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전쟁(楚漢戰爭) 시기
5. 초한전쟁(楚漢戰爭) 시기(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
진나라가 망한 후 유방이 한나라의 황제에 오른 기원전 202년까지는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이 천하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시기이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한 기원전 209년을 전후로 진나라의 국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전국 시대 육국의 재건을 명목으로 한 반란세력의 봉기가 곳곳에서 줄을 이었다.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아들 항량은 조카 항우와 함께 초나라의 옛 땅인 회계에서 거병하여 세력을 불려 나가던 중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초 회왕으로 옹립하였다. 항량의 세력은 보유한 병력의 규모와 함께 명분 면에서도 여타 세력들을 압도하면서 명실상부한 반진 연합세력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진시황의 능인 여산릉을 축조하기 위하여 징발된 죄수들을 인솔하여 여산으로 가던 중 도망자 신세가 된 유방 역시 출신지인 패현에서 현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진 연합세력에 합류하였다. 항량이 진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후 반진 연합군의 군권을 장악한 항우는 파죽지세의 기세로 진나라 군을 격파해 나갔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장함이 지휘하는 진나라 주력부대마저 거록에서 대파하여 실질적으로 진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일원으로 초 회왕의 지시를 받은 유방이 항우보다 한발 앞서 함곡관을 뚫고 들어가 진나라 수도 함양을 선점하였다. 유방은 황제에서 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과 함께 ‘전국옥새(傳國玉璽 : 완벽(完璧)의 유래가 된 화씨벽으로 만들었다는 통일 진제국의 옥새로 나라에서 나라로 전(傳)해졌다는 의미에서 전국옥새(傳國玉璽)라 한다. 진시황은 조나라를 멸망시킨 후 화씨벽을 찾아내 승상 이사에게 명하여 옥새를 만들게 했다. 전국옥새는 그 후 한나라를 거쳐 역대 중국 왕조에서 천하의 주인을 뜻하는 기물로 전해졌으나, 936년 오대십국의 하나인 후당(後唐)의 멸망 시 소실되었다고 한다.)’를 넘겨받아 진나라를 멸망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유방은 함양을 포함, 천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관중 땅을 차지하였으나, 뒤이어 40만의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의 기세에 눌려 항우에게 이를 양보하였다. 진의 멸망 후 벌어진 논공행상을 주도한 항우는 유방을 오지인 파촉(巴蜀 : 지금의 쓰촨성 일대)과 한중(漢中) 땅의 왕, 즉 한왕으로 봉했다. 항우는 관중을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생각에 관중 땅은 부하들에게 나눠준 후 전국 시대의 초나라 지역을 영유하고 서초패왕을 자처했다. 항우는 명목상의 왕이던 초 회왕까지 제거하여 천하는 잠시나마 항우의 것이 되었으나, 파촉에서 나온 유방이 관중의 땅을 다시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 지방의 건달 출신인 유방에 비해 가문이나, 인물, 그리고 나이까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던 항우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방을 밀어붙였다. 유방은 개인의 능력으로는 항우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나, 그에게는 한신과 팽월 등의 명장과 함께 장량과 소하라는 우수한 참모진이 있었다.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전세를 역전시킨 유방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해하(지금의 안후이성 쑤저우)에서 항우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파부침주(破釜沈舟) : 진승과 오광의 난을 계기로 진제국 곳곳에서 반란세력이 봉기하였지만, 주요 세력의 근거지는 크게 세 군데로 압축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진승과 오광을 비롯, 항우와 유방 등이 거병한 과거 초나라 지역, 두번째는 전국 시대 제나라 땅이 있던 산동성 일대, 그리고 세번째는 전국 시대 조나라 지역이었던 하북성 남쪽 일대였다.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제압한 장함은 연이어 제나라 땅의 반란세력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항량마저 죽인 후 조나라 땅을 평정하기 위하여 20만 대군을 이끌고 한단으로 쳐들어갔다. 장함은 조나라의 반란군이 한단 북쪽의 거록성으로 도주하자 몽염의 부하로 만리장성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왕리가 이끄는 부대를 보내 거록성을 포위하게 하였다. 기원전 207년, 초 회왕은 항량의 막료이던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에게는 차장(次將)의 지위를 부여한 후 5만명 규모의 지원군을 거록성에 파견하였다. 거록성 근처에 도착한 송의는 당장 전투를 시작해야 한다는 항우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군과 조나라 반란세력 간의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전황이 불리해질 것임을 예상한 항우는 진중(陣中) 쿠데타를 일으켜 송의의 목을 벤 후 지휘권을 장악하고 진군을 상대로 거록대전을 개시하였다. 거록성 구원을 위해 강을 건넌 항우는 임시로 지은 막사와 밥해 먹던 솥을 부숴버리고(破釜) 타고 온 배마저 가라앉혀 버린(沈舟) 후 병사들에게는 3일치의 식량만을 배급하였다. 병사들에게 패배는 곧 죽음임을 각인시킨 것이다. 항우군이 죽기 살기의 각오로 진군을 몰아붙인 전투의 결과 진군은 대패하여 장수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항복하였다. 