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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함께 보는 중국의 역사(10)

전한(前漢) 시대(2)

by bellwether

인간돼지(人彘) : 유방은 패현이라는 시골의 날건달 같은 인물이었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여공(呂公)이라는 지역 유지가 딸인 여치(呂雉)를 유방에게 애걸하다시피 하여 시집 보냈다. 이 여치가 바로 유방의 정실 부인이자 중국 최초의 황후(진시황이 최초의 황제이기는 하나, 황후를 책봉했다는 기록은 없다.)로 후일 여후(呂后)라고 불리우게 되는 인물이다. 여후는 기가 세고 권력욕이 강했던 여인으로 한신이나 팽월 등의 개국공신을 주살한 것도 여후가 유방을 조종한 결과라고 한다. 여후는 슬하에 황태자인 유영과 노원공주 등 1남 1녀를 두었으나, 호색한인 유방이 노년에 척부인이라는 젊은 후궁을 총애하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 유영이 유약하여 천하를 맡기기에는 적합치 않다고 판단한 유방이 척부인과의 사이에 난 유여의를 황태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후는 유방의 신임이 두터운 유후(留候) 장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량이 일러준 계책은 유방이 불러도 은거하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던 ‘상산사호(常山四皓 : 동원공 당병, 녹리선생 주술, 기리계 오실, 하황공 최광 등 네 사람으로 이들은 사람을 대할 때 안하무인인 유방의 태도를 싫어하여 유방의 초빙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는 현자들을 불러 황태자를 보필하게 한다면 유방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장량의 계책으로 황태자 자리를 지킨 유영은 유방이 사망한 기원전 195년 한나라의 2대 황제인 혜제로 즉위하였다. 여후는 혜제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척부인과 유여의를 죽여버리기로 했다. 특히 노년의 유방을 졸라 황태후의 자리를 욕심냈던 척부인에게 편안한 죽음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여후는 척부인의 두 손과 두 발을 자르고 눈과 귀를 멀게 한 후 약을 먹여 벙어리를 만들어 변소에 던져 두고는 인간돼지(人彘)라 부르게 했다. 무자비한 복수를 끝낸 여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들 혜제를 불러 이 모습을 보게 했다. 이를 본 혜제는 이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며 이런 짓을 한 태후의 아들인 자신도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없는 것이라 탄식하였다. 혜제는 유방이 걱정했던 대로 몸과 마음이 허약했다. 산 송장과 다름없는 척부인을 본 충격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혜제는 국사는 돌보지 않은 채 주색에 빠져 있다가 재위 7년만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중국에서도 여후의 이런 잔혹함에 진저리가 났는지 돼지를 지칭하는 한자로 체(彘)라는 글자를 쓰기를 꺼려 한나라 이후로는 거의 쓰지 않는 글자가 되었다.

유방의 최측근 참모 장량

계포일낙(季布一諾) : 한나라의 개국공신은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소하나 번쾌, 조참 등 유방이 패현에서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초창기 멤버들이고 두번째는 초한전쟁 본격화를 전후해 유방 진영에 합류해 공을 세운 후속 멤버들이다. 한나라 개국 이후에도 유방의 친위 그룹으로서 세를 유지했던 초창기 멤버들과 달리 후속 멤버들의 경우에는 한나라의 안정과 반비례해 신분이 급전직하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한신이나 팽월, 영포 등 항우의 밑에 있다가 유방 진영으로 전향해 개국공신의 신분으로 왕이나 후에 봉해진 인물들 중 상당수는 말로가 비참했다. 이들 대부분은 모반의 죄를 받아 자신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가 주살당하고 말았는데 예외적으로 천수를 누린 이들 중 한 사람이 계포이다. 계포는 초한전쟁 도중에 유방의 진영으로 넘어온 이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항우를 위해 싸우면서 수차례 유방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계포는 항우가 죽은 후 한나라의 지명수배자 신세가 되었으나 유방의 벗이었던 여음후 하후영의 도움으로 유방의 용서를 받아 한나라의 낭중(郎中 : 황궁의 경비와 황제의 호위 역할을 맡은 근위병)이 되었다. 유방의 사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여후는 유방의 친위 그룹 대부분을 권력 핵심에서 배제했으나, 그들과 결이 달랐던 계포는 낭중들을 통솔하는 중랑장(中郞將)으로 중용했다. 기원전 192년, 흉노의 수장 묵돌선우는 아내와 사별한 후 여후에게 일종의 연서를 보냈다. 묵돌선우의 서신을 자신에 대한 능멸로 간주한 여후가 대노하자 제부(弟夫 :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의 남편이 번쾌임.)인 번쾌가 자신에게 10만의 군사를 주면 흉노를 평정하겠노라며 호기를 부렸다. 다른 신하들이 여후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중랑장 계포가 나섰다. 고조 유방조차 40만의 대군을 이끌고도 평정하지 못한 흉노(마상득지(馬上得之)의 고사에서 언급한 기원전 200년의 對 흉노 전투를 말한다. 고조 유방은 번쾌 등의 장수를 포함한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으나 흉노의 작전에 말려 백등산에서 포위당해 어려움을 겪다가 진평의 계략에 힘입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를 번쾌 따위가 대적할 수있겠느냐고 계포가 일갈하자 번쾌는 입을 다물고 여후도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계포는 대장부다운 기개와 신의 있는 행동으로 당대에 명성이 높아 세간에서는 “황금 100근을 얻는 것이 계포의 허락 1번 받는 것만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한번 한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는 의미의 계포일낙이다.


