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로맨스] 끝나지 않는 키스 -상-

by Katie

[단편 로맨스] 끝나지 않는 키스 -상-



새벽이 깊어지자, 클럽의 문턱에서 술과 음악으로 달아올랐던 사람들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끌며 비틀거리는 여자들, 바닥에 주저앉아 “한 잔 더 하자!”고 외치는 남자들.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욕설과 웃음이 뒤섞여 골목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퀴퀴한 술 냄새와 매캐한 담배 연기, 밤새 방치된 전단지와 일회용 컵들이 까만 풍경을 흉물스럽게 어지럽혔다.


즐거운 사람도, 슬픈 사람도 섞인 기묘한 공기. 그 사이를 가르며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엘.’ 사람들은 그녀를 영어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한국이름을 잘 알려주지 않았다.

엘이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던 순간, 좁은 골목을 찢는 듯한 기계음이 들렸다.


‘위이이잉! 콰앙!’


거대한 쓰레기차가 나타나 육중한 덮개를 열어젖혔다. 안쪽의 쇠 벨트가 굉음을 내며 던져진 쓰레기봉투들을 무자비하게 짓이겨 삼켰다.


그 둔탁한 기계음과 회전하는 벨트를 보자마자 속이 뒤집혔다. 엘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쓴 위액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길 한복판에서 토하는 것 만은 간신히 참아냈다.


엘은 몇 걸음을 더 옮기다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설탕이 잔뜩 든 달디단 음료를 하나 집어 들고 서둘러 계산해 나왔다. 편의점 앞 작은 테이블에 앉자,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숨결에는 진한 술 냄새가 섞여 나왔다.

방금 전, 클럽의 어둠 속에서 엘은 낯선 백인 남자와 춤을 추다 말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짙은 갈색 머리, 회갈색 눈동자…. 엘은 그 사소한 조각들에 기대어, 그가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삼 년 전 미국에서 일주일 동안 함께 지냈던 남자—‘K’.


엘은 그에게 기대듯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남자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디제이의 음악이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중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 손의 감촉에만 집중했다—크고, 단단하고, 따뜻한. K의 손이 이랬다.


남자는 다시 엘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엘…’


어디선가 K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낯선 남자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You’re not K.”


엘은 거칠게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뱉었다.


“What the f—”


엘의 귀에는 그의 말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클럽의 음악조차 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았다. 남자가 화를 내며 무슨 말을 더 했지만,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엘은 등을 돌려 클럽을 빠져나와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를 한숨에 거의 다 비워냈다. 그런데도 K의 모습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삼 년 전 미국 어학연수를 갔을 때, 케이와 일주일을 함께 지내고 마지막 날 공항으로 떠나기 전 밤이 떠올랐다. 신비한 회갈색 눈동자, 얇고 곱슬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릴 때의 따뜻한 촉감. 거친 입맞춤 사이로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더듬던 순간들.


“넌 정말 날씬한 허리를 갖고 있구나. 손안에 다 들어오네?”


“한국에선 내가 그렇게 날씬한 건 아냐. 네 손이 너무 커서 그래.”


그는 허리를 감싼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아니야. 내 손에 꼭 맞아. 정말… 이대로 놓아주기 싫어.”


창백한 그의 피부는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나중에 나이 들면 배 나오고 두꺼워질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그땐 만질 게 더 많을 거야. 말캉말캉 부드러울 거야.”


그는 그녀의 허리와 등에 입을 맞추다, 이윽고 목을 따라 입술을 누볐다. 그녀는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감고 그의 품에 꼭 매달렸다.


“엘,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야.”


그러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고요하게 잠들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새어 나오는 밤의 끝자락, 그녀는 잠들지 못한 채 여명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며, 가슴속에 피어난 이 낯설고 두려운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남자와의 인연은 오늘 밤이면 끝난다. 어차피 환상에 휘말려 이성을 잃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평소처럼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눌렀다. 순간적으로 튀어오르는 감정들, 갑작스러운 환희와 두려움—그 모든 것은 아침이 되면 숙취처럼 가라앉고 사라질 것이다.


그 감정에 중독되지 않도록, 그 독기에 잠식되지 않도록, 그녀는 반드시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벌써 깼어?”


남자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완전히 깨지도 않았는데, 그녀에게 다가와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몇 시야?”


“새벽 네 시쯤?”


“아, 출근하기 싫다. 너랑 더 있고 싶은데.”


남자는 잠시 푸념하듯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다시 눕히며 말했다.


“더 자. 비행기 시간 여유 있잖아.”


“아냐, 어차피 비행기 안에서 잘 거야. 환승까지 하면 비행기 안에서만 스무 시간은 보내야 해.”


“그래… 여기서 한국은 멀지.”


“맞아. 멀지.”


“안 갔으면 좋겠다.”


그의 말과 함께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냥… 나랑 결혼할래? 위장결혼이라도. 나중에 원하면 이혼해 줄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미국에서 살라고?”


“아… 하긴 그렇지. 하하.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유행이 끝났나?”


“난 그런 드림 같은 거 없어.”


그녀가 긴 한숨을 들이쉬며 차분히 말했다.


“알아.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는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곧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엘, 내가 한국으로 갈게. 널 만나러.”


그녀는 그가 낮게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짓말.’


단 한 단어가 머릿속 깊숙이 울리자, 흔들리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한국에 오면… 또 같이 놀자.”


“꼭 약속했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해. 알았지?”


그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국에서도 밤새 이렇게 사랑해 줄 거야.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할 거야.”


“하하하. 그래, 그래.”


“내일 저녁 비행기지? 물류 창고 일 끝나고 곧바로 시애틀 공항으로 달려갈게. 공항에서, 지금처럼 뜨겁게 키스하며 보내줄게. 이렇게—”


그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푸른 새벽빛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자, 그녀의 심장은 이상할 만큼 빠르게 뛰었다. 왠지 불길했고, 머리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인상을 쓰는 그녀를 보면서 ‘넌 항상 생각이 참 많아.’라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이내, 그의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는 이제 출근할 시간이라며 아직 이른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생계를 위해 몸이 고된 물류 창고 같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의 삶이 한국에서 젊은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결국 삶은 어디든 똑같은 것이다. 어디가 천국이니, 지옥 같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삶이란 늘 반전과 예측 불허의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예찬했다.


그것이 바로 재미있는 소설과 같다고.


“이따 저녁에 공항에서 봐. 배웅해야지.”


그는 출근하기 전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갔다.


“나머지 키스는 공항에서 뜨겁게 해 줄게!”


그녀는 그가 그렇게 출근하자 홀로 그의 집에 남아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는 항상 삶을 동화처럼 꾸며서 말하지만, 푸른 하늘 아래로 스며드는 현실은 늘 그렇듯 따뜻하지도, 동화 같지도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애틀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엘은 생각했다. 그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이미 당부해 두었다. 해서 배웅 오지 않는 그에게 전화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긴… 뭘 기대한 거지… 하하.”


받지 않는 전화를 보며 엘은 혼자 피식 웃었다.

외국 땅, 클럽에서 만나 술 마시고 춤추다 눈이 맞아 잠자리를 함께한 남자에게 뭘 더 기대한단 말인가. 일주일 동안 그와 보낸 시간은 분명 즐거웠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게이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려 탑승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엘!"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파 속에서 땀에 흠뻑 젖은 긴 갈색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만이 멈춰 서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