거록대전에서의 패배로 진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막강한 전투력을 보인 항우는 반진 연합세력의 맹주이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 날에도 파부침주는 ‘배수의 진(背水의 陣 : 초한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기원전 204년, 팽성과 형양 전투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수세에 몰린 유방은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한신에게 하북 지방의 정벌을 명하였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병력의 규모나 병사의 자질 면에서 불리함을 간파한 한신은 진을 칠 때는 강을 마주하거나 옆에 두어야 한다는 병법을 무시하고 강을 뒤(背水)로 하고 진을 쳤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한신군은 일당백의 기세로 전투에 임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이라는 표현과 함께 결사항전의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충언역이(忠言逆耳) : 항우가 이끄는 반진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조나라 지원을 위해 북으로 간 사이 유방의 부대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유방은 함양의 동쪽 관문인 함곡관과 남전에서 진나라의 수비 세력을 제압하고 관중 땅에 입성하였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조고가 2세 황제를 시해한 후 진시황의 후손인 자영을 진왕으로 옹립하였다. 진왕 자영은 자신을 꼭두각시 삼아 권세를 이어가려 했던 간신 조고에게 선수를 쳐 즉위하자마자 주살해 버렸다. 자영은 즉위 후 유방군에 저항하기도 했으나,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45일만에 유방에게 전국옥새를 넘기고 항복하였다. 진 황실의 금은보화와 궁녀들을 보고 마음이 동한 유방은 황궁으로 들어가 재물과 미색을 즐기려 했다. 그러자 유방의 동서이면서 개백정 출신의 용장이었던 번쾌가 천하가 어지러운 마당에 진나라 궁궐에서 안락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하였다. 참모인 장량까지 나서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耳利於行)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낫게 하는 법(毒藥苦口利於病)”이라며 번쾌의 말에 따르도록 충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량의 말이라면 새겨들었던 유방은 느낀 바가 있어 궁궐로 들어가지 않고 패상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누구에게나 충언은 역이이지만 유방에게는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신하가 있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받아들이는 대범함이 있었다. 유방의 이 대범함이 항우와 벌인 초한전쟁에서 결국 유방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주불사(斗酒不辭) : 기원전 206년, 유방의 병력은 관중 땅의 관문인 함곡관을 넘어 함양을 점령하였다. 진나라의 심장부라 할 관중으로 먼저 들어간 자를 관중왕으로 봉하겠다는 초 회왕의 선언이 있었던 터라 유방은 병력을 동원해 함곡관을 막고 관중왕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두 달 정도 늦게 함곡관에 도착한 항우는 유방의 관중 선점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함곡관을 쳐부수고 들어가 함양 부근의 홍문이라는 곳에 진을 쳤다. 이 때 항우의 병력은 40만 대군으로 패상에 주둔하고 있던 유방 병력의 4배에 달하는 압도적 수준이었다. 유방은 반란군 연합세력의 맹주 격인 항우가 홍문으로 호출하자 모사(謀士)인 장량 등 최측근 수하 100여명만을 이끌고 홍문으로 향하였다. 중국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장면 중 하나이며 경극(京劇)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홍문연(鴻門宴)’의 시작이었다. 연회에 앞서 유방이 항우에게 본의 아니게 관중 땅에 먼저 들어온 것에 대해 공손한 태도로 사죄하자 유방에 대한 항우의 분노는 상당히 누그러졌다. 이를 본 항우의 모사 범증은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한순간의 굴욕 따위는 개의치 않는 유방의 속내를 간파하였다. 범증은 항우에게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이지 않으면 후일 큰 우환이 될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장량의 사전 공작에 넘어간 숙부 항백이 이를 만류하자 항우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보다 못한 범증의 지시로 항우의 종제(從弟) 항장이 검무(劍舞)를 추는 척하면서 유방을 죽이려 들자 유방을 수행해 온 번쾌가 두 눈을 부릅뜬 채 항우를 쏘아보며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항우는 도깨비 같은 형상을 하고 연회장에 불쑥 들어온 번쾌의 패기가 마음에 들어 큰 잔의 술과 함께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로 내렸다. 번쾌는 선 채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방패를 도마 삼아 돼지고기를 썰어 술과 함께 먹었다. 번쾌의 호방한 모습에 감탄한 항우가 술을 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번쾌는 “신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잔 술을 마다하겠습니까(臣死且不辭 豈特卮酒乎).”라고 대답했다. 술기운과 함께 기세가 오른 번쾌가 진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이 있는 유방을 죽이는 것은 진나라의 후예들이나 할 짓이라며 일갈하자 항우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였다. 어수선한 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온 유방은 뒤처리는 장량에게 맡기고 그 길로 홍문을 떠나 본인의 주둔지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번쾌의 대답에서 유래한 두주불사는 주당(酒黨)들의 술실력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지만 정작 번쾌가 한 잔 술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주군의 목숨을 구한다는 대의가 있었음을 새겨봐야 할 일이다.