좌단(左袒) : 유방이 사망한 후 유약한 혜제를 대신해 국정을 장악한 여후는 혜제가 사망한 기원전 188년 이후 여씨 천하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혜제의 어린 아들들이 3대 및 4대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허수아비 황제일 뿐 실권은 여후를 비롯한 여씨 일족들이 쥔 상황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황제에 관한 기록인 본기에서도 이들 3, 4대 황제의 본기는 없으며 이 시기는 여후에 대한 기록인 여태후 본기로 대체되었다.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자 서슬 퍼런 여후 치하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개국공신들이 움직였다. 여씨 일가인 여산과 여록 등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태위(한나라의 최고 관직인 삼공(三公)의 하나로 삼공은 승상(국무총리에 해당), 어사대부(관리에 대한 감찰을 담당, 감사원장에 해당), 태위(국방 장관에 해당)를 말함.) 주발과 승상 진평은 계략을 써서 장군의 인수(印綬)를 확보하였다. 인수를 든 주발이 병사들에게 군령을 내렸다. “여씨 일가를 따를 자는 옷의 오른 쪽 어깨를 걷고(右袒), 유씨를 따를 자는 왼 쪽 어깨를 걷어라(左袒).” 주발의 말이 떨어지자 모든 병사들이 왼 쪽 어깨를 걷어붙이고 여씨 일가 토벌에 나서 여씨 일족을 일망타진하였다. 이 고사에서 나온 좌단이라는 말은 특정한 의견에 찬성하거나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류협배(汗流浹背) : 여후의 사망 후 주발과 진평이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즉위한 문제 유항은 고조 유방이 후궁 박씨와의 사이에 낳은 넷째 아들이었다. 문제(文帝)는 소박한 성품과 함께 민생을 위주로 한 무위(無爲)의 정치를 통해 국정을 안정시켜 아들 경제(景帝)와 함께 문경(文景)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문제는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주발과 진평, 두 사람을 각각 우승상과 좌승상(한나라의 관직에서는 ‘상우(尙右)’라 하여 우를 좌보다 더 존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우승상이 좌승상보다 서열이 더 높았다. 그러나 이후의 중국 왕조에서는 같은 자리에 두 사람을 임명할 경우 ‘좌상우하(左上右下)’라 하여 좌를 우보다 더 높게 쳤다. 다만 원나라의 경우에는 몽골의 관습에 따라 우승상이 좌승상보다 상위 직급이었다.)으로 임명하였다. 국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문제가 어느 날 회의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일년 동안의 송사 판결 건수와 국가 재정의 수입 및 지출 등에 대해 물었다. 두가지 질문 모두 답을 하지 못한 주발은 모르겠다며 사죄하였다. 주발은 승상으로서 황제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으며(汗流浹背) 이를 심히 부끄럽게 여겼다. 우승상으로부터 답을 얻지 못한 문제는 같은 질문을 옆에 있던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추궁에 가까운 황제의 질문을 받은 진평 역시 답을 알지 못했으나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진평은 그런 일은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물어보는 것이 마땅하며 천자를 보좌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승상의 일은 아니라 답하였다. 조리 있는 답변에 말문이 막힌 문제는 진평을 칭찬할 수 밖에 없었다. 주발은 자신의 재주가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병을 핑계 삼아 우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류협배라는 말은 몹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지만 글자 그대로 힘든 일을 하여 온몸이 땀으로 젖은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세류영(細柳營) : 주발의 작은 아들 주아부는 인물 됨됨이가 뛰어난데다 병서에 능통하여 죄를 짓고 가문에서 쫓겨난 형 주승지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후(候) 작위를 이어받았다. 기원전 158년 흉노의 침입으로 수도인 장안까지 불안해지자 문제는 수도 방위를 위해 장안의 주위에 세개의 군영(軍營)을 편성하게 했다. 세 군영은 각각 패상과 극문, 그리고 세류라는 곳에 주둔하였는데 문제는 복무 중인 병사들을 위문하고자 3대 군영을 친히 순시하기로 하였다. 문제가 패상과 극문의 군영을 방문하였을 때는 군영의 대장과 병사들이 황제를 하나같이 열렬히 환영했다. 병사들의 환대에 기분이 좋아진 문제는 마지막으로 주아부가 지키는 세류의 군영(細柳營)을 찾았다. 황제의 선발대를 보자 마자 문을 열어준 두 군영과 달리 세류영을 지키는 병사들은 철통 같은 경계 속에 황제에게조차 군영의 절차에 따라 줄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절차를 거쳐 어렵사리 주아부를 만났으나, 주아부는 갑옷을 입고 있어 황제에게 예를 갖추지 못한다면서 선 자세로 인사를 하였다. 순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문제에게 수행했던 측근들이 주아부가 오만하고 무례하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문제는 패상과 극문의 허술한 방비로는 백성들을 지킬 수 없겠지만 세류영의 삼엄한 경계는 적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아부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군율이 엄정한 부대를 상징하는 말이 세류영이 된 것은 명장을 알아보는 명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갑옷 차림으로 황제를 맞는 주아부

