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성 그녀 증후군

그녀 없는 내 하루에 대한 소견서

by Lusaka


8:30 AM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심통이 잔뜩 난 표정으로 핸드폰 알람을 끄고 그녀의 카톡을 확인했다. 얼마 전 회사를 관둔 그녀는 요즘 그녀의 동생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백수가 된 이후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나고 있는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그득한 공기를 하루종일 마시는 것보다는 평화로울 거야. 나는 오늘도 그 지독한 공기를 마시러 가지만, 너만큼은 꼭 행복해야 해. 잠의 무게에 짓눌린 무거운 몸을 힙겹게 일으키고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9:11 AM

11분에 역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눈 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오늘따라 유난하던 바람을 뚫으며 달려왔건만. 나는 머털도사처럼 산발인 머리를 툭툭 털어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굳게 닫혀버린 스크린도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 못생긴 바가지머리인 나를 그녀는 왜 귀엽다고 하지? 나는 이번주 내로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다짐하고는, 그녀가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장갑이라도 끼고 일하면 손이 그나마 덜 틀텐데. 장갑을 낄 수 없는 현실이 슬프구만.


9:25 AM

첫 담배의 시간이다. 담배를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동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최소 필요 흡연량의 제약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상 그렇듯 담배 맛은 좋지 못하다. 담배가 몸에 해로워서일 수도, 어쩌면 흡연하는 장소가 회사 앞이라서 그랬을 지도. 그녀는 머털도사 사진도 모자라 못생긴 내 사진까지 보내며 귀엽댄다. 강제로 귀여워진 나는 흡연을 마치고 터벅~ 터벅~ 회사로 들어갔다. 오늘의 첫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9:30 AM

손가락 지문 인식으로 출근 체크를 하고, 자리로 가는 순간이 그렇게 힘겨울 수 없었다. 저번 달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복도를 걷는 맛이 있었는데! 그녀가 사라진 지금, 이 복도에는 오로지 스트레스만이 그득하다. 나는 열심히 커피 음료를 블렌딩하고 있는 그녀를 상상했다. 어쩌면... 수박주스를 만들고 있을 지도? 냉큼 자리에 앉아 그녀가 준 안약을 눈에 넣었다. 회사에는 이제 그녀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눈 밑으로 흐르는 안약이 마치 눈물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10: 30 AM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 이번엔 여러 잔의 카페라테를 한꺼번에 만들고 있으려나. 나도 빈 커피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로 가 커피머신에게 진한 아메리카노를 명령했다. 이것보다 그녀가 만든 커피가 훨씬 더 맛있을 텐데. 자리로 다시 돌아온 나는 멍하니 앉아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이번 주는 아무래도 업무가 딱히 없을 모양이다. 이어폰을 귀에 꼽는 순간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밖에서 맛있는 비빔국수를 먹을 것 같다고 한다. 좋아, 그럼 나도 비빔면. 오늘 저녁은 너로 정했다.


11:27 AM

문득 집에 참기름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러면 비빔면을 먹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오늘 비빔면 대신 틈새라면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왠지 또 라면이냐며 핀잔을 줄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몸을 흔들며 내 가슴을 후두두 두드리는 상상을 했다. 흠... 어쩌면 말하는 게 나을 지도?


12:03 AM

오전 내내 나의 업무는 '없음'이었다. 업무가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지만, 없으면 또 없는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머릿속에 쓸데없는 노이즈가 가득 쌓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주 그녀와 함께 보았던 영화 <노이즈>를 떠올렸다. 역시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열린 결말을 의도한 것 좋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과관계는 맞춰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그녀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영화는 걍 해석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해석하니 머리가 아팠고 나는 하루의 두 번째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1:20 PM

잠에서 깼다. 점심을 소시지 하나로 간소화하고 점심시간에 잠을 잤다. 회사에서 정말 잠에 들었던 적은 손에 꼽는다. 오늘은 손에 꼽히는 그날 중 하루다. 다른 팀 직장 동료가 오더니 내 책상에 오로나민씨를 두고 갔다. 내가 점심을 먹지 않아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도 그녀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비빔면 대신 피자를 먹을 거랬는데. 무슨 피자를 먹었을까?


3:00 PM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 벌써 한 시간도 넘었다! 아무래도 낮잠을 자고 있는 게 틀림 없다. 그녀는 요새 낮잠에 취미를 붙였다. 아무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니 피곤했을 거다. 하지만 점심은 먹고 자는 걸까? 피자 먹고 자면 속 더부룩할 텐데. 유튜브에는 더 이상 흥미로운 게 뜨지 않는다. 이제 내가 새로운 주제를 떠올려 검색을 해야 할 타이밍에 이르렀다. 하지만 궁금한 게 없는데. 지금 내가 궁금한 건 그녀가 어떤 자세로 잠에 들었는지다. 엎드리고 있을까?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까?


3:50 PM

자연스럽게 연락이 안 되면 자고 있는 거란다! 잠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까 서운하다! 이 카톡을 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씩씩거렸다. 엎드려서 보내고 있겠지? 왠지 아직 침대일 것만 같다. 슬슬 배가 고프다. 아무래도 점심을 너무 과하게 간소화했나 보다. 자연스럽게 라면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내 특제 매운 라면을 언젠가는 끓여줘야 하는데.


