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로맨스] 폭우: 상(上) [연희편]
어두운 밤,
마른하늘을 찢는 섬광과 함께 밤이 울었다.
뒤이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장대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세던지 마치 누군가가 밖에서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결국 잠을 설친 연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빗소리가 너무 거세 이대로 다시 잠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아….'
새벽 3시.
침대 맡에 던져두었던 폰을 들어 의미 없이 유튜브 영상을 뒤적였다.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만 더욱 또렷해졌다.
그 순간, 창밖이 대낮처럼 환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찔렀다. 연희는 폰에서 시선을 떼고 잠시 희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꽈과광!"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창밖이 다시 한번 희게 타올랐다. 저 통제 불가능한 섬광은 마치 우영의 예측 불가능한 열기를 닮아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안온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불안함에 숨 막히기도 했다. 그 이중적인 감각이 떠오르자, 연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문득 폰 사진첩을 열었다.
"나도 참, 아직도 그 사람을 생각하다니.."
그리고 오래된 사진 한 장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최우영…."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거짓말처럼 그의 체온이 느껴질 듯 생생한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우영은 연희의 집에서 잠들 때면, 자다가 깨어 다시 잠들 때까지 그녀에게 바싹 달라붙어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슬며시 옷 속으로 파고든 손이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을 매만졌다.
"아, 자기, 뭐야. 잠자다 말고."
"이렇게 하면 다시 잠이 잘 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안심이 된다고 할까?하하하."
그의 나지막한 타박은 언제나 더 깊은 스킨십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하고 다정한데, 그녀를 탐하는 몸짓은 거칠고 뜨거웠다. 그 이중적인 열기 속에서 그녀는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잊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정말이야."
흥분으로 달아오른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뜨겁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목소리의 울림 속에서 사랑의 환희로 부서져 내렸다.
연희는 그의 품 안에 있을 때 가장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이보다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
이보다 완벽한 연인이 있을까?
이렇게 항상, 그와 함께일 것이라 믿었다.
"우영씨, 내가 더 사랑해."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고,
서로 피부만 닿아도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이 짜릿하고
서로의 품 안에서 마치 원래의 하나인 몸처럼 서로에게 매달려 환희에 이른다.
"사랑해."
그의 목소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낮은 음역대의 현악기 소리 같았다. 침대 위에서만은 아니었다.
둘만 있을 때면 그는 세상 가장 유쾌한 이야기꾼이 되었다. 낡은 영화의 대사를 흉내 내며 그녀를 웃겼고, 그녀가 끓여준 보잘것없는 라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양 먹어주었다.
이 방 안에서,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연희는 믿었다. 이 완벽한 세계가 조금씩 확장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완벽하다고 믿었던 사랑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뜨거운 열정과, 따뜻한 품에 길들여질 때 쯤 점점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희에게 둘만 바라보던 시간들이 반복되어 갈수록 우영이 제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도 않고 항상 집에만 있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영은 밖을 두려워했고, 연희는 자신의 완벽한 연인과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연희의 세상은 창밖의 수많은 길 위에 있었지만,
우영의 세상은 오직 이 방, 침대 위에서만 완전했다.
바깥세상을 병적으로 꺼리는 그를 조르고 졸라 나선 거리에서, 그는 마치 전장의 한복판에 선 병사처럼 굳어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행인의 어깨라도 닿을세라 연희를 제 안쪽으로 끌어당겼고, 자동차 경적 소리에는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쳐다봤다. 잡은 손에서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괜찮아?" 연희의 물음에 그는 그저 마른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날들이 포개지고 쌓여, 결국 무너져 내린 밤이 있었다.
연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유난히 우울하고 슬프던 날이었다. 그녀는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 정말 당신이랑 이런 식으로 논쟁하는 거 지긋지긋해.
우리 애인이라고 해도 같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섹스 말고 뭐가 있어?"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뜨거워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애원이 아니었다.
"결국 우린 섹스파트너랑 다를 게 뭐야! 나도 남들처럼! 자기랑 밖에서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냥 평범하게 걷고 싶다고! 그게 그렇게 큰 부탁이야? 날 위해서 제발... 제발 한 걸음만 더 나가주면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에서 절규로, 다시 울먹임으로 부서져 내렸다.
평소 같았다면, 그는 그녀를 먼저 끌어안고 미안하다며 어르고 달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는 연희를 끌어안는 대신,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얼굴에 깊은 무력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연희야."
그는 고개를 들어 힘겹게 그녀를 마주했다.
"나는 너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서로를 끌어안고 붙어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 그것 말고는 너에게 바라는 게 없어.
