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주〮 시대
오제의 마지막인 순임금이 선양의 형태로 치수(治水) 사업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인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가 시작되었다. 하나라의 우임금 또한 선양의 형태로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제후들이 우의 아들인 계(啓)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왕위의 세습이 자리잡게 되었다. 17대를 이어간 하나라는 걸왕(桀王)을 마지막으로 제후국의 하나인 은나라의 탕왕(湯王)에게 망했다. 하나라를 대체한 은나라는 30대 주왕(紂王)이 서쪽의 제후국이었던 주나라 무왕(武王)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멸망했다.
하나라와 그 뒤를 이은 은나라는 사서 속에서 단편적인 기록들만 보일 뿐 실재하였다는 데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신화 속의 국가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은나라의 경우 19세기말 대규모로 출토된 갑골문과 수도인 은허(殷墟)의 유적지 발굴 등 고고학적 증거가 뒷받침됨으로써 실존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나라의 경우에는 기원전 21세기경부터 기원전 17세기까지, 은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주나라 무왕에 의해 마지막 왕인 주왕이 왕위에서 쫓겨난 기원전 11세기까지를 실재하였던 기간으로 보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대체로 청동기 문화 시기에 해당하며 지역적으로는 현재 중국의 황하와 산동성 일원 및 그 주변 지역을 지배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요동반도를 통해 한반도와 소통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걸은주(夏桀殷紂) :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왕과 은나라 마지막 주왕은 폭군의 대명사로 둘을 묶어서 하걸은주(夏桀殷紂) 또는 걸주(桀紂)라고도 부른다. 하나라 걸왕의 경우 말희라는 미녀에게, 은나라 주왕의 경우에는 달기에게 빠져 향락을 즐기고 충신을 핍박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폭정을 일삼던 이들은 결국 제후의 한 사람에게 나라를 빼앗긴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에서 제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신하들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직간할 때 현재의 왕은 걸주와 매한가지의 폭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이와 함께 아예 쿠데타를 통해 제위를 빼앗고자 하는 이들이 타도의 대상인 왕의 무도함이 걸주에 비할 만하다는 주장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 :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걸왕은 전장의 포로로 사로잡은 애첩 말희를 총애해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빼어난 미모와 함께 당찬 여장부이기도 했던 말희는 자신의 부족을 망하게 한 걸왕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녀는 걸왕에게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우고 정원의 나무에는 고기를 널어 놓은 후(酒池肉林) 젊은 남녀가 그 안에서 나체로 쫓고 쫓기면서 고기와 술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자고 부추겼다. 그녀의 꼬임에 빠진 걸왕이 방탕한 생활을 위해 국사를 팽개치면서 결국 하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주지육림은 본래 하나라 걸왕이 말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며 훗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이 달기를 위해 다시 만들었다 하는데 걸왕과 주왕의 이러한 유사성이 하나라와 은나라 상호 역사 복제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기우(杞憂) : 하나라는 은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유민 생활을 거듭하면서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면서 나름의 계통을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주나라가 들어선 이후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한 때 중원을 지배했던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기(杞)라는 땅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멸망한 왕조의 후예이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직하게 이어가는 기나라 사람들을 동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석다(憂)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기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했다는 일화가 춘추전국 시대 도가의 사상가인 열자(列子)의 책에 실려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걱정한다는 기우라는 말의 유래이다.
