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로맨스] 폭우: 완결 [생일선물]

by Katie

[단편로맨스] 폭우: 완결 [생일선물]


우영은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한 달 동안 끝없이 순례자의 길을 홀로 걸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이번 순례길은 10년 전보다 더 힘들었다.

그때보다 짧은 코스를 골랐는데도, 나이 든 몸은 더 쉽게 지쳤다.


하지만 우영은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걸어온 끝에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의 순례자상 앞에 도착했다. 우영은 낡은 청동색의 동상을 잠시 바라보고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목적지 앞에서 오히려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우영에겐 아직 더 무겁고 막막한 길이 남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 연희를 다시 만나는 길. 그 길이야말로 이 순례길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애초에 그녀가 자신을 만나주기나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렵게 소식을 수소문한 끝에, 다행히 그녀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곁에 다른 사람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쉽게 희망을 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면, 지난 10년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는 자신을 다시 받아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까지 바짝 탔다. 우영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가방 한쪽에 매달아 놓은 수통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에 남은 기운까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울적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뺨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 후텁지근하던 공기가 어느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오후에 소나기가 온다더니… 정말 비가 오려나."


고요한 바람 소리에 잠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바람을 타고 비릿한 비 냄새가 스며왔다.

문득, 10년 전 빗속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의 작은 방.
비 내리는 밤, 함께 누워 있던 순간.
따뜻한 체온과 은은한 살내음을 느끼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던 그때가.


‘우영씨….’


그때,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일까.


우영은 놀라 사방을 둘러봤지만, 주변에는 동상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공기 속 물 냄새가 짙어지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우영은 가방에 우비가 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꺼내지 않았다. 그대로 앉아서 내리는 소낙비를 맞았다.

황량한 순례길에 내리는 비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메말라 있던 그의 마음을 적시는 단비 같았다.

우영은 한동안 말없이 빗속에 앉아 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Sin prisa, pero sin pausa.”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는 말 것.' 스테판이 우영에게 종종 들려주던 스페인어 격언이었다.

우영은 눈을 들어 순례자 동상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빗줄기 너머, 그가 바라보는 곳은 더 이상 산티아고만이 아니었다.



***


연희는 퇴근 후,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들리는 카페 안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서 펼쳐 든 책장은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독서를 포기하고 카페에 큰 유리 통창에 보이는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일기예보는 오늘 저녁에 비가 올 것이라 했지만 지금은 하늘이 맑고 햇빛이 밝아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카페 2층 통창 너머로는 서해 갯벌을 따라 새로 생긴 공원이 내려다보였다.


노을을 바라보며 연희는 문득, 저무는 삼십 대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 젊다고 믿었는데, 어느새 생기와 에너지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의 시간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흘러갈까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연희는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다, 좀전에 사온 테이블 위의 민트차와 케이크를 보게되었다. 단 것이라도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포크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달콤한 치즈케이크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조금 식긴 했지만 향긋한 민트차도 나쁘지 않았다.

활짝 열린 통창으로 가을바람이 스며들었고, 따스한 햇살이 소파 끝까지 번져 왔다. 연희는 한동안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맑던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태양은 서서히 수평선 아래로 몸을 감췄다.


"정말 비가 오려나."


'띠링-'


풍경에 넋을 잃은 사이,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 정연이었다.


[정연: '어디야? 벌써 도착했어?']

[연희: '응, 카페야. 너는 언제쯤 와?']


아이가 아파 치과에 들렀다 와야 해서 늦을 거라던 친구였다. 정연은 연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정연: '사람이 너무 많아. 예약했는데도 30분을 기다리라네. 아픈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한지, 짜증 내는 이모티콘이 함께 날아왔다.

[연희는 괜찮다고 답했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의 외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연희: '여기서 기다릴게. 천천히 와.']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사이 노을은 붉다 못해 핑크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빛이 카페의 하얀 벽까지 몽환적인 색으로 물들였다. 연희는 그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통창이 활짝 열린 곳으로 걸어갔다.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연희는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연희도 그 풍경을 담고 싶어 휴대폰을 꺼내 앵글을 맞추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노을에 고정하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다시 정연에게서 문자가 왔다.


[정연: '연희야, 정말 미안해. 나 아무래도 오늘 못 갈 것 같아.]

[애가 이 뽑았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정말 미안해.']


친구는 치과 대기실에서 대성통곡하는 아이의 영상을 함께 보내왔다.


[정연: 그 대신 네 생일 선물 준비한 거, 퀵으로 보냈어. 그거 받을 때까지 그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


연희는 메시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 얼른 답장을 했다.


[연희: '야, 뭐 그렇게까지 해. 그냥 나중에 만날 때 주면 되지. 얼른 퀵 취소해.']


[정연: '아냐, 그건 안 돼.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친구는 애 키우느라 바쁘다고 생일 축하도

제대로 못 받고… 선물까지 늦게 받는 건 안 되지.']


[연희: '그런 걸로 안 서러워. 나이 먹고 생일 챙기는 것도 이젠 귀찮아.]


[정연: '야! 우리 나이가 어때서 서럽게 생일도 안 챙기냐!']


[연희: '이제 곧 40이잖아. 할머니지 뭐. ㅎㅎㅎ']


연희가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정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희야!"


전화기에서 정연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아들이 옆에서 서럽게 우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정연은 정신 없다고 아들에게 핀잔을 한번 주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왜?"


