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나라
4. 진(秦)나라(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주(周) 왕실의 말(馬) 관리인의 후손이었던 진시황의 조상들은 기원전 10세기경 서쪽의 오랑캐인 견융족을 방어하기 위하여 주 왕실에 의해 진읍(秦邑 : 지금의 감숙성 부근)을 영지로 받아 진나라를 일으켰다. 진나라의 군주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주 왕실이 낙읍으로 천도한 기원전 771년에는 견융족으로부터 왕실을 호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후로 봉해졌다. 이후 주 왕실의 골칫거리이던 견융족을 토벌하여 영토를 확장한 진나라는 진 효공(재위 기원전 361년~기원전 338년) 시대에 상앙이라는 법치주의자의 등용으로 제도의 정비와 함께 국력을 키워 전국 시대에 들어서는 전국칠웅 중 최강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선조들이 물려준 패업의 기반 위에서 한(韓)나라를 시작으로 육국에 대한 병탄 작업을 이어가던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항복한 제나라를 끝으로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여 진제국을 세우게 된다. 봉해진 지역의 제후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해주던 주나라의 봉건제와 달리 진나라에서는 전국 각지를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다스리게 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화폐와 도량형 및 글자체의 통일로 중국을 실질적인 단일 문화권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영문명인 ‘China’ 역시 ‘진’이라는 나라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말년에 북쪽의 오랑캐를 막기 위한 만리장성의 축조 외에 본인의 무덤인 여산릉과 새로운 궁전인 아방궁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연이어 벌였으며 법치주의의 가혹한 적용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게 만들었다. 전제군주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진시황은 대대 손손 본인의 후손들이 황제의 지위를 이어가게 하겠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진제국의 첫번째 황제, 즉, ‘진시황(秦始皇)’이라 칭하였다.
장생불사를 위해 염원했던 진시황이었지만 재위 37년만인 기원전 210년, 전국을 순행하는 과정에서 50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말았다.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시황제의 새서(璽書 : 황제의 옥새를 찍은 문서)를 조작하여 장남인 부소와 대장군 몽염을 죽여 버린 후 상대적으로 조종하기 쉬운 막내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다. 얼떨결에 제위에 오른 2세 황제는 본인을 옹립한 환관 조고의 손에 놀아나면서 폭정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과도한 세금과 혹독한 형벌에 짓눌린 백성들의 분노가 진승과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민란의 형태로 터져 나오자 2세 황제는 사태의 무마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 조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부소의 아들인 자영이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진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급격히 쇠락한 진나라의 국운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군웅들이 천하를 놓고 벌이는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한 고조 유방이 수도 함양을 점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분서갱유(焚書坑儒) : 제자백가의 사상가 중 진나라를 지배한 것은 진 효공 때의 상앙을 필두로 진시황 때의 이사나 한비자 등과 같은 법가(法家)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봉준장목(蜂準長目 : 매부리코에 길게 찢어진 눈이라는 뜻으로 진시황을 위해 천하통일의 대책을 강구했던 울료라는 신하가 진시황의 용모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울료는 이에 더하여 진시황이 가슴팍은 새처럼 튀어나왔고 목소리는 이리 같아서 필요하면 쉽게 남에게 몸을 숙이지만 뜻을 이루고 나면 남을 업신여길 상이라 하여 함께 오래 사귀지는 못할 인물이라 평가하였다.)’의 상을 가졌던 진시황은 천하통일 이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세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천하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 진시황은 여산릉이나 아방궁과 만리장성 등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토목사업을 벌여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혹정을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무자비한 법치주의의 시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국정을 책임지고 있던 승상 이사는 유가 계통 학자들의 국정에 대한 비판이 민심 이반의 주된 원인이라 판단하였다. 기원전 213년, 이사는 진나라의 역사서나 의약과 점복 및 농업 관련 책 만을 남겨두고 유가(儒家)와 관련 책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릴 것(焚書)을 명하는 ‘분서령(焚書令)’을 진시황에게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만들었다. 이듬 해인 기원전 212년에는 진시황을 불로불사의 신선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선약을 구해온다던 후생과 노생이라는 방사(方士)들이 실패하고 달아나면서 진시황을 비방했다는 말이 돌았다. 대노한 진시황은 본인을 비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가 쪽 학자들을 문초하여 연루된 학자 460여명을 수도 함양에 구덩이를 파 생매장(坑儒)해 버렸다. 이 두가지 사건을 묶어 분서갱유라 하는데 조치의 무도함이나 무자비함으로 인해 후세 사람들에게 폭군 진시황의 이미지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 진시황은 주나라 몰락의 주된 원인이 제후들에게 자치권과 세습을 허용한 봉건제라고 생각하여 이를 폐지하고 황제가 파견한 관리들이 각지를 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매일 죽간으로 된 공문 120근을 처리하는 등 정무에 매진하였던 진시황은 제국의 통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본인이 직접 전국을 순행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막내아들 호해와 승상 이사, 그리고 호해의 스승인 환관 조고를 대동하고 다섯 번째 전국 순행길에 나섰다. 순행 중 발병한 진시황은 사구라는 곳에 이르러 죽음을 맞게 되자 흉노족 방어를 위해 북방으로 가 있던 장남 부소에게 수도 함양으로 와 자신의 장례를 치르라는 새서(璽書)를 남겼다. 부소에게 후사를 맡긴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새서를 받은 조고는 이사와 짜고 문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황태자로 삼고 부소와 대장군 몽염에게는 사약을 내린다는 내용으로 조작하였다. 위조된 문서가 진시황의 뜻이라 생각한 부소와 몽염이 자결한 후 호해가 진시황의 뒤를 이어 진제국의 2세이자 마지막 황제에 올랐다. 어린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2세 황제 호해는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면서 황제로 옹립하는데 큰 공이 있는 조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조고는 새서 위조의 공범인 승상 이사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아들과 함께 무참히 처형당하게 만든 후 승상의 자리마저 차지하였다. 