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로맨스] 압생트(Absinthe) -하

by Katie

[단편 모음] 압생트(Absinthe) - 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꿈속에 있었다. 꿈에서는 자신을 떠난 연인이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고, 그녀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 후 그녀는 남자의 팔에 안겨 물었다.


"왜 떠났어?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연인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건 네 잘못이야. 내가 아니라."


서윤은 그의 말에 인상을 쓰면서 원망하듯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떠나지 말았어야지. 자기도 알잖아.

난 당신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도 없어. 당신이 필요해."


서윤의 투정에 남자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가 속삭이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넌 더이상 내가 필요 없어."


그 말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순간, 서윤이 깨어났다. 낯선 침대, 낯선 천장.

그녀의 머리 속까지 찌르는 두통이 신음소리를 터뜨리게 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각난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술집을 빠져나와 그와 택시에 탈 때부터 서윤은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서윤에게 그 남자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무슨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한 순간, '어디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나?'하는 의심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취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꽤 좋은 아파트 앞에 택시가 멈춰섰다. 서윤은 남자가 이끄는 대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이어지는 그의 손길에 저항할 틈도 없이 몸을 맡겼다.


그녀의 머릿 속은 흐릿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오래된 공허가 꿈틀거렸다.

그와 입을 맞추며 떠난 사람의 얼굴을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입술 앞에서 그 얼굴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남자의 뜨거운 열기와 취기가 뒤섞이면서, 서윤은 더 이상 이성을 붙잡아둘 힘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섰다.

새벽빛이 도시 위로 번지고 있었고, 그제야 모든 것이 떠올랐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순간 엄청난 갈증이 몰려왔다.

서윤은 대충 윗옷을 집어 입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불꺼 진 거실을 지나다가, 갑자기 시선이 거실 통창으로 쏠렸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 한강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전망 좋은 고급 아파트의 통창을 통해, 서울의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서윤은 그 풍경을 보며 한 번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새벽부터 움직이는 도로 위의 차들.

나무들이 서 있는 공원 뒤에 흐르고 있는 한강의 물빛,

마치 회색과 푸른색과 초록빛이 섞여있는 청록색의 강물.

그 위로 봉긋이 솟아난 빌딩 숲과 작은 산의 초록빛 능선.

아직 이른 태양의 빛이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밝혀내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압생트."


순간, ‘작업실에 돌아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윤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발끝으로 조심히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조용히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 때 자동 도어락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대로 집을 빠져나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윤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어둑한 새벽의 텅 빈 도시 거리에서, 그녀는 다시 홀로 거리를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하룻밤 치기 어린 행동에 잠깐 수치심이 들긴 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 감정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런 생각에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빨리가서 그림을 그려야 해.”


서윤은 택시를 타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랜 연인이 떠난 텅 비어버린 공간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섰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스케치 되어 있었다.

분노일까, 미련일까, 아니면 몸이 기억하는 욕망일까?


서윤이 붓을 들더니 그 얼굴을 물감으로 덮어 버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사랑인지, 추억인지, 욕망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정의 파편들을 캔버스에 쏟아냈다.


연인을 처음 만났던 날의 설렘은 레몬 옐로우로,

그의 품에서 느꼈던 안정감은 짙은 울트라 마린으로,

그와 뜨겁게 뒤엉겼던 밤의 열기는 격렬한 카드뮴 레드로.

연인의 냉정한 마지막 말은 심장에 구멍이 난 듯한

페인즈 그레이로 캔버스를 뒤덮었다.


붓질은 거침없었고, 물감은 캔버스에 자유롭게 퍼져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아직 어두운 새벽일 때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서 늦은 오후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붓을 멈추고 그림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화려하고 어지러운 색채들이 어느새 남자가 아닌 여인의 형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의 육체에는 황홀경과 절망, 쾌락과 공허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림 속의 여인에게 물었다.


‘그 이를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룻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던 격렬한 뒤엉킴은 사랑이 아닌 걸까?‘


그 남자의 품에 안겨있을 때도, 꿈속에서 그녀의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도

서윤에게는 모두 똑같은 희열과 전율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과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꼭 그이랑 나눠야만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


생각해보면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서윤은 늘 불안했다.

