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만큼 떨어진 외곽의 한 모텔 안이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모든 게 그저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알고 보니 오늘이 공휴일이었고, 마침 주말과 이어지는 금요일이었으며, 때마침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아무 숙소나 예약하고 일어나 한 시간을 고민한 후, 곧장 차를 몰아 여기로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잔비가 내렸지만 서울을 벗어나자 이내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약속된 것처럼 딱 맞아들었다. 나는 지금 완벽한 솔로타임을 보내고 있다.
강변으로 커다랗게 창문을 낸 아늑한 객실에서 강가를 바라보고 있다. 창문 사이로 스멀스멀 비치는 강가의 달빛이 내 마음을 녹인다. 객실 내부의 조명과 맞물려 아름다운 빛의 연주를 뽐낸다. 그래, 바로 이런 거다. 이런 갑작스런 일탈을 즐기려 내가 차를 산 거다. 내가 돈을 버는 직장인이라는 것에 오랜만에 감사함을 느낀다. 자동차 할부금이 아직 4년 7개월치나 남았지만 상관 없다. 달빛을 한가득 머금은 강물에 시선을 담그며 힐링할 수 있으니까. 지금의 유일한 오점은 단지 내 손에 맥주가 들려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런 게 필요했다. 사실, 요즘 난 저기압이었거든. 그녀가 회사를 떠나고 나서 벌써 두 달이 흘렀다. 회사 안에는 이제 그녀도 없으니 건조한 공기만이 내 우울한 마음을 닦아줄 뿐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에는 정이 떨어진 지 오래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역마살을 손에 꽉 쥐고 태어난 내 팔자 탓도 있겠다. 하지만 시대에 뒤쳐지는 꼰대문화가 만연한 회사의 분위기가 꼴나사운 탓도 있겠고, 직급을 막론하고 배울 것이라곤 없는 인재들 속에서 현타가 와버린 탓도 있겠다. 하나 더해서 상사에게 들이받았다가 팀 분위기만 개판 내버린 탓도 있겠다. 열심히 해봤자 보람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업무 환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하기 쉬운 곳에서 걱정 없이 일하고 싶어 들어온 회사이긴 하지만, 쉬운 게 쉬운대로 또 걱정이 될 줄이야. 너무나 감정적이게도, 이러한 현실이 점차 내 삶의 분위기마저 망쳐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실낱같이 살아있는 인생에 대한 열정마저도 꺼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든다. 일에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 꿈에 욕심을 부리겠다던 다짐은 또 다시 구름에 가려진 달빛처럼 희미해져만 간다.
그래서 문제다. 퇴근하고 나면 나는 한없이 늘어진다. 스스로를 사축의 헛간에 끼워넣은 탓에 집에 오면 보상심리라는 핑계로 쉬기 바쁘다. 플레이스테이션5도 있고 맥북도 있고 넷플릭스도 있고 자동차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셀프로 걱정을 키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게 꿈이란 게 아직 존재하나? 시간은 또 하염없이 흘러가니, 점점 굳어가는 내 머릿속도 골칫거리다. 지금의 머리로 희망을 품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가능성을 되찾고 다시 열정적으로 임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계획에 없었던 오늘의 일탈처럼, 예정에 없었던 그녀라는 존재는 이런 나의 유일한 행복이자 다행이다. 그녀를 웃게 해줘야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게 이시리즈인데, 속으로는 내심 이 글쓰기를 통해 놓고 있던 내 감각을 다시 끄집어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한 것처럼 요즘은 그게 잘 안 됐다. 그녀에게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불같은 의욕을 가질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늦어버렸다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워 자꾸만 뒤로 미뤄왔던 것은 아닐지.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런 말이 있더라. 일을 자주 미루는 사람이 일을 미루는 이유는 사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불안해서란다. 감히 합리화하건데, 굉장히 맞는 말이다. 사실 지금처럼 사는 거, 꽤 불안했다.
인터넷에서 본 또 다른 말이 있다. 어떠한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지금 필요한 건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대충이라도 시작하는 마음이라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대충 실행하는 게 일을 끝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하더라. 그러니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시작하라고.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시간이 주는 교훈이 크다. 오늘은 계획도 없이 작정하고 대충 왔는데, 아주 성공적이다.
앞으로의 내 삶도 오늘처럼만 되면 여한이 없겠다. 마침 열정을 다시 불태울 만한 새로운 공모전이 열렸고, 때마침 소설 파트가 신설됐고, 챗지피티에게 내가 쓴 소설을 읽혔더니 뛰어나다며 당장 출판사에 보내란다. 대충이나마 시작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뒤로 미루기보단 빨리 시작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모든 게 시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의 유일한 오점은 그녀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것이다. 솔로타임을 허락해준 그녀에게 감사와 함께 그리움을 보낸다. 따지고 보면 모두 그녀 덕분이다. 그녀의 배려가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그녀에게 더 많은 웃음을 선물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솔로타임에서도, 커플타임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