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황오제 시대
[머릿글]
인류가 지구 상의 지배 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요인은 결국 종적(縱的)인 정보의 집적을 가능하게 한 글과 횡적(橫的)인 정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한 말이 있었다고 본다. 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바벨탑의 붕괴 이래 수많은 말과 글이 지구 상에 생겨나고 없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인류의 역사를 동서양으로 크게 나누어 본다면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양사의 중심에는 로마제국과 그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있고 이에 대비되는 동양사의 중심에는 중국과 한자가 있다고 하겠다. 대륙의 중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어 온 한반도에서는 동시대 중국 왕조의 흥망에 따라 역사의 물줄기에서도 청류와 탁류가 번갈아 가며 소용돌이 치는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와 중국의 역사, 그리고 한문화(漢文化)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이해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독창성이나 우수성과는 별개로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말 중 외래어를 제외한 단어의 대부분은 한자이며 대화 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곤 하는 사자성어 역시 한자이다. 또한 몇 구절의 말로 핵심을 찌르는 함축성 있는 글귀 역시 그 출전은 중국의 고전들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렇게 한국어 어휘의 절반 이상이 한자로 된 상황이지만 한자로 된 단어나 고사성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다 보니 우리 사회 전반에서 문해력(文解力)의 저하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거나 사용하는 고사성어라 하더라도 이를 구성하고 있는 한자가 가진 본래의 의미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자의 뜻과는 별개로 그 유래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본질을 짚어 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중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정사와 야사를 포함한 많은 책들이 나와 있으며 책들 속에서 우리가 아는 고사성어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편린화(片鱗化) 되어 있어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시간이나 인물 위주가 아닌 고사성어나 어휘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배열한다면 그 의미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글에서는 ‘고사성어와 함께 보는 중국의 역사’라는 제목 그대로 삼황오제 시대로부터 청나라까지 이어진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한자로 된 단어나 고사성어, 그리고 글귀의 유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글의 구성은 중국의 역대 왕조별 흥망성쇠에 대한 약술에 이어 해당 왕조의 시대 속에서 특정 고사성어와 관련된 구체적 사건들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필자의 투박한 글이 독자들의 고사성어와 중국 역사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문자로 기록된 중국의 역사는 주나라(기원전 1040년 무렵) 때부터라 하겠으나, 우리에게 단군신화가 있듯이 중국인들에게는 삼황오제(三皇五帝)라 일컫는 신화의 시대가 존재한다. 삼황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천지를 창조한 복희씨(伏羲氏)와 여와씨(女媧氏), 그리고 농업의 신인 신농씨(神農氏)를 가리킨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인만큼 이 셋 외에 불을 발명한 수인씨(燧人氏) 또는 축융(祝融) 등이 삼황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삼황 이전에 반고(盤古)라는 거인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한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필생의 역작인 ‘사기(史記)’에서 오제 이전의 삼황은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황제(黃帝), 제 전욱(帝 顓顼), 제 곡(帝 嚳), 요(堯), 순(舜) 등 오제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이야기만을 골라 본기 중 첫번째인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엮었다고 한다. 오제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이 본격적인 국가 형태를 이루기 전인 씨족이나 부족 사회 시절의 설화들이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제의 마지막인 요순 시대를 거쳐 순임금으로부터 선양을 통해 왕위를 물려 받은 우임금에 의해 세습왕조인 하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황제(皇帝) :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한 글자 씩 따온 말로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새롭게 만든 칭호이다. 진시황 이전의 통일 왕조인 주나라에서는 천자라는 표현과 함께 최고 권력자의 공식적 칭호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주나라의 쇠락 이후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초나라를 비롯, 오나라와 월나라 등 중원에서 떨어진 지역의 제후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면서 왕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다. 전국 시대의 군웅들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하여 덕은 삼황에 버금가고 공은 오제를 능가한다(德兼三皇 功高五帝)는 의미로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선양(禪讓) : 오제의 한 사람인 요임금은 자신에게 친아들이 있었음에도 아들에게는 제왕의 덕과 자질이 없음을 깨닫고 두루 수소문하여 효자로 소문난 순을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는 형태로 양보(禪讓)했다. 이처럼 제왕이 죽기 전에 자신과 혈연관계는 없지만 백성을 다스릴 만한 덕을 갖춘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이 선양의 원래 의미였다. 이와 같이 좋은 의미의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후세에서는 역대 왕조의 교체기에 권력자가 허울만 남은 왕위를 빼앗는 찬탈의 핑계거리로 선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 의미에 빛이 바랜 단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선양의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삼국지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후한에서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선양의 형태로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이 대표적이다. 조비가 선양을 빙자한 찬탈로 세운 위나라 역시 조조의 손자 뻘인 원제 대에 이르러 중신인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진(晉)의 무제로 등극하면서 망하게 되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 하겠다.
