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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함께 보는 중국의 역사(9)

전한(前漢) 시대(1)

by bellwether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서기 8년) 시대


초한전쟁에서 승리한 한왕 유방은 기원전 202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지금의 산시성 시안시)을 수도로 정하였다. 진나라에 이은 중국의 두번째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시작이었다. 유방은 한나라의 통치 시스템으로 주나라의 봉건제와 진나라의 군현제를 혼합한 군국제(郡國制)를 도입하였다. 수도 장안을 비롯한 군사적 중요지역은 군(郡)을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통치하되 그 외의 지역은 초한전쟁의 공신들과 유씨 성의 친족들을 왕과 열후(列候)로 봉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후국으로 만들었다. 개국을 즈음해서는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이성(異姓) 제후왕들의 지배 지역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국 초기의 혼란이 어느정도 수습되자 한신을 시작으로 팽월, 영포 등 이성 제후왕들이 모반의 이유로 주살 당하면서 대부분의 제후왕들이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방의 사망 후에는 남편 못지않은 권력욕으로 국정을 장악한 여후(呂后 : 한 고조 유방의 정실 부인이며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황후(皇后)로 이름은 여치, 무일푼의 건달이었던 유방이 동네 유지였던 여공(呂公)의 잔칫집에 놀러갔을 때, 그의 배포와 기상을 알아본 여공이 딸 여치를 떠맡기다시피 유방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에 의해 일시적으로 여씨 천하가 되기도 했으나, 여후의 죽음을 계기로 개국공신 주발 등에 의해 여씨 일족이 일소되면서 제후왕은 유씨 집안으로 제한한다는 원칙이 정립되었다.


출발이 다소 불안했던 한나라는 5대 황제인 문제가 즉위한 후 선정을 베풀면서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아들 경제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를 비롯, 유씨 성을 가진 7명의 제후왕들이 중앙 조정의 삭번 정책에 반발하면서 일으킨 반란, 개국공신 주발의 아들인 태위(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 주아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진압 후 제후왕들의 권한을 제약해 실질적으로 군현제로 복귀하였으며 문제에 이어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쳐 문경(文景)의 치로 불리는 한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경제의 사망 후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7대 황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면서 유학(儒學)을 국교로 하고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여 이후 2천년간 이어지는 중국의 기본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무제의 치세에서 한나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했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한나라의 국운 역시 노년의 무제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무제는 북으로 흉노에 대한 원정을 비롯, 서쪽으로는 실크로드의 개척, 동으로 고조선, 남으로는 남월의 정벌 등 과도한 정복사업의 수행으로 국력의 쇠퇴를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나라는 여후를 시작으로 대대로 황후나 황태후들이 정치 일선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외척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무제가 사망한 후에는 국가 재정이 고갈된데다 황위 계승과정을 외척이 주도함에 따라 황실의 권위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제의 뒤를 이은 8대 황제 소제는 7세의 어린 아이여서 권신들이 섭정의 형태로 국정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제는 14년간 재위했으나, 성년이 되자마자 요절해 버려 제위를 둘러싼 제후왕과 권신, 외척 세력들 간의 갈등으로 한 황실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권신 곽광에 의한 9대 황제의 추대와 한달만의 폐위가 이어진 끝에 황실이 아닌 민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 서민의 어려움을 아는 10대 황제 선제가 즉위하였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제가 내치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한나라의 국정은 다시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선제의 아들인 원제는 즉위 후 유학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면서 국정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원제의 황후인 원후(元后) 왕정군의 조카 왕망은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원후의 추천으로 궁정에 들어간 후 탁월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원제의 뒤를 이은 12대 황제 성제 말년에 대사마의 자리에 올랐다. 왕망은 성제의 조카로 13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애제가 즉위하면서 실각하기도 하였으나, 애제가 즉위 6년만에 단명함에 따라 마지막 황제인 아홉 살의 14대 황제 평제를 옹립한 공을 내세워 조정에 복귀하였다. 어린 황제의 즉위를 틈타 국정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던 왕망이 평제까지 독살한 후 서기 8년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신(新)’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면서 전한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옹치봉후(雍齒封侯) : 유방은 패현에서 거병했을 당시 자신의 고향마을인 풍읍을 동향 출신의 수하인 옹치에게 맡겼다. 패현의 호족 출신이었던 옹치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 건달인 유방의 밑에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풍읍을 위구라는 다른 반란세력에게 바치고 투항해 버렸다. 옹치는 훗날 초한전쟁의 와중에 다시 유방의 진영으로 넘어와 큰 공을 세우는 바람에 유방이 과거의 죄를 묻지는 않았으나 내심으로는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원전 201년, 항우를 꺾고 천하를 제패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방이 논공행상을 실시하려 하자 휘하의 장수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공을 세운 자는 많은 데 분봉할 땅은 제한되어 있는 만큼 후로 봉해지지 않는다면 주살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모반을 고민하는 자들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황제 유방은 최측근 참모인 장량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천리 밖의 일을 헤아린다고 자신이 극찬했던 장량이니만큼 적절한 계책을 제시해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었다. 묘책을 기대했던 유방에게 장량은 문제의 인물인 옹치를 가장 먼저 후로 봉할 것을 제안했다. 예상 밖의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진 유방이 이유를 물었다. 장량의 설명은 유방에게 미움을 샀다고 다들 알고 있는 옹치를 불러 후로 봉하면 장수들의 걱정은 사라지리라는 것이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듣자 지체 없이 옹치를 제후로 봉하고(雍齒封侯) 다스릴 영지도 두둑하게 내렸다. 이를 지켜본 공신들은 유방의 미움을 받는다고 소문났던 옹치가 가장 먼저 후에 봉해지자 마음을 놓았다. 옹치까지 후로 봉해진 마당에 자신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다들 안심하면서 조정의 분위기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모름지기 리더라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우리 속담처럼 따르는 이의 잘못을 포용할 수 있는 옹치봉후의 마음가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탁월한 용인술의 소유자 한 고조 유방


