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로맨스] 폭우: 중(中) [우영편]

by Katie

[단편로맨스] 폭우: 중(中) [우영편] -


[ 연희야. 사실은 말야.

그날 이후 너에게 몇 번이나 다시 연락하려 했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 안의 상처를 너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래서 말해주려고 했었지.


그러나,

너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심장 소리를 들을 때면

그 온기 속에서는 모든 게 사라졌어.


그냥 이대로 네가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조르면 나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가 보려 했지.

너와 손을 잡고 걸으면,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사라질 거라 믿었어.


하지만, 결국 소용없는 짓이었어.

거리를 걸을 때, 낯선 이들과 지나칠 때 마다

밀려드는 실체없는 공포를...

너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어.


상담도 받고 약도 먹으며 버텨보려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

나는 매번 현실이 무서워질 때마다

너에게로 달려갔지.


너의 사랑스러운 육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뜨거운 열기 속에서 하나가 될 때면,

나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너는 불안해하며 나를 재촉했지.

나의 사랑을 더 증명해달라고.

사실 그렇게 조르는 모습조차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나는 또 너에게 입 맞추고 안아주며

널 달래려고 했었지.


홀로 있을 때면 현실 감각은 희미해지고,

귀 안에서는 소리가 울리고,

머릿속 망상들은 끝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그런 밤이면 죽을 것 같았거든.


네가 말을 걸어주고, 다가와주고,

나의 연인이 되어준 덕분에,

나는 겨우 살아갈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너를 붙잡을 수 없게 되었지.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

오히려 너를 점점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당신과 난 그냥 섹스 파트너나 마찬가지야!

나도 남들처럼 애인하고 같이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다고!"


"날 위해서 조금 더 노력해주면 안 돼?

제발... 세상 밖으로 한 걸음만 더 나가주면 안 되냐고."


그래, 너의 요구는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어.


언제까지나 무인도에 사는 것처럼,

우리의 작은 방에 숨어 살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난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어.


내가 겪는 비현실적인 고통을...

차마 너에게 말할 수가 없었지.

차라리 너와 가장 행복할 때

이대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어.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걸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어.


"널 사랑하는 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전부인데..."

그것이 너에게 부족하다면,

나는 네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연희야.

우리는 정말 여기까지인가 보다."


결국 나는 그렇게

너에게서 도망치고 말았지.

마치 나를 몰아세우는 것 같은

천둥소리를 들으며,
비 오는 밤거리를 한참이나 걸었어.


그 밤, 나는 나 자신에게

얼마나 심한 말을 쏟아냈는지 몰라.

집에 돌아와서는 젖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어.


다음 날엔 응급실까지 갔지.
그런데도 너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으려고,
정말 이를 악물고 나 자신과 싸웠어.

이번에는 꼭 너를 놓아줘야 한다고,
더는 이기적으로 굴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나를 몰아붙였어.


그러다 몸도 마음도 다 닳아버려

한동안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지.


그때 깨달은 게 있었어.

나는 늘 너에게만 의지했을 뿐,

나 스스로를 이겨내려 해본 적은 없었다는 걸.


너에게만 나를 감당해달라고 매달렸지.

정작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어.


그걸 깨닫고 나서야

너무 부끄러워졌어.

그래서 마침내 너를 포기할 수 있었지.


하지만, 연희야.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그게 마치
그 집에서 네가 나를 부르는 신호처럼 느껴졌어.


지난 10년간 몇 번이나 그 도망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어.

너를 사랑하고, 너의 곁에 있기를 원하지만

나는 너의 곁에서

여전히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 일테니까.


너와 헤어지고 일도 그만두고

가진 것을 모두 털어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한 달 동안을 걷고 또 걸었어.


일부러 한국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택해서

대부분 외국인인 곳으로 가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그냥 걷기만 했어.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이 병든 마음이 고쳐지기를 기도했어.


수행길을 마친 후 지금까지, 지금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 겸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어.


그는 순례길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나를 조용한 사람이라고 했어.

말이 없는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3개월만 도와 달라던 부탁이었는데…

벌써 10년이 흘렀어.


오늘 이곳, 스페인에도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고 있어.


나는 여전히 주방에만 머물러.

손님들과 마주칠 필요가 없는 곳.

모두가 떠난 뒤에야 홀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며 하루를 보내.


이곳 사람들은 동양인에게 말을 잘 걸지 않고,

서툰 스페인어와 영어는 오히려 완벽한 방패가 되어주지.


나는 여전히, 그 작은 피난처에 숨어 있어.

이 한적한 스페인의 게스트하우스가

나의 또 다른 도피처가 되어 주었어.


나는 이곳에서 거의 성직자처럼 살았어.

누구에게도 욕망을 느끼지 못했고,

가끔 너를 그리워하며 홀로 밤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네가 없기에 의미가 없었지.

나의 욕망은 너와 함께 사라져 버렸어.


사실...두세 달 전쯤,

한번은, 이 마을의 스페인 여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어.

그녀가 억지로 권한 와인에 취해버렸어.

그녀는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인데,

어째서인지 너를 조금 닮은 것 같았어.


그날 밤, 꿈에서는 분명 난 널 안았는데...

눈을 떴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다른 여자를 본 당혹감,

그리고 너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 진해서

너무 절망스러웠지.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사과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침대를 빠져나갔어.


그 뒤로 그녀는 가게에 채소를 덤으로 주는 법이 없었고,

사정을 모르는 친구는 그녀의 인심이 박해졌다며

서운해하며 여자애에게 뭐라 했었지。

하지만 그 친구에게 그 이유를 설명 해줄 수가 없었어.