불초(不肖) :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닮지 않았다는 뜻으로 맹자의 왕도정치에 관한 어록을 기록한 책인 ‘맹자(孟子)’ 중 ‘만장(萬章)’편의 글귀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는 여기서 천자는 하늘이 내는 것이나 요임금과 순임금의 아들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不肖) 덕이 부족하여 각각 순과 우에게 선양했다고 설명하였다. 중국 사서의 기록에서는 황제가 황태자를 폐위하고자 할 때 종종 불초함을 이유로 들곤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사용되곤 한다.
등루거제(登樓去梯) : 요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오제의 마지막 순임금은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요임금에게는 단주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덕과 재능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제위를 물려줄 현자를 수소문하고 있던 차에 주위에서 순을 천거했다. 순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살았는데 계모와 아버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해 효자로 소문이 자자한 상태였다. 요임금은 순에게 많은 살림살이와 함께 두 딸을 시집보내 순의 사람됨을 곁에서 살피게 했다. 비루한 인성의 소유자였던 순의 부모는 자식이 잘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순을 죽여 재산을 가로챈다는 음험한 생각을 했다. 순의 아버지는 순에게 비가 새는 지붕을 수리하라 하고는 순이 지붕에 올라가자 다리를 치워버리고는(登樓去梯) 집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이를 예상하고 있던 순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우산을 낙하산처럼 사용해 무사히 뛰어내렸다. 또 한번은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고는 우물에 돌을 넣어 죽이려 했으나, 순이 우물의 옆으로 파 둔 굴을 통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악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순이 전과 다름없이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자 그들도 더 이상은 순을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등루거제는 상대를 꾀어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한 후 내 몰라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복격양(鼓腹擊壤) : 요임금이 하루는 백성들의 삶을 살펴 보기 위하여 일종의 민정시찰에 나섰다. 요임금이 ‘강구’라는 번화가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의 가사는 임금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백성들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라의 법도에 따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백성들이 굳이 법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더라도 요임금의 다스림으로 인해 자연히 법질서를 지키게 된다는 의미로 요임금의 선정을 칭송하는 노래였다. 이를 듣고도 뭔가 아쉬웠던 요임금은 좀 더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한 노인이 길가에서 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주저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드리고(鼓腹)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면서(擊壤)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쉰다(日出而作 日入而息)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 먹으니(鑿井而飮 耕田而食) 임금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帝力干我何有哉).” 노인이 부르는 ‘격양가(擊壤歌)’를 들은 요임금은 비로소 만족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적인 정치는 민생을 살피는 일이 최우선이라 할 수 있다. 요임금의 백성들이 법과 질서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등 따시고 배불러서 노래하는 고복격양의 경지가 바로 고대의 정치가 지향하는 바였다 하겠다.
요순(堯舜)의 치(治) 또는 요순 시대(堯舜 時代) : 천년 신라나 각각 오백 년 전후까지 계속된 고려와 조선왕조에서 보듯 한반도에서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단일 왕조가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웃인 중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짧은 주기에 의한 분열과 통일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다소 불분명한 고대 국가 이후의 중국에서는 수명이 비교적 길었던 한나라가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220년까지 400년 넘게 이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통일 왕조의 수명은 길어야 삼백 년 이하에 불과했다. 통일 왕조의 멸망 후에는 천하가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전란이 계속되면서 힘 없는 백성들이 전쟁의 공포에서 신음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끊임없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정된 사회를 갈망하는 중국인들의 바램은 상대적으로 짧았던 평화의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좋았던 시기를 나타내는 말로 표현하곤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를 의미하는 요순 시대(堯舜 時代) 또는 그들의 다스림을 의미하는 요순의 치(堯舜의 治)라는 말이다. 이외에도 한나라 문제와 경제의 통치 시기를 의미하는 ‘문경(文景)의 치’, 당나라 태종의 치세를 기리는 ‘정관(貞觀)의 치’, 청나라 강희제에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로 이어지는 통치 시기를 의미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라는 표현 등이 모두 좋았던 시기에 대한 압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