시간이 쌓여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사랑해 달라'는 말로 그 불안을 겨우 붙들었다.


어릴 때부터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에 적응하며 점점 서윤과 괴리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반면 서윤은 여전히 작업실에서 물감 범벅이 된 채 밤을 지새웠다. 전시회에 참여해 몇 점을 팔긴 했지만 미래를 확신할 만큼은 아니었고, 그래서 서윤의 오랜 연인은 “이제는 결혼하고 정착하자”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서윤은 대답 대신, 연인의 품에 안겨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자극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해달라고 아이처럼 졸랐다. 그와 육체가 하나가 되고, 품 안에서 신선한 전율과 환희가 밀려왔다.

그렇게 그와의 섹스가 끝나면 그녀는 곧장 그림을 그리러 달려갔고, 알몸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는 그녀를 씁쓸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느 새벽,

남자친구가 출근 준비를 하다 멈춰 서서 물감 범벅인 채로 속옷 차림으로 캔버스 앞에 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밤새워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와의 이별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그 전부터일것이다.


“서윤아, 난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너도 마찬가지야.

넌 날 사랑하지 않아.”


그의 말은 어쩌면 맞았는지도 모른다.

서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여전히 미완성 된 그림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연인과 헤어지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도 자신이 창조한 그림과 혼란스러운 색채에

매료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랑, 욕망, 그리움, 집착…


이 그림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잔해, 열병 같았던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열기’에 중독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감을 덧칠하는 행위는 희열이었고, 실패한 그림을 나이프로 긁어내는 고통조차 즐거움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신나는 놀이였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처럼,

그녀는 캔버스 위에서 정신없이 놀았고 시간도 잊었다.


반면 서윤의 연인은 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빠처럼 그녀의 놀이가 끝나기를 지루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난 이 순간 슬픈 게 아니라 이렇게 즐거운 거야."


서윤은 캔버스 옆 거울 속, 물감 범벅으로 웃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녀 안의 모든 감정이 캔버스 위에서 뒤엉키며 새로운 색과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캔버스 위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대체 그곳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색을 채우지?”


서윤의 붓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하려면 뭔가 더 필요했다.

서윤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이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영감을 줄, 이 열기와 욕망을 함께 쏟아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띠링.’


바로 그때였다.


작업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어젯밤 바에서 만났던 남자의 번호였다.

서윤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 다시 캔버스로 시선을 가져갔다.


‘띠링’

‘띠링’

‘띠링’


문자가 계속 들어와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직 침대가 따뜻해. 당신 몸에서 나던 유화 물감 냄새가 침대에도 묻은 것 같아.]


[난 아직 당신을 더 안고 싶은데, 하룻밤으로 끝낼 거야?]


시시한 플러팅 메세지들은 넘기려던 순간, 마지막 문자를 본 서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당신의 캔버스는 다 채워졌어?]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춘 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서늘한 칼날처럼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이 낯선 남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정말 화가에 대해 아는 사람일까?’


캔버스 위에서 뒤엉키던 감정들이 다시 요동쳤다.

하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


지난 10년 동안 애인과의 달콤한 사랑만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존재가 새로운 곳으로 안내해 줄 수도 있다.
마치 사신처럼.


어디선가 어젯밤 남자에게서 풍기던 압생트의 향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서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캔버스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물감 범벅의 얼굴.

그리고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낮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이 기억한 것보다 더 깊고 어른스러운 목소리였다.


“안녕, 잘 잤어요? 화가님.”


서윤은 붓을 쥔 채, 그림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녕, 미스터 압생트.”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압생트처럼 위험하게 빛나는 연두색

독을 머금은 샤르트뢰즈를 나이프에 묻혔다.

팔레트 위에서 초록빛이 번져나갔고, 그녀는 그 색을 마지막 빈 공간에 거침없이 채워 넣었다.


그 초록빛은 구원인지, 파멸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색이었다.


-The end


-------------------------------------------------------------------

여러분의 사랑과 이별은 어떤 색 인가요?

사랑과 이별은 어떤 색일까 생각하다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

상,하 같이 읽어주세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03화[단편 로맨스] 압생트(Absinthe)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