지강급미(舐糠及米) : 한나라의 제후왕 중 오나라 왕 유비(한자로는 劉濞, 후한 시대 말이 배경인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명의 주인공은 한자로 劉備이다.)는 한 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의 아들로 유방을 따라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기원전 196년 오왕에 봉해졌다. 사람보는 눈이 남달랐던 유방은 유비에게 모반의 상(相)이 있다는 이유로 왕으로 책봉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오나라 땅이 숙적이었던 항우의 출신지로 다스리기 쉽지 않은 곳이라 판단해 조카들 중 용맹한 유비를 왕으로 보내 다스리게 한 것이었다. 유비는 즉위 후 구리 광산이 있는 데다 바다에 인접한 오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전과 소금의 제조로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였다. 문제 시절인 기원전 165년, 유비의 아들 유현이 장안에 입조해 황태자 유계와 주사위놀이를 하던 중 다툼이 벌어져 황태자가 던진 놀이판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유비는 이를 핑계로 오나라 땅에만 머물면서 장안의 황제가 주재하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문제는 유비의 불경스러운 태도에도 그가 사촌 형인데다 조카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쳐 이를 방관했다. 문제의 사망 후 황태자인 유계가 경제로 즉위하자 어사대부 조조(한자로는 晁錯라고 쓴다. 역시 삼국지연의의 曹操와는 당연히 다른 인물이다.)가 글을 올렸다. 급진적 성향의 개혁주의자였던 조조는 상소문에서 오왕 유비를 비롯한 제후왕들이 다스리는 영지가 천하의 절반에 해당한다며 이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전해 들은 유비는 아들을 죽인 경제에 대한 적개심에다 조정의 개혁조치 시행으로 영지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모반을 결심하였다. 다른 제후왕 중 동조세력을 찾던 유비는 무용(武勇)이 뛰어난 교서왕 유앙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중대부 응고를 보냈다. 유앙을 찾아간 응고는 쌀겨를 다 핥아먹으면 결국 쌀을 먹게 된다(舐糠及米)는 속담처럼 영지 삭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반란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였다. 기원전 154년 오왕 유비와 교서왕 유앙을 포함, 일곱 개 나라의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경제의 즉위 후 어사대부 조조의 제안으로 제후왕의 힘을 빼기 위해 실시한 봉토 삭감 정책이 실시되자 이에 반발해 오왕 유비의 주동 하에 오나라를 비롯, 초, 조, 교서, 교동, 치천, 제남 등 일곱개 나라가 일으킨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지강급미의 의미는 외부에 대한 공격이 결국 내부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에서 순망치한과 유사하며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 : 오초칠국의 난의 원인 제공자인 조조는 법가의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사람됨이 준엄하고 강직했다. 문제 시절 조조는 복생이라는 진나라 박사 출신의 원로 학자를 만나 ‘서경(書經 : 사서오경의 하나로 ‘상서(尙書)’라고도 함. 공자가 요순시대로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의 나랏일에 관한 문서를 수집하여 편찬한 책, 천자의 포고문, 신하들의 상소문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익힌 후 문제에게 나라를 위한 일련의 정책들을 상주하였다. 조조가 올린 정책 중에는 흉노의 약탈에 시달리던 변경 지방 백성들을 위한 정책도 있었다. 조조는 해당 지역 백성들이 흉노의 약탈로 먹고 살기 힘든 와중에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에까지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게다가 조세와 부역 관련 관청의 명령도 아침에 내려온 명령이 저녁이 되면 달라지는(朝令暮改) 등 종잡을 수 없어 농민은 경작지를 잃고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상소문을 보고 조조의 영민함을 높이 산 문제는 조조를 황태자 유계의 보좌역인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삼았다. 황태자 유계는 재능과 말솜씨가 뛰어난 조조를 중용하여 황제(경제)로 즉위한 후 황제의 측근인 내사를 거쳐 삼공의 하나인 어사대부로 삼았다. 조령모개는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의미의 조변석개라는 말과 함께 일관성이 없는 법령이나 정책을 의미한다.


