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로맨스] 끝나지 않는 키스 -하-

by Katie

[단편 로맨스] 끝나지 않는 키스 -하-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마치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그녀가 놀라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부축한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그저 땀이 식어서겠거니 하며 그를 꽉 붙잡았다.


"하아… 트럭이 고장 나서, 널 놓칠까 봐 미친 듯이 달려왔어."

"전화는?"

"차에 두고 내렸어. 급했거든."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그녀가 말없이 시선을 떨구자,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그냥 즐기고 마는 놈인 줄 알았어?"


그녀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연민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엘, 한국에서 누굴 만나든 상관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줘."

그는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지난 일주일, 우리 정말 행복했잖아.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 그러니까 너도… 잊으면 안 돼. 알았지?"


그는 마치 자비로운 신처럼, 혹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 다정해서, 그녀는 순간 '나도…'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 말을 뱉으면 정말로 그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이제 가야 해."


그녀가 탈 비행기의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그래. 보내줄게."


그가 순순히 물러섰다.


"돈 모아서 꼭 널 만나러 한국으로 갈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대신 꿈에서 자주 만나자. 그러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어제 본 사람처럼 낯설지 않을 거야."


그는 작가 지망생답게, 마지막 순간까지 소설 같은 대사를 읊었다. 언제나 그렇게 현실감이 없던 남자. 그래서 더 꿈결 같던 사람.


"잘 있어."


그녀가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하려는 순간,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엘."


그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 품에서 굳어버렸다.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있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 난…"


"괜찮아. 지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뺨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냥 기억만 해 줘. 내가 7일 동안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의 회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양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입을 맞출 것이라 생각했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하지만 입술은 닿지 않았다.


"자, 이제 가. 다시 만나면… 그땐 진짜로 키스해 줄게."


그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입술은, 한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하얗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 메마른 입술에 닿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그가 이미 뒷걸음질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헐렁한 후디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 손 키스를 날리며 인파 속으로 멀어졌다. 마치 연기처럼,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그는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를 보내고 미국을 떠났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표류했다.



남들처럼 취업하고, 친구의 소개로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인생 계획을 가진 남자와 연애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이방인임을 확인할 뿐이었다.


‘평범함’조차 갖지 못했다는 비난과 함께 현실의 연애가 끝났을 때,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3년 전의 그 남자였다.


부드럽게 빛나던 갈색 곱슬머리, 속을 알 수 없는 신비한 회갈색 눈동자. 그와 첫 만남에 엘은 그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단 7일. 평생 태워야 할 열정을 모두 쏟아 버린 것 같았던 시간. 그저 잠시 이성을 놓아버린 일탈이었을까.

그렇게까지 뜨거웠던 적이, 내 생에 있었던가.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차마 ‘사랑’이라 부르지 못했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거칠었고, 욕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애틋했다.


그러나 꿈은 깨어졌고, 현실은 계속된다.


편의점 앞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생각들을 꾹 눌러 담고 나니, 어느새 거리에 아침이 오고 있었다.

푸른 새벽빛이 취객들의 토사물과 쓰레기로 얼룩진 거리에 한 폭의 그림처럼 번져갔다.


이제 아침이다. 밤새 비틀거렸던 이들도 하나 둘 해장국집으로 사라지거나 각자의 현실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쌀쌀한 공기에 손은 차갑게 식고, 희미한 입김이 흩어졌다. 폐부 깊숙이 찬 공기를 들이마시자, 지독했던 술기운도 서서히 달아났다.


청소부들이 나타나 밤새 버려진 욕망의 흔적들을 말끔히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꿈꾸지 않는 현실로—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택시를 잡아탔다. 익숙한 골목에 내려 터덜터덜 걸어 외로운 원룸으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자마자 현관 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어젯밤 외출 때 끄지 않은 보일러 덕분에 방바닥은 따뜻했다. 가스비 고지서가 스치듯 걱정됐지만, 몸을 감싸는 그 온기가 너무 좋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 키스.


그와 끝내 하지 못했던, 마지막 그 한 번의 키스. 그것이 숨이 막힐 만큼 간절해졌다.


“날 만나러 온다면서… 거짓말쟁이.”


따뜻한 바닥에 몸을 누이자, 뼛속까지 시렸던 한기가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며 정신이 느슨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그 느릿한 무의식의 끝에서, 그녀는 마치 바닥 아래, 또 다른 세계의 경계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안녕. 많이 피곤했나 봐? 밤새워 놀고 온 거야?”


그녀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당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엘?”

“당신… 어, 어떻게.”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3년 전처럼 부스스한 갈색 곱슬머리에 후줄근한 후드티, 회색이 도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회갈색 눈동자,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소년 같은 미소. 모든 것이 변함없었다.