4:13 PM

마구마구 한숨이 나온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당장이라도 떄려 치우고 싶다. 하지만 때려치우고 싶지 않다. 일이 없어도 월급은 들어오니까. 이제 차도 있으니 월급이 꾸준히 들어와야 한다. 아니,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럴 힘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왜 힘이 드는 것이냐! 아마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겠지, 후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극도로 더욱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기 때문일 지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처럼 노이즈 캔슬링 마인드는 개발 안 되나? 여하튼 퇴근까지 두 시간 남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이나 봐야겠다.


4:30 PM

아무래도 그녀를 생각하는 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된 모양이다. 할 게 없으면 자연스레 그녀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핸드폰 사진을 보다가 강아지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손이 꽤 앙칼진 게 귀엽다. 치킨 조각을 들고 있는 손도 보았다. 어라, 치킨도 먹고 싶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뭐든 다 맛있게 보인다. 앗, 오늘 처음으로 상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부 인사조직이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AI 시대에 발맞춰 AI 관련 조직이 신설된 모양이다. 아하, 오늘은 AI 프롬프트나 가지고 놀아야겠다.


5:07 PM

그녀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잠이 든 것인가. 그럼 밤에 잠 못 자는데. 강아지랑 놀고 있나? 그나저나, 내일은 회사에서 뭘 해야 시간이 잘 흐르려나. 지속적인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나 해 봐야겠다. 매번 고민만 하다 해결이 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는데.


5:27 PM

컴퓨터 배경화면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무료함으로 가득한 공기를 하루종일 마셔버린 탓일까. 좀처럼 쓸 만한 프롬프트가 나오지 않았다. 당분간은 현재 배경화면을 계속 써야겠다. 확 그녀 사진으로 바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나저나 지금 쓰는 이 글, 꽤 길어지겠는데...?


5:55 PM

시계에서 같은 숫자를 보면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거라는 미신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지금은 누가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이제 퇴근까지 35분이 남았다. 회사에서는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매우 경건하고 느릿한 퇴근 준비를 시작해 본다. 퇴근 후의 시간을 야무지게 보내기 위한 계획을 짜 봐야겠다. 요즘 그녀에게 게임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오늘도 게임을 해볼 생각이다. 물론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 생각을 더 많이 하겠지. 그리고 오늘 저녁 메뉴는 치킨으로 바뀔 예정이다. 그녀가 단백질도 섭취할 겸 치킨을 추천해 줬으니까!


7:15 PM

집 청소를 안한 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청소라는 행위는 왜 항상 하자마자 금방 오래된 기억이 되는 것일까! 내일은 집 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기를 돌린 뒤 바닥까지 닦아야겠다. 내일이라고 했지만 아마도 일요일 밤 즈음이 될 것이다. 그녀는 청소를 자주 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상대적으로 더러운 생활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도 정리는 잘 한다! 그저 먼지가 조금 더 쌓였을 뿐이다. 이번 주에는 꼭 청소를 하고, 다음 주에는 꼭 그녀를 우리 집에 데리고 와야겠다.


7:25 PM

그녀를 데리고 와서 뭘 해야 할까? 괴롭힐까? 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매우 괴롭히고 싶다. 그래서 그녀한테 후두두두 두들김 당하고 싶다. 그녀는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지 싶다. 괴롭힘이라는 단어를 다른 걸로 바꿔볼까? 그럼 같은 괴롭힘도 괴롭힘으로 안 느껴지지 않을까? 아니, 그래서... 그녀를 데려와서 뭘 하면 좋을까. 아, 그리고 그녀랑 또 차박 하고 싶다. 7월이 됐고 이제 카드값도 리셋 됐는데, 차박텐트를 그냥 지를지 고민이 된다.


8:01 PM

내가 글을 쓰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바로 축구다. 어릴 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아마 현재의 내가 지금의 기억을 간직한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망설이지 않고 축구선수에 도전해볼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국내 2부리그나 1부리그 후보 선수까지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 매우 주관적이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게임으로 대체해 본다. 이 글은 게임에서의 첫 번째 경기를 이긴 것에 대한 소감이다.


8:16 PM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 생각이 난다. 그래서 자꾸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혹시나 그녀의 연락을 씹어버린 건 아닌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히 그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니, 다행이 아니네. 왜 답장 안 와!


8:53 PM

그녀가 슬슬 자야겠다고 말하기 전에,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이미 글이 꽤 길어져 그녀가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여하튼 오늘 하루도 이렇게 흘러는 갔구나. 오늘의 시간 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내가 생각보다 그녀 생각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녀라는 존재가 내게 습관이 된 모양이다. 습관이 되었다는 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익숙해졌다는 건, 그만큼 반복되었다는 이야기다. 습관은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좋은 반복이든, 나쁜 반복이든, 습관은 만들어진다. 내 하루는 이렇게 그녀로 반복된다. 그녀가 내 옆에 있음에도, 없음에도. 그녀라는 습관이 점점 내 머릿속을 더욱 깊히 파고든다. 고치기 어렵게, 끊을 수 없게...


8:54 PM

그녀가 내 말투를 따라했다...! 나중에 꼭 육성으로도 듣고야 말 테다.


9:42 PM

그녀와 싸웠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어서 더 화가 난다. 서로의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런 건 반복이 되면 좋지 않은데, 결국 또 다시 일어나 버렸다. 새로운 사건도 아니고 지난 갈등의 맥락에서 시작된 다툼이라 너무 허무하다. 이런 앙금의 맥락이 언젠가는 풀어질까? 이럴 거였으면 싸우기 전에 얼른 업로드할 걸 그랬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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