걸해골(乞骸骨) : 항우의 모사였던 범증은 항량이 항우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70세라는 늦은 나이로 항량을 찾아가 군사(軍師) 역할을 자처했다. 항량이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초 회왕으로 옹립함으로써 민심을 얻어 반진 연합을 주도하게 된 것도 범증의 아이디어였다. 범증은 항량이 장함에게 패해 전사한 후 항우를 보필하여 거록대전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하는 등 항우 진영의 브레인 역할을 톡톡이 해냈다. 초한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방이 항우에게 연전연패하자 유방의 모사 중 하나인 진평은 범증을 제거해야만 승산이 있다고 보고 이간책을 쓸 것을 제안하였다. 진평의 계략이 주효해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게 되고 분노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떠나면서 항우에게 천하 대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자신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며 맡겼던 해골을 돌려줄 것(乞骸骨)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항우를 믿고 자신의 목숨까지 맡겼으나, 이제는 그만 두려 하니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범증의 본심은 걸해골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통해 항우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결정에 대해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던 항우는 주저없이 범증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귀향길에 오른 노년의 범증은 화병으로 인해 등에 난 종기가 터져 죽고 말았다. 여기서 유래한 걸해골이라는 표현은 나이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할 때 군주에게 올리는 글에서 사용되곤 하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 : 홍문연을 통해 유방을 관중 땅에서 축출한 항우는 이어 진나라의 자영을 죽여 진나라를 멸한 후 초 회왕을 내세워 자신을 포함한 반진 연합세력에 대한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진나라의 군현제를 폐기한 항우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답습하여 천하를 19개 지역으로 나눈 후 주요 장수들을 연고지의 제후왕으로 봉했다. 항우 본인은 고향인 팽성을 도읍지로 하여 초나라 지역 9개 성을 영유하고 서초패왕을 자처하였으며 유방에게는 오지인 파촉의 땅과 함께 한중 땅을 주어 한왕으로 봉하였다. 천하의 중심인 관중은 셋으로 나눠 자신의 직계 부하들에게 분봉(分封)했다. 분봉을 끝낸 항우는 반진 연합세력의 명목상의 리더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칭한 후 변두리로 쫓아내 죽여버렸다. 항우가 논공행상에서 공의 다과보다는 본인과의 친소 관계를 더 중요하게 따진 데다 의제까지 죽여버리자 이에 불만을 가진 제후왕들의 봉기가 이어지면서 천하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유방 역시 관중을 선점한 자를 관중왕으로 봉하겠다는 초 회왕의 약속을 항우가 저버렸다는 이유를 들어 파촉 땅에서 나와 관중을 다시 차지했다. 유방은 항우가 없는 틈을 타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했으나, 항우가 직접 반격에 나선 팽성대전에서 항우의 정병 3만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유방은 팽성에 이어 성고와 형양 등 일련의 전투에서 항우에게 연전연패해 몰락의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러나 독불장군 스타일로 부하 장수와 백성들의 인심을 얻지 못한 항우는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듭하면서도 유리한 전세를 최후의 승리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 반면 분봉을 미끼로 한신이나 영포와 팽월 등 중립 노선을 지키던 맹장들을 끌어들여 세를 확장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해하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100만의 병력을 끌어 모아 항우군을 포위했다. 밤이 되면서 사방을 둘러 싼(四面)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노래(楚歌)를 부르자 항우를 포함한 서초의 군사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최후를 예감한 항우는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氣蓋世)”로 시작하는 ‘해하가(垓下歌)’를 부르며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한탄했다. 사면초가는 적으로 에워싸여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을 의미하는데 항우와 같은 적을 만드는 타입의 인물에게는 애초에 피할 수 없었던 결말인지도 모른다.
권토중래(捲土重來) : 해하의 결전에서 패한 항우는 800여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도주하게 되는데 유방은 기병대장인 관영에게 5천여 기병을 주면서 추격을 명했다. 항우가 관영과의 추격전 끝에 강동 땅이 보이는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 항우의 곁에는 고작 이십여명의 부하들만 남아있었다. 부하 중 한 명이 강을 건너 강동 땅에서 재기를 모색하자고 항우에게 권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하를 제패하고자 반진(反秦)의 깃발을 들고 강동 땅의 정예 8천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제 와서 모두 죽고 혼자서만 살아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강을 건너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탄식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전신(戰神)이라 할 항우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후일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의 허무한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제오강정(題烏江亭 : 오강의 정자에서 지었다는 의미, 두목이 841년 지주(지금의 안후이성 츠저우시)자사로 부임하기 위해 오강정을 지나면서 지었다는 7언절구의 시이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勝敗兵家事不期(이기고 지는 것은 병법의 전문가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법) 包羞忍恥是男兒(수치를 견딜 줄 알아야 남자라 할 만하다.) 江東子弟多才俊(강동의 자제들 중 재주 많은 이가 적지 않으니) 捲土重來未可知(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왔더라면 결말이야 누가 알겠는가.)”)이라는 시를 남겼다. 시에서 두목은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인만큼 항우가 일단 강동으로 몸을 피했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왔더라면(捲土重來) 승패는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읊었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재기한다는 의미의 권토중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