 초연하면서 임기응변의 말재주가 뛰어난 그를 말동무로 여겨 가까이 두었다. 동방삭은 갖은 기행과 독특한 개성으로 말미암아 후대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가지 야담의 소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그가 서왕모(西王母 :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관장하는 도교의 신)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삼천갑자, 즉, 18만년을 살았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동방삭은 실제로 70년을 살아 그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한 편이기도 했다. 동방삭은 글솜씨도 뛰어났는데 그가 쓴 글 중 초나라의 불우한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을 추모하는 ‘칠간전(七諫傳)’이라는 글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얼음과 숯은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것(氷炭不可以相並兮)이라 하였다. 충신인 굴원과 그를 모함한 간신들을 얼음과 숯에 비유한 것인데 무제의 조정에서 한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굴원에 비유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유래한 빙탄불상용이라는 말은 같이 있기에는 사이가 너무 나빠 서로에게 해가 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곡학아세(曲學阿世) : 한 무제 시절 문무백관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승상의 자리에는 두태후의 조카인 두영을 시작으로 무려 12명이 번갈아 임명되었다. 독재자 스타일의 무제는 행정기관의 수반에 해당하는 승상 역시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신하들 중 하나로 여겼으며 때로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 죽음을 내리기도 하였다. 무제가 임명한 12명의 승상 중 절반에 해당하는 6명이 죄를 받아 처형당하거나 자결하였는데 10대 승상인 공손하는 승상으로 임명되자 무제에게 매달려 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무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승상 자리에 오른 공손하는 횡액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매사에 신중을 기하였다. 지나친 몸보신으로 인해 ‘신중거사(愼重居士)’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한 공손하였지만 결국에는 아들인 공손경성과 관련된 ‘무고(巫蠱 :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자신이 저주하는 인물의 이름을 인형에 쓴 뒤 그 인형을 길에 묻는 것, 고대 중국에서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했다.)의 화’(구경의 하나인 태복의 자리에 있던 공손경성이 비리를 저질러 수감되자 공손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공적을 쌓고자 당대의 협객 주안세를 체포했다. 투옥된 주안세는 공손경성이 무제의 딸과 간통하고 황제가 지나는 길에 인형을 묻어 두는 무고로 황제를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조사결과 주안세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공손하는 아들은 물론 일가족과 함께 몰살당했다.)에 휘말려 일가족이 주살을 당했다. 목숨을 유지한 나머지 절반의 승상 중 경력이 독특한 인물로 5대 승상인 공손홍이 있다. 공손홍은 기원전 140년에 무제가 실시한 인재 선발 제도에서 60세의 늦은 나이로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섰다. 이 때 같이 추천을 받은 인물 중에 원고생이라는 유학자가 있었다. 원고생은 경제 시절에 이미 ‘시경(詩經)’의 대가로 인정받은 원로 학자로 무제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이미 구십이 넘은 나이였다. 공손홍 역시 60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옥리(獄吏) 출신으로 풍채가 당당했던 지라 노구를 이끌고 온 원고생을 하찮게 여겼다. 경제 시절 두태후의 면전에서 두태후가 믿는 황로사상을 비하하는 발언을 해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던 강직한 성품의 원고생이 공손홍을 불러 말했다. “학문의 정도를 따라 올바르게 배우고 세상에 이를 전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지 경전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시류에 영합하는 일(曲學阿世)이 있으면 안될 것이오.” 자신의 심중을 찌르는 비수 같은 한마디에 공손홍은 원고생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무제의 치세에서 출세를 거듭한 공손홍은 기원전 124년 76세의 나이로 승상에 올라 후로 봉해졌으며 3년 후 승상의 자리를 지키며 천수를 다했다. 원고생의 충고에서 나온 곡학아세라는 말은 나라를 위해 신하의 본분을 다하기보다는 전형적인 독재자 스타일의 무제에게 영합하여 벼슬과 자신의 목숨을 지킨 공손홍에 대한 평가로 남았다.
공손포피(公孫布被) : 곡학아세의 주인공 공손홍과 관련해서는 또 한가지 명예롭지 못한 고사가 전한다. 공손홍은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섰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승상의 자리에 오른 데다 제후로까지 봉해졌으므로 나라로부터 받는 봉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홍(公孫弘)은 삼베 이불(布被)을 덥고 자고 끼니 때마다 고기 반찬은 두가지 이상 먹지 않는 가난한 삶을 지속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정치적 보신술에 능한 공손홍의 위선적인 면모라 생각하여 공손포피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공손홍이 자신의 재산을 친구나 친척 또는 주위의 인재들을 위해 아낌없이 소진해 버리는 바람에 실제로 돈이 없어 소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래거상(後來居上) : 사직(社稷 : 고대 중국에서 토지를 지키는 신(社)과 곡식을 지키는 신(稷)을 함께 일컫는 말로 국가를 의미함.)의 신하라는 말이 있다. 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나라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진 소중한 신하라는 의미이다. 무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되면 승상을 비롯한 신하들은 물론 자식이라 할지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던 철혈의 인간이었다.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던 무제에 맞서 직언을 서슴지 않던 인물 중에 급암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급암은 두태후가 경제에게 천거한 인물로 황태자 시절의 무제를 보필하던 태자세마(太子洗馬)라는 직책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급암은 구경의 반열에는 올랐으나, 승상의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급암은 자신에 비해 벼슬을 늦게 시작한 공손홍이 승상이 되자 무제의 면전에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쓰시기를 장작을 쌓는 것처럼 하십니다. 나중에 온 자가 위로 올라가니 말씀입니다(後來居上).” 무제는 급암이 이 말을 하고 물러나자 급암이 배움이 짧아서 말을 함부로 한다면서 신하들 앞에서 오히려 급암을 감쌌다. 만승의 천자였던 무제는 승상이나 대장군의 앞이라 할지라도 옷차림과 말투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급암을 만날 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예로써 그를 대하였다. 급암은 말년에 회양이라는 곳의 태수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병이 깊어지자 장조라는 신하가 급암을 대신하여 무제에게 병가를 청했다. 무제가 장조에게 급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장조가 대답하기를 급암은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가진 인물로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국가의 안위를 지킬만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무제는 장조의 말에 수긍하면서 급암이야말로 사직의 신하라고 칭찬하였다. 급암은 무제의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의 의미로 후래거상을 거론했지만 무제가 일체의 고려 없이 실력 위주로 사람을 등용했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