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해상도

by Lusaka


작년 9월 초에 안경을 바꿨다. 무겁고 불편했던 싸구려 뿔테 안경을 버리고 처음으로 비싼 브랜드 안경을 구매했다. 일본의 안경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빚어낸 핸드메이드 안경이었다. 무려 순도 100% 퓨어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가벼우면서도 편리하지만 그 어느 안경보다도 훨씬 견고한 명품 안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야가 굉장히 선명해졌다. 도수는 이전의 안경과 똑같지만, 기분 탓인지 아무튼 선명해졌다. 안경에 70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고 나니, 자연스럽고도 신비하게도 시각의 해상도가 높아졌다. 쉽게 말해서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는 뜻이다.


그녀와의 이야기를 담는 이 공간에 느닷없이 안경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가벼우면서도 편리하고 견고한 명품 중의 명품 안경을 맞추게 된 게 그녀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 당시 안경을 구매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구매는 하고 싶었지만 비싼 가격 덕분에 구매를 망설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에 사야지 하고 마음을 접은 찰나였다. 그때 그녀를 지하철 퇴근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생각했다. 두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우리집을 지나쳐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녀와 떠들다가 내릴 곳을 놓친 척 연기를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우리 집보다도 두 정거장 더 멀리 있는 안경점이었다. 그렇게 그녀 덕분(?)에 나는 해상도 높은 시야를 장착할 수 있게 됐다.


내 삶의 역사상 가장 비싼 안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안경을 바꾼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됐다. 그만큼 편하고 내 마음에도 쏙 들었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보는 데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안경을 벗고 있으려고 노력하던 내가, 이제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경을 벗는 일이 잦아들었다. 킬킬. 이것은 마치 그녀 덕분에 삶을 더욱 세밀하게 볼 수 있게 됐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핵심은 이거다. 그녀는 내 삶의 해상도를 더욱 선명하고 다채롭게 높여주는 존재다.


나는 그녀 덕분에 높아진 삶의 해상도를 십분 활용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녀에게 매일 장난을 치며 그녀의 귀여운 웃음을 감상한다. 내 시야의 높아진 해상도를 그냥 두기가 아까워 매일 그녀에게 애교를 부리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디지털 프레임 안에 그녀를 담으려고 갖은 술수와 모략을 동원한다. 최대한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억지도 부린다. 그녀와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영화보다 그녀를 더 많이 본다. 이유는? 높아진 해상도를 그냥 두기가 아까우니까!


물론 해상도가 높아지다 보니, 서운한 점들도 가끔 보이긴 하다. 내 맘도 모르고 토라질 때면 서운한 마음이 와르르 몰려온다. 하지만 토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만큼 그녀가 날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 것들도 가감 없이 보여지니 너무 뿌듯하다. 이 모든 게 다 그녀 덕분이다. 날 두 정거장이나 더 먼 곳에서 내리는 마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해상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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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그녀와 함께 한강에 다녀왔다. 차를 사고 나니까 높아진 해상도를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다. 오른쪽에는 숲이, 왼쪽에는 드넓은 강물이 펼쳐진 곳을 그녀와 함께 걸으니 너무나 상쾌하고 기분이 째졌다. 잔디밭 위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나란히 앉아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이날도 내 엉덩이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대고 주물럭거렸다. 내가 그녀의 손버릇을 이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지만 기분이 좋아서 저지하지는 않았다.


이날 한강공원을 거닐면서 내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잠수교도 드디어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지 않아서인지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다음에는 꼭 함께 다리 밑을 걸으며 '너무 예쁘다' 라는 말을 듣고야 말 것이다.


IMG_8725.JPG 메롱

어쩌면 그녀는 본인을 더 세밀하게 봐달라고 안경점으로 나를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는 억지를 또 한 번 부려본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욱 가까이서 뚫어지게 그녀를 응시할 게획이다. 또한 높아진 해상도 덕분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다른 면을 찾아가는 재미도 누리고 있다. 내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라는 걸 느끼며 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졌다. 앞으로도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과 감상을 낭비하지 않고 모조리 소비해 버리겠다. 물론 그 소비의 제일 큰 비율은 그녀에게로 가겠지.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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