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로맨스] 압생트(Absinthe) -상

by Katie

[단편 모음] 압생트(Absinthe)-상


서윤은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뜨고 낯선 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누운 남자의 팔이 허리를 감고 있었지만, 그 온기는 이미 식어 있었다.

서윤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의자 위에 단정히 개어 있는 남자의 정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누구의 품에 있었는지 되짚어본다.

그제야 자신이 타인의 집에서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이 낯선 남자의 품에서는 강한 향수와 그의 집에서 마신 독한 ‘압생트’ 술 향이 났다.


새벽 하늘의 회색빛 아래, 도시의 희미한 불빛이 낯선 방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에 헤어진 연인을 떠올렸다.

그녀의 숨결과 뒤섞여 하나의 리듬이 되던, 귓가에서 심장을 울리던 그 사람.

부드러운 샴푸향과 남자 스킨향이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던 그 사람.


그의 몸이 그녀의 몸에 겹쳐질 때 모든 불안이 사라졌고, 황홀함 속에서 영원을 믿었다.

그들의 10년이라는 연애 기간 서윤에겐 순간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모든 열정이 식어 버릴 만큼 긴 시간이었나 보다.


서윤은 늘 그의 품에서 영감을 얻고, 그와의 사랑에 취한 채 캔버스에 그림을 채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작업실의 작은 침대에서 그녀의 몸을 그에게 기대었을 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늘 자신을 향해 있던 그의 몸이 차갑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자기야.”


그녀가 부르자 그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서윤아. 난 널 이제 사랑하지 않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아직도 그를 향한 갈망과 욕망이 이렇게 가득한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니?

그가 아니면 그녀는 캔버스에 아무것도 그릴 수도 없는데…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윤을 떠났다.

그렇게 그 사람이 떠난 작업실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차가운 무덤이 되었다.


‘설마 그이가 이미 다른 여자랑 자고 있는 걸까?’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순간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왈칵 차오르자, 꾹 참았다.

그리고, 그대로 작업실을 뛰쳐나와 어두운 길거리로 달려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을 때리는 처음 와본 바(bar)에 앉아 혼자서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서글서글한 인상이었지만, 서윤은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대답하며 넘기려 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잘 정돈된 양복 차림에 매너도 있었고,
서윤의 손에 묻은 물감을 보고 그녀가 화가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그림에 관심이 많다며 최근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여러 점 샀다고했다.
그러나 서윤은 그 말이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빈말이라고 생각했다.


서윤의 시큰둥한 반응을 눈치챈 남자는 더 이상 미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풀었고, 그제야 서윤은 조금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가 바 위에 놓인 작은 잔을 밀어왔다. 연한 초록빛 액체가 투명한 잔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압생트예요. 고흐도 좋아하던 술이잖아요.

독하지만, 취하고 나면 뭔가 보인다고들 하죠. ”


“뭐가 보여요?”


“음… 귀신이나, 아니면 뭔가 신묘한 것?”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서윤은 또 시시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압생트의 초록빛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천천히 입술에 가져갔다. 영록한 빛이 잔에서 흔들리며 그녀의 입술을 적시고,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혀끝에 닿는 순간 찌릿한 감각이 퍼졌다. 민트도 약초도 아닌, 독한 풋내가 목을 거칠게 지나갔다.

그녀는 순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남자는 서윤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한잔을

더 시켜 그녀에게 건넸다.


서윤은 이미 취기가 깊게 올라 자신이 얼마나 취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남자가 건넨 잔을 또 받아 마셨고, 초록빛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갈수록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주변의 소음은 멀어지고, 대신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 좋은 어지러움만 남았다.


그녀는 이유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서윤의 얼굴을 따라 움직였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손끝이 닿자, 서윤은 숨을 고르는 듯 눈을 깜빡였다.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서윤은 금방 알아차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술기운에 몸의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했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저항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래 비어 있던 감정의 틈으로 누군가가 스며드는 것을 허락한 채, 흐릿한 의식 속에서 그 낯선 남자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이건 복수야. 날 버린 그 사람에게…’


서윤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점점 진하게 키스를 하며 , 그녀의 흐트러진 마음은 점점 더 흔들렸다.
그의 집요한 접근에 서윤은 더 이상 마음을 붙잡아둘 힘조차 남지 않았다. 키스와 술기운에 취해버린 서윤은 이제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 버렸다. 그때 남자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우리집에 더 좋은 술이 있어. 우리 집에서 마실래?"


사실 서윤은 자신의 그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대답한 것 같긴 한데 어느 순간부터 서윤은 기억이 뚝 끊어져버렸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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