마상득지(馬上得之) : 초한전쟁에서의 승리로 한나라가 중원을 제패한 것과 비슷한 시기, 북방에서는 묵돌선우라는 영명한 지도자를 만난 흉노족이 여타 이민족을 규합하여 세력을 급속히 불리고 있었다. 한나라 건국 초기인 기원전 200년, 묵돌선우는 한왕 신(韓王 信 : 이름은 한신(韓信),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유방에게 공을 인정받아 옛 한나라 땅을 다스리는 한왕으로 봉해졌다. 사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동명이인의 맹장 한신과 구별하여 한왕 신으로 표기한다.) 등의 반란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한나라의 영토를 침범했다. 한 고조 유방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친정했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당해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은 끝에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남방에서는 진시황 시절 베트남 지역에 설치한 남해군(南海郡)의 관리였던 조타가 초한전쟁의 와중에 자립하여 남월(南越)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처했다. 유방은 대흉노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나라의 국력이 대외 정복 전쟁을 벌이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남월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선택했다. 유방은 신하들 중 언변이 좋고 글재주가 뛰어난 육가를 남월로 보내 조타에게 제후왕의 인수(印綬)를 전달하게 했다. 조타는 사신으로 온 육가의 말재주와 당당한 태도에 반해 한나라에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 무인 위주였던 유방의 초창기 멤버 중 드물게 유학자 출신이었던 육가는 유방이 제위에 오른 후에도 무력을 중시하고 시서(詩書)를 가볍게 여기자 직언하였다. “폐하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 유방은 비록 안하무인의 성격이었지만 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을 품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유방은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육가에게 명하여 나라의 흥망에 관한 사례를 글로 지어 올리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육가가 말한 마상득지는 난세를 평정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武)이 있어야 하지만 세워진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결국 글(文)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함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하지욕(袴下之辱) : 평민 출신의 유방이 초나라 명문가의 후손이자 불세출의 전쟁 영웅인 항우를 꺾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데는 한삼걸(漢三傑)이라 일컫는 장량, 소하, 한신 등 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는 유방에 대한 사기의 기록인 ‘고조본기(高祖本紀)’에서 유방 스스로가 인정한 내용(한 고조 유방은 신하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자신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전장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대군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해 공을 세우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라 할 만하다. 이 세 사람을 내가 부릴 수 있었던 것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이기도 하다. 셋 중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한 소하나 전략을 짜는 군사(軍師) 역할의 장량은 문관으로서 직접 전선을 누빌 일은 없었지만 한신은 초한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인물로 항우에 버금가는 맹장이라 할 수 있다. 항우의 제후왕 분봉 시 관중 땅에서 오지인 파촉의 땅으로 쫓겨 갔던 유방이 중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한신의 탁월한 전투력 덕분이었다. 이후 유방은 한신이 이끄는 소수 정예 별동대의 맹활약에 힘입어 다른 제후왕들을 제압하고 항우와 일대일 대치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유방과 항우의 최후의 결전인 해하의 싸움에서도 30만 대군을 이끌고 참전한 한신이 없었다면 유방의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신은 이러한 압도적 전공에 힘입어 한나라 건국을 전후해 한삼걸 중 유일하게 제후왕에 봉해졌다. 일개 무장으로 출발해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한신은 젊어서부터 입신 출세에 대한 욕망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빈한한 집안 출신이었던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비렁뱅이 신세였는데 초라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항상 큰 칼을 차고 다녀 주위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하루는 한신과 동네 불량배와의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불량배는 한신에게 비렁뱅이 주제에 칼이 웬 말이냐며 자신 있다면 그 칼로 자신을 찌르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자신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한신은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는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袴下之辱)을 감수했다. 한신의 이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 과하지욕인데 큰 꿈을 위해 한 순간의 치욕은 참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토사구팽의 대명사 한신