“어떻게는. 당신, 여전히 덜렁거리더라. 문도 열려 있고… 근처에 잠깐 나간 줄 알았지. 그런데 아침에 돌아오다니, 나 밤새 기다렸잖아요.”


그녀는 문득, 예전에도 종종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오토락이 잠기지 않았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도둑이 들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웠다.


“이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어?”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을 수 있지. 내가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야.”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느긋하고, 장난스럽고, 여전히 다정했다.


“어때? 원하는 삶을 살고 있어?”

“아니.”

“원하는 게 뭔지는 찾았어?”

“아직.”

“여전하네. 아직도 헤매고 있었구나. 하지만 뭐 그것도 괜찮지.”


남자는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연민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런 그를 흘겨보았다.


“그건 모두 당신 탓이야.”

“왜?”

“당신이 날… 이상하게 만들어버렸잖아.”


남자는 잠시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면 좀 어때. 적어도 남들 흉내 내며 억지로 살진 않았잖아.”

“응, 안 그랬어.”

“그럼 된 거야. 넌 갇힌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니까. 그렇지?”


남자는 아이를 달래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제야 찾아온 거야? 내가 이미 다른 남자랑 결혼했으면 어쩌려고.”

“음… 당신이 다른 사람과 행복하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 날 쉽게 잊을 리가 없거든.”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그 자신감이 왠지 얄미워 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내가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야. 그건 확신이 아니라… 기도였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잠들었을 때, 난 늘 속삭였어. 나 말고는 절대 행복하지 말라고. 날 잊지 말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지.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히도록.”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깨어 있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면 꼭 인상을 찌푸렸잖아.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 말에 그녀는,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그건… 저주 아냐?”

“당신 입장에선 그럴지도. 하지만—그걸 풀어주러 이렇게 왔잖아.”

“어떻게… 저주가 풀리는데?”

“기억 안 나? 마지막 키스.”


남자의 회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푸른 아침의 빛을 머금었다.

그때처럼—그의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그 일주일 동안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했잖아. 다시 만나면… 입술에 키스해 준다고. 이렇게—”


그의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덮었다.

그 순간, 시간의 결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시, 삼 년 전 그날의 어둠 속으로. 클럽의 붉은 조명 아래, 흔들리는 인파 틈에서 시선이 얽혔다. 같은 리듬, 같은 숨결, 같은 혼란. 그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전율이 일었고, 세상은 흐릿해졌다. 그녀는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낡은 트럭의 시동,

바퀴가 물웅덩이를 가르며 튀던 빗물,

그가 열어 준 낡은 아파트 문.

그의 침대 위, 처음 입을 맞추던 그 순간으로,


“만약 내가 그때... 미국에 남았다면, 우린 행복했을까?”


그녀는 울먹이듯, 목이 메어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엘, 생각은 그만해. 이미 벌어진 일에 ‘만약’은 없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우린 그저, 그 순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미쳤을 뿐이야. 후회하지 마.”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거칠고 메마른 입술이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덮쳤고, 이내 목과 어깨로 내려와 몇 번이고 파고들었다.


하지만 살결에 닿는 그 차가운 감촉은,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깊은 늪에서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 서늘하고 건조한 촉감이 그녀를 현실로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린 그 7일 동안 충분히 행복했어. 그게 우리가 선택한 과거야. 그러니까 우린…….”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때, 핸드폰 알람 소리에 그녀의 눈이 떠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태양은 이미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벌써 12시가 되었다.


그녀는 꿈에 깨어났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의 육신은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올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시애틀 공항으로 오려던 그는, 새벽 근무 중이던 자동화 물류 라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매번 공항에서 그를 만나는 꿈을 꾼다.


공항에서도, 클럽에서도, 그리고 그녀의 방 안에서도. 그는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오곤 했다. 꿈에서조차 두 다리로 걷는 것이 힘에 겨운 듯,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작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빛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쓰레기 트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위잉, 위잉—’


익숙한 기계음을 내며 트럭이 쓰레기를 삼키고, 작업원들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 소음 속에서, 더 이상 그의 고통을 끄집어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본래 삶의 비극보다는, 찰나의 환희를 더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고단한 삶 속에서도 늘 낭만을 노래하던 그를, 아픈 기억으로만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에게, 꿈에서조차 하지 못한 말이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자꾸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말했듯, 그는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허공을 향해,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다음 꿈에서 당신을 만나면 꼭 말해줄게."


…당신을 사랑해,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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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잘못 업로드해서 다시 올립니다. ^^;;

예전에 썼던 스토리들은 다듬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치고 고쳐서 참 완성하기 어렵네요.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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