상업(商業) : 은나라는 최초로 나라를 일으켰던 지역 일대의 이름인 ‘상(商)’을 따 상나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데 마지막 왕인 주왕은 주나라의 무왕과 목야라는 곳에서 나라의 운명을 건 일전을 벌여 결국 패하고 분신자살하면서 나라도 망하게 된다. 봉건제를 채택한 주나라에서는 주왕의 아들 녹보를 은나라 땅에 봉하여 은나라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녹보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한 후 상대적으로 좁고 척박한 땅으로 은나라의 유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버렸다. 고향 땅을 잃은 은나라 사람들은 농경에 적합치 않은 봉지를 버리고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그들 만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싼 곳에서 물건을 사들인 후 모자라는 곳으로 가 팔아 이익을 취하는 유통업을 주업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상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상업(商業)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상업을 하는 사람들을 ‘상인(商人)’이라고 불렀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 멸망한 은나라를 대체한 고대 국가로 왕실의 계통은 기원전 256년까지 이어졌다. 세력 범위는 황하 유역을 근거로 했던 은나라로부터 확장하여 양자강 일원까지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하는 양상이며 두 나라의 역사는 일정 부분 복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지만, 주나라는 봉건제(封建制 : 천자가 신하들에게 토지를 내려(封) 나라를 세우게(建) 한다는 의미로 주 왕실의 직할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개국 공신들이나 친족들을 제후로 봉하여 다스리게 하는 것을 말함) 라는 새로운 통치 시스템과 함께 차별화된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이전의 고대 국가와 달리 각종 문헌이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그 실재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주나라는 12대 왕인 유왕 11년(기원전 771년), 견융족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에서 낙읍(현재의 뤄양)으로 옮기게 되는 데 이 때를 기점으로 그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주 시대 이후 천하의 주인으로서의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눈에 띄게 약해져 ‘춘추오패(春秋五覇)’로 불리는 패자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나라는 주요 제후국들의 군주가 왕을 자처한 전국 시대 들어서는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다가 기원전 256년, 진(秦)나라의 소양왕에 의해 멸망했다.
혁명(革命) : 혁명에서 ‘혁(革)’은 한자로 가죽이라는 뜻 외에 ‘개혁(改革)’에서와 같이 사용되어 급격하게 바꾼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의 제왕들은 하늘의 명(命), 즉, 천명(天命)을 받은 자라 하여 천자(天子)라고도 칭하였는데 이러한 하늘의 명이 바뀌는 것을 혁명(革命)이라 하였다. 은나라 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은 은나라의 주왕이 덕이 없어 천명을 잃었으며 하늘이 자신에게 천명을 다시 내렸음을 왕조 교체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혁명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과 달리 힘에 의한 정권의 교체를 의미하며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곧 세습제 왕조의 성씨가 바뀐다는 뜻에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한다.
토포악발(吐哺握髮) : 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주공 단(周公 旦)은 무왕의 동생으로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성왕을 보좌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주공 단은 고대 정치 사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기도 해서 공자는 오랫동안 꿈속에서 주공을 만나 뵙지 못했다며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봉건제를 채택한 주나라에서 주공 단은 노나라 땅에 봉해졌는데 어린 왕을 보좌하는 섭정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아들인 백금을 대신 보내게 되었다. 주공 단은 임지로 떠나는 백금에게 자신은 손님이 찾아오면 머리를 감다가도 젖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握髮) 나가 맞았으며 식사 중에는 입에 든 것을 뱉고서(吐哺) 뛰어나가 맞이했다고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에게는 편히 밥 먹을 시간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는 현명한 인재의 영입이 절실함을 일깨워주는 당부였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으면서 비로소 촉나라가 삼국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데서 알 수 있듯 조직이나 국가의 명운이 걸린 승부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토포악발은 위정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유신(維新) : 사서삼경의 하나로 300여편의 시로 구성된 ‘시경(詩經)’은 주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시경은 주나라의 민요인 ‘국풍(國風)’, 주 왕실 행사음악의 가사인 ‘아(雅)’, 그리고 종묘의 주악인 ‘송(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 중에서도 주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을 기리는 '대아'는 주나라의 국가(國歌)에 버금가는 것으로 가사 중 ‘기명유신(其命維新)’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앞 구절의 ‘주수구방(周雖舊邦)’과 함께 씌어 주나라가 오제의 마지막인 순임금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나라(周雖舊邦)이지만 천명을 받은 것은 문왕 때이므로 아직 새롭다(其命維新)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유신이라는 말은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이 된 ‘메이지 유신’이나 우리나라의 ‘10월 유신’에서와 같이 사용되어 낡은 제도를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覆水不反盆) : 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운 강상(姜尙)은 책 읽기를 좋아하여 70세까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글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의 부인 마씨는 생업을 도외시한 남편에게 실망하여 집을 나가버리는데 이후 홀아비 신세가 된 강상은 글 공부와 낚시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무왕의 아버지 서백 창(西伯 昌)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면서 점을 보았는데 사냥을 나가서 잡게 되는 것이 짐승이 아니라 제왕을 보좌하는 인물일 것이라는 점괘를 받게 된다. 이후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곧은 바늘로 낚시를 하고 있던 강상을 만난 서백 창은 점괘에서 말하는 인물이 바로 강상을 의미함을 깨닫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강상은 이후 서백 창의 아들인 주 무왕을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하게 되고 제나라의 국군(國君)으로 봉해졌다. 강상의 출세 소식을 들은 전처 마씨 부인은 늙고 병든 모습으로 나타나 다시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강상은 물 한 그릇을 땅에 쏟아 버린 후 이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다면 그대를 받아 주겠노라고 말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覆水不反盆)라는 말의 유래이다.