너랑 함께 있는 것이 나한텐 가장 완벽하고 가장 행복한데..."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너에게는... 그게 부족하구나."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나한텐 너에게 줄 것이 이것뿐인데.
널 사랑하는 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전부인데..."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났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어두운 방엔 창밖의 빗소리만 가득했다.
"그것이 너에게 부족하다면 나는 네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연희야. 우리는 정말 여기까지인가 보다."
다른 때라면 그가 연희를 어떻게든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그도 매우 지쳤던 날이었던 것 같았다. 우영은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자신의 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옷을 챙겨 입는 동안, 연희는 고집스럽게 얼굴을 굳힌 채 그를 보지 않았다.
우영이 신발을 신는 사이, 연희는 침대 위에 그냥 앉아 있었다.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을 때, 연희는 겨우 한 음절을 내뱉었다.
"우영..."
그는 잠깐 멈춰섰다. 마치 자신의 이름이 들리길 기다렸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띠리릭, 찰칵'
그가 문을 닫는 소리.
그때서야 연희는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계단 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연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후회를 되씹었다.
'쾅!'
단 한 번의 낙뢰가 길었던 기억의 필름을 끊어버렸다. 환희와 고통은 함께 재가 되어 흩어지고, 연희는 다시 차갑고 외로운 새벽 3시의 방으로 내던져졌다.
그날 이후,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2년은 정말 힘들었다. 그를 만날 것 같은 거리가 있었고,
비슷한 목소리를 들으면 뒤돌아봤다.
하지만 5년째쯤, 그런 충동도 사라졌다.
대신 매년 비 오는 밤, 같은 시간에 깬다는 것만 남았다.
그동안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 조건 좋은 남자들도 많았다.
그 중 한 명은—이름이 준호였던가, 민준이었던가—자신도 이해한다고, 그런 후회와 괴로움을 겪어봤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늘 자신이 상처 입은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연희를 안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연희는 속으로 빌었다. 이 어리석은 후회가 여기서 끝나게 해달라고. 다가올 사랑만은 망치지 않게 해달라고.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엔 우린 잘될 수 있을거야."
그가 속삭였을 때, 연희도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들은 함께 밖에도 나갔다. 영화관에 가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함께 밤을 보낼 때, 그의 품에 누워 있을 때, 연희는 자꾸 다른 누군가의 심장소리를 찾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가 묻곤 했다. 연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목에 닿을 때, 그것은 다른 입술의 기억으로 번져나갔다. 그의 손이 자신의 팔을 안을 때, 그곳엔 이미 누군가 다른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뭔가... 자꾸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한 번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미소지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연희가 아파하는 것을 아파하는 표정으로.
"괜찮아요. 시간이 필요한 거죠."
결국 그도 떠났다. 연희는 그가 떠날 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우영을 놓아버릴 때처럼. 그가 가진 것이 자신에게 부족한 게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주었던 것이 너무 커서 더는 아무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연희는 다시는 그 누구와도 그 시절만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었다.
우영의 품에서 느꼈던 충만하고 황홀한 절정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야, 어리석은 20대의 연희가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감의 무게를 몰랐다. 남들 눈에 비치는 평범한 데이트, 그 하찮은 과시욕이 뭐라고.
그 완벽했던 세계를 제 손으로 부숴버렸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행복하고 충만했는데, 왜 자신은 그 작은 차이 하나에 집착해서 그를 놓아버렸을까?
10년째,
창밖에서는 10년 전 우영이 떠난 그날처럼, 끝을 모를 비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가장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잃어버린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연희는 그의 사진이 띄워진 폰 화면을 말없이 껐다. 검게 변한 화면 위로, 텅 빈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서른아홉의 연희.
이제는 우영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마를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내리고 있었다.
10년 전과 정확히 같은 소리로.
연희는 비오는 풍경을 보다 그녀의 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 사람의 SNS든 연락처든 다시 찾아보려고 했다가 다시 내려왔다.
'다 부질없어...'
새벽 4시 30분.
"나도 참..."
그녀는 창에 이마를 기댔다. 유리는 차갑고 축축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이 밤이 끝나면, 내일도 평범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직장에 가고, 밥을 먹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겠지.
하지만 이렇게 비내리는 날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희 역시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세차게 창을 때리는 빗소리.
그녀의 기도에 돌아오는 것은 늘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었다.
다시 사랑할 힘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내일을 견디고, 그 다음날을 견디고,
비 오는 밤마다 깨어나 이 같은 시간을 반복할 뿐이었다.
방 안의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바로 이 밤, 바로 이 시간,
어딘가 먼 땅에서 누군가도
같은 빗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