지상에서는 아닐지라도 지하에서 모반할 생각(不反地上 卽欲反地下) : 세류영의 고사에서 언급한 주아부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황제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이었다. 강직한 주아부를 아낀 문제는 죽음에 임하여 아들 경제에게 국난이 발생하면 주아부와 의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한 후 초동 대처에 실패하여 어려움에 처한 경제는 문제의 유언대로 주아부를 등용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승상에 오른 주아부는 만년의 경제가 황태자인 유영을 폐하고 총애하던 왕지라는 후궁과의 사이에 낳은 열째 아들 유체를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거세게 반대했다. 이를 계기로 주아부와 경제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기원전 147년, 흉노족의 수장 다섯 명이 한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는 기쁜 마음에 이들을 후로 봉하려 했으나 주아부는 공이 없는 자는 후로 봉하지 않는다는 고조의 원칙에 반한다며 또다시 반대했다. 주아부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이들을 후로 봉하자 병을 핑계삼아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직정경행(直情徑行)하는 주아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경제가 관직에서 물러난 주아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 만찬장에 간 주아부는 자신의 자리에 자르지 않은 고깃덩어리가 젓가락도 없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였다. 주아부가 사람을 불러 젓가락을 달라 하자 지켜보던 경제가 말했다. “그대는 이 것으로도 부족한가?” 싸늘한 경제의 태도에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난 주아부는 황급히 사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경제는 돌아가는 주아부의 뒷모습을 보며 어린 군주를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난조로 말했다. 황제와의 면담 후 의기소침해 있는 주아부를 본 아들이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아버지의 장례 때 쓸 부장품의 용도로 상방(尙方 : 황실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제작하는 공공기관)에서 갑옷과 방패를 각각 500개씩 구입하였다. 황실에 버금가는 장례의 준비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부들에게 노임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인부들은 주아부의 아들이 모반을 위해 갑옷과 방패를 사들였다고 고발하였다. 경제의 지시를 받은 정위(廷尉 : 한나라의 고위직에 해당하는 구경(九卿)의 하나로 형벌과 법률의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주아부와 아들을 체포한 후 심문하였다. 모반을 획책한 것이 아니냐는 정위의 심문에 주아부는 부장품으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정위는 설사 지상에서는 아닐지라도 지하에서 모반할 생각(不反地上 卽欲反地下)이 아니었냐고 다그쳤다. 분을 못이긴 주아부는 닷새 동안의 단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여씨 천하를 평정한 아버지 주발에 이어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워 2대에 걸쳐 유씨의 한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주아부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주아부는 유능한 충신이었지만 지혜롭지 못했고 경제는 훌륭한 황제였지만 자애롭지는 않았다. 자신의 뒤를 이을 어린 황태자를 걱정해야 하는 황제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한 주아부의 우직함이 자신과 가문의 불행을 자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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