중구난방(衆口難防) : 주나라 10대 왕인 주 여왕은 포악한데다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배들의 꼬임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재물을 탐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무도한 왕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여왕은 위나라 출신의 무당을 불렀다. 무당의 조언을 받은 여왕은 신하와 백성들을 감시하는 밀고 제도를 활성화하여 국정을 비난하는 자를 적발해 죽여 버리는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그 결과 신하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왕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잦아들게 되었다. 여왕은 본인에게 쓴 소리를 일삼던 중신의 한 사람인 소목공을 불러 본인의 정치력에 의해 백성들의 원성이 줄어 들었음을 자랑하였다. 주나라 개국공신의 후손인 소목공은 여왕에게 “대중의 입을 막는 것은 둑을 쌓아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衆口難防).”라 직언하였다. 즉, 물을 막아 놓기만 하면 언젠가는 제방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백성들의 입을 막는 것이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소목공의 충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정과 실정을 이어가던 여왕은 재위 31년인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 : 주나라 때 관직에 있던 사람이나 귀족계급을 통칭하는 말로 나라의 지배계층을 구성하였다. 이와 대비하여 평민계급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들의 반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구난방은 원래 대중의 정당한 요구는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근래에 와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이 마구잡이로 분출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공화(共和) : 대한민국의 헌법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한다. 여기서 ‘공화국(共和國)’이라 함은 왕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군주제 국가와 달리 시민권을 가진 개인들이 협의에 의하여 국가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하여 청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는 중국을 포함, 중국의 영향권에 있는 극동에서 제왕이 없는 정치체제란 생각할 수 없었다. 한중〮일〮 3국 중 메이지 유신에 의해 가장 먼저 근대화가 이루어진 일본은 서양에서 전래된 ‘Republic’이라는 정치체제에 대하여 적절한 번역을 고민하다가,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주나라의 왕좌가 비어 있던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공화(共和)’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서 착안하여 제왕이 없는 정치체제인 Republic을 공화라 번역하였다. 당시 주 여왕은 폭정을 일삼다가 국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실까지 쳐들어오자 왕위를 버리고 국외로 도망치고 태자는 중신인 소목공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왕좌는 비었지만 왕이 죽은 게 아니어서 태자가 즉위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후일 여왕의 사망이 확인되어 도피했던 태자가 주 선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신하들 중 덕망이 높았던 주정공과 소목공이 함께(共) 화합(和)해서 나라를 다스렸다해서 이 시기를 공화(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공화의 유래이나, 고대 중국에 대한 편년체 역사서인 ‘죽서기년(竹書紀年)’의 해석은 다르다. 죽서기년에서는 공백 화, 즉 ‘공(共)’이라는 나라의 ‘백(伯 : 작위의 하나)’인 ‘화(和)’라는 자가 주나라 왕위를 찬탈한 것이 그가 다스린 기간을 공화라 부르는 이유라고 본다.) 라고 일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