내친 김에 황제의 권위까지 욕심 낸 조고가 어느 날 2세 황제와 신하들의 어전회의 자리에 사슴(鹿) 한 마리를 끌고 와 말(馬)을 진상한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2세 황제가 “승상은 어찌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가(指鹿爲馬).”라며 어이없어 하였다. 황제의 비웃음을 들은 조고는 서슬 퍼런 태도로 주위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경들이 보기에 이것은 무엇인가요?”라 물었다. 간신배들은 조고의 위세에 기가 눌려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이라 대답했지만 그 중에서도 강직한 신하들은 사슴이라 답하였다. 조고는 사슴이라 대답한 신하들을 기억했다가 후일 갖은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리니 마침내 조정에는 조고의 말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을 가진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홍곡지지(鴻鵠之志)/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 중국의 역사를 살펴 보면 역대 왕조의 멸망은 대부분 민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몰락의 계기가 된 것도 진승과 오광의 난이라고 하는 민란이었다. 반란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인 진승은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배포가 크고 큰 소리를 잘 쳐 주위사람들로부터 허풍쟁이라는 비난을 받곤 했다. 진승은 이에 대해 “참새나 제비 따위가 어찌 큰 기러기나 고니의 깊은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 鴻鵠之志).”며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기원전 209년, 진승과 그의 동료 오광이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되어 900여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공사 현장으로 가게 되었다. 때마침 한여름이라 가는 길에 장마로 강이 불어나 고립되면서 진승 일행은 도착 일정에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 법에 의하면 공사관련 인력 소집 시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는 자는 목을 벤다고 되어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반란을 주도한 진승은 자신을 따르는 농민들에게 “왕후 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며 반란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여 반란세력을 끌어 모았다.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참여로 따르는 세력만 수십만에 이르자 진승과 오광은 ‘장초(長楚)’라는 나라를 세워 왕을 자처하기까지 하였다. 진나라는 어리석은 2세 황제를 앞세운 환관 조고의 농단으로 충신과 용장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하여 국정이 마비된 상태였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대로 장함이라는 명장이 아직 남아있었다. 장함은 진나라의 혹법(酷法)으로 죄수가 된 사람들에게 공을 세우면 사면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인군(罪囚軍)을 조직하여 진승이 왕을 자칭한 지 6개월만에 난을 제압하였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항우와 유방 등 군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으며 결국 진제국이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승은 비록 빈농 출신이었지만 한 마디 말이 지닐 수 있는 천금의 무게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말 중 홍곡지지는 남다른 큰 뜻이나 기개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으며 왕후 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표현은 훗날 기존 질서를 뒤엎고자 하는 반란세력들의 캐치프레이즈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일패도지(一敗塗地) :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발하자 진나라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다. 유방이 살고 있던 패현(지금의 쉬저우시 부근)의 현령도 반란에 동참하기 위하여 서기인 소하와 옥리인 조참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소하와 조참은 현령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동네 건달들의 우두머리 격인 유방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현령은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 유방의 동서인 개백정 번쾌를 불러 유방의 의사를 타진하게 했다. 그러나 막상 유방이 100명 정도의 농민군을 이끌고 현성 앞에 나타나자 급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겁을 먹은 현령은 성문을 닫고 소하와 조참을 잡아 죽이려 했다. 몸을 빼서 도망간 소하와 조참이 유방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분노한 유방은 성내의 백성들에게 현령을 타도하자는 격문을 띄웠다. 유방의 격문에 동조한 백성들이 현청을 습격하여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유방 일행을 맞아들였다. 패현의 백성들이 유방에게 새로운 현령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유방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양하였다. “천하가 어지러운 상황이라 자신과 같이 부족한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한 번의 패배에도 시체가 되어 땅을 더럽힐 것(一敗塗地)이니 더 훌륭한 인물을 고르시오.” 이러한 유방의 사양에도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방을 패현(沛縣)의 현령으로 추대하였다. 유방이 못이기는 척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후 패공(沛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유방이 말한 일패도지란 한 번의 패배로 완전히 기세가 꺾여 재기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선즉제인(先則制人) : 유방이 패현에서 반란세력을 규합할 무렵 패현과 같이 과거 초나라 땅이었던 회계군(지금의 항저우시 부근)에서는 태수인 은통이 초나라 명문가의 자손으로 지역 토호 노릇을 하고 있던 항량과 반란을 모의했다. 은통은 항량에게 하늘이 진나라를 멸하고자 하는 지금이야 말로 선수를 쳐 상대를 제압(先則制人)할 기회라며 또다른 호걸인 환초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항량은 은통에게 조카인 항우가 환초의 거처를 알고 있으니 불러서 같이 의논하자고 하였다. 항량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항우는 항량이 눈짓을 하자 미리 모의했던 대로 은통의 목을 친 후 태수의 인수(印綬 : 병력동원 시 사용하는 관인을 묶은 끈)를 뺏아 항량에게 넘겼다. 항량과 항우는 군의 태수 지위를 이용해 군 아래 각 현의 정병 8천명을 확보함으로써 고작 현의 오합지졸을 모아 거병한 유방에 비해 훨씬 짜임새 있는 출발을 하게 되었다. 선즉제인의 말을 꺼냈던 것은 은통이었지만 항량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자신이 오히려 제압당하는 당사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