다다익선(多多益善) : 초한전쟁에서 불리한 초반 전세를 뒤집고 유방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방이 항우에 비해 용인술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항우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부족함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은 인재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유방의 승리에 기여한 일등 공신 중 모사인 진평과 맹장인 한신, 경포, 팽월 등은 한때이나마 항우를 섬겼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항우를 버리고 유방 진영에 합류한 인물들이었다. 반면 자신감 과잉의 독불장군 항우는 유방 측의 이간계에 넘어가 부하 중 유일한 전략가라 할 범증마저 항우 곁을 떠나 분사(憤死)하게 만들었다. 천하를 평정한 한 고조 유방이 어느 날 한신을 비롯한 장수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한신은 모반 혐의를 받아 군사 지휘권을 박탈당한데다 지위도 왕에서 후로 격하된 상태였다.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과인이 전장에 나간다면 얼마만큼의 군사를 지휘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한신은 십만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 답하였다. 호승심이 생긴 유방이 한신에게 “그렇다면 그대는?”이라 물었다. 한신의 대답은 “신(臣)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而益善耳).”였다. 한신의 오만한 대답에 언짢아진 유방이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가 내 밑에 있는 것인가?”라며 비꼬는 말을 하자 한신이 대답했다. “그것은 폐하가 신과 같은 장수를 부리는 장수들의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폐하는 하늘이 돕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한신의 재치 있는 대답을 들은 유방은 “과연 한신이로구나.”라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한신의 이 답변은 능력은 자신에 못 미치지만 천운이 따르는 유방에게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재능을 과시함으로서 제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유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현명하지 못한 답변이기도 했다. 다다익선의 천재적 용병술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몸 하나를 지키는 처세술에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한신은 기원전 196년, 모반의 죄를 뒤집어쓰고 일족과 함께 몰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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