나는 그날 이후 와인을 입에 대지 않았어.

정말이지, 어이없고 바보 같은 나.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이나,

너는 어김없이 꿈에 나타나 내게 안겼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젖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너.
익숙한 향수가 코끝을 스치고,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지.


바로 너의 방, 너의 침대에서…


나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너무 반갑고, 너무 기뻐서
너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어.


보고 싶었다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몰라.


그러다 눈을 떴을 때,

하늘이 어슴프레하게 밝아지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작은 방, 낡은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더라고.


처음엔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다,

결국 소리 내어 울고 말았어.

정말, 네가 봤다면 다큰 어른이 왜 그러냐고

볼썽사납다고 핀잔을 줬을 거야.


10년이 지났는데도,

너는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


이렇게 잊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너에게 돌아갔어야 했는데.

이토록 긴 시간을

후회와 그리움 속에서 괴로워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때는 그게 널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나는 다 괜찮을 거라고 믿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땐 내 나약함을

용기 있게 너에게 털어놓고

함께 견뎌낼 용기가 없었던 거야.


연희야.

나는 이제 10년간의 스페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나는 여전히 나약하고

아직 세상으로 나갈 용기도 없지만,

그래도 너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정말, 너를 다시 만나

한 번만 꼭 안고 싶어.


혹시

네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거나

곁에 누군가 있다면,

나는 그저 멀리서라도 네 얼굴만 보고 싶어.


만약 네가 아직 혼자라면…


모든 염치를 버리고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너는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우영은 더 쓸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제 풀에 지쳐 펜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일기가 끝났다.


이제 그가 할 일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하아…”


우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일기장을 그녀에게 보여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 시간 삼켜온 말들을

이제야 겨우 쏟아낸 기분이었다.


쏴아아아…


늦은 밤, 빗소리가 낡은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우영은 한동안 비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일 순례길에도 비가 올까.

그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똑똑똑.


그때, 게스트하우스 주인 스테판이 마지막 밤이라며 차 한잔하자고 찾아왔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그가 작은 봉투를 쓱 내밀었다. 그 봉투는 꽤 두께가 있어 보였다.

그 안에는 낡은 한국 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내가 갖고 있던 한국 돈인데 이거 한국가서 쓰게."

"아닙니다. 나중에 환전하시면 되잖습니까."


우영이 한사코 거절하려 하자,

스테판은 봉투를 그의 손에 꾹 쥐여주었다.


"아니, 그냥 그렇게 써버리고 싶지는 않아.
사실 이건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큰 선물을 사주려고 모아두었던 돈이야.
그런데 이젠 쓸 데가 없어졌거든."


"누구에게 말입니까?"

"내가 사랑하던 사람."


우영은 놀라 스테판을 바라봤다.
스테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멋지게 다듬은 콧수염.
그는 이제 한국 사람이라기보다 이곳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손님들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으레 놀라곤 했다.


"얼마 전에,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교통사고로."


우영은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장인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한 달 전부터 스테판이 보여온 변화가 떠올랐다.
평소엔 와인 한두 잔 정도만 마시던 그가
한동안 술을 유난히 많이 마셨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불과 한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졌었다.


우영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네가 한국에 가서 그리워하던 사람을 다시 만나거든,

이 돈으로 좋은 선물을 사주게."


그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결국 30년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네.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가, 그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가버렸어."


우영은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나이 든 친구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자네가 나 대신 써주게. 나는 더는 못 쓸 것 같아."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테판은 만족스러운 듯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우영을 꼭 안아주었다.


"자네도 나처럼 과거의 감옥에 갇혀서 평생을 살 텐가?

그럴 거라면, 내 말을 들어야 해. 가서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해."


우영은 친구의 품에 안겨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테판은 한 가지 당부를 하였다.


"그리고 꽃을 가져가게.

요새 꽃은 촌스럽다고 해도, 싫어할 사람은 없어."


그는 늦은 밤, 조용한 게스트하우스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꽃이야기를 하며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활기차졌다.


"그러니 잘 차려입고 제대로 준비해서 가게나!"


한동안 힘들어하던 스테판에게서 오랜만에 듣는 활기찬 목소리였다.


"그동안, 10년이나 저를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가 밖으로 나다니지도 않고,

여자 문제 한번 안 일으키고 일만 열심히 해줬으니

나야말로 횡재했지. 멀쩡하게 생겨서는 금방 여자 꽁무니 따라갈 줄 알고

3개월만 하자고 한 건데. 하하하하."


우영은 여자 이야기에 몇 개월 전에 마리아 일이 생각나 움찔했다.


"저기... 사장님. 마리아.."


"아아. 마리아는 신경 쓰지 말게.

그 친구,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한국 남자만 오면 그렇게 작업을 건다네.

허허허. 어차피 자네가 떠나고 다른 한국 남자가 오면,

그 남자한테 또 채소나 과일을 덤으로 줄 걸세. 하하하."


스테판은 이미 다 알고 있던 모양이다.

우영은 그런 그를 보며 민망한 듯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오랜 친구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스테판과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친 뒤

우영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아직도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영은 내일 순례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비가 오더라도 갈 거야.' 하고 다짐하듯이 속삭였다.


-쏴아아아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소리를 들으며 우영은 눈을 감았다.

연희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그는 천천히 잠을 청했다.


-계속

이전 05화[단편로맨스] 폭우: 상(上) [연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