"야! 너 아직 예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말아!"


언제나 명랑한 정연이,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그 말 하나 때문에 전화를 걸다니. 연희는 친구가 제 말에 발끈해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정연답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그래, 고맙다. 친구야. 너밖에 없어."


"그리고 내 생일 선물 꼭 받고 가. 알았지?"


"응, 그럴게."


전화기 너머로 아이 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연희는 이제 그만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인사하고 끊으려는데, 정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야, 내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해도 돼."


"뭘 그렇게까지..."


정연은 연희의 말을 끊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아냐. 진짜 마음에 안 들면 돌려도 돼. 꼭이야. 아휴..진짜 내가 꼭 갔어야 했는데..."


걱정하는 정연에게 연희는 몇 번이나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바로 그때, 거대한 통창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세지자 연희는 통창 앞에 서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는 붉은 태양은 아직 수평선에 걸쳐 바다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열기를 식히기라도 하듯 시원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열린 통창 안으로 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그때, 계단 쪽에서 2층으로 서둘러 올라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연이가 보낸 퀵배달인가?’


연희는 정연이 보낸 선물이 도착한 건가 싶어 뒤돌아봤다. 하지만 올라온 사람은 카페 주인이었다. 손에는 청소 도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연희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 “비가 안으로 들이쳐서 창문 좀 닫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한 뒤 통창을 모두 닫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튄 빗물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 사이 연희는 자리로 돌아가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식으셨으면 따뜻한 물 가져다 드릴까요?”


청소를 마친 젊은 사장이 연희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나 카페 안을 살피는 눈빛에
어딘가 노련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미소에는 꾸밈없는 친절함이 배어 있었다.


“아… 네. 제가 내려갈게요.”


“아닙니다. 오늘은 손님도 많지 않고 한가하네요.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희의 인사에 사장은 빙긋 웃었다.


“그럼 풍경 더 즐기세요. 이 시간에 노을이 제일 예뻐요. 특히 비 오는 날엔 더 선명해서 훨씬 예쁘답니다.”


그는 작은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한 뒤, 청소 도구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소나기 속의 노을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잠시 시선을 돌려 카페 안을 자세히 보니, 마치 어느 유럽의 도시에 와 있는 것처럼 이국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어쩌면 카페 주인은 유럽을 좋아하거나, 오래 여행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따뜻한 물을 가져다줄 사장을 기다리며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진열된 소품들도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오른쪽 벽에 여러 나라의 엽서들이 장식처럼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엽서 하나가 있었다. 두 명의 남자 동상이 지팡이를 쥔 채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사진이었다.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의 순례자상.


“순례자상...”


연희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정연은 연희와 전화를 끊고 곧바로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고 있지?”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연은 그의 대답을 듣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정말 우리 연희 상처 주면 나 진짜 용서 안 해.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정연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이번에 연희 상처 주면 그 애 정말 무너져. 그동안 연희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비가 올 때마다 울었어.”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만약 연희가 받아주지 않으면, 우영씨도 다시는 연희 찾지 마.”


정연은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침 키즈카페에 도착한 아이는 손을 뿌리치듯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때 입구 너머 쇼핑몰 야외 광장 쪽으로 시선이 갔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연은 말없이 그 비를 바라보았다.


“이 바보, 또 비 온다고 혼자 울고 있는 거 아니겠지...”


정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오랜 친구가 이번 생일만큼은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연희는 자리에 앉아 치즈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쌉쌀하고 상큼한 민트티와 잘 어울렸다. 사장이 아직 따뜻한 물을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그냥 식은 대로 마시기로 했다.

연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석양이 거의 다 지고 있었다. 곧 저녁이 올 것이다.


연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나 이런 비 오는 밤이면 그녀는 방 안 침대에 누워 우영을 그리워하곤 했다. 그때는 그 빗소리가 슬프고 우울하게만 들렸는데, 오늘은 노을 속에 내리는 비가 이상할 만큼 아름다웠다. 정연이 굳이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희는 너무 오랫동안 후회와 슬픔에 갇혀 비가 만들어 내는 이런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때 창밖 바다 위로 번쩍, 번개가 쳤다.


“!”


이내 천둥이 뒤따랐다.


“콰과과광!”


연희의 방, 좁은 창문 너머로 보던 천둥과 번개와 달리, 노을 속 그것들은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바로 그때, 2층으로 올라오는 성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사장이 따뜻한 물을 들고 올라오는 줄 알고 뒤돌아봤다.


번쩍—


다시 창밖 바다 위로 번개가 갈랐다. 곧이어 천둥이 터지며 카페 안을 울렸다.
그 순간, 계단을 타고 올라온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연희는 심장이 그대로 부서지는 줄 알았다. 사장이 아니었다.


10년 만인데도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우... 우영 씨...”


“연희야...”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제야 연희는 정연이 말한 ‘마음에 안 들면 물러도 된다’는 뜻을 이해했다. 그의 손에는 큰 꽃다발과 잘 포장된 선물이 들려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선 우영은 조금 마르고 창백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놀라울 만큼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카페 밖 노을은 더욱 붉어져 2층의 하얀 벽을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

우영은 그 붉은 빛 속에서 간절하고도 따뜻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 내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수없이 되뇌었는데, 막상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인 끝에, 우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겨우 꺼낸 첫마디는


“연희야, 생일 축하해. 많이 보고 싶었어.”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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