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 정세랑
77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 싱겁게도 그저 숫자 7을 유난히 좋아해서 책이 51명(제목은 피프티 피플이지만 실제론 51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진다면, 이왕이면 나는 77번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77로 정해보았다. 불필요한 번호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꽤나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 리뷰가 “세븐티 세븐의 독후감”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는 싱거운 이야기와 함께 리뷰를 몇 자 적어보았다.
나는 책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읽는 걸 선호해서 “피프티 피플” 역시 정세랑 작가의 소설책이라는 정보만 가진 채 펼쳐보았다. 수십 명의 이름이 죽 나열된 차례부터 인상적이었는데 한 명, 두 명 읽다 보니 토막토막 단편 모음집이 아닌 가늘거나 굵은 실타래로 엮인 51명의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닌 다수의 엑스트라들의 사소하지 않다면 사소하지 않을, 그러나 사소한 이야기들의 나열이었다. 대학 병원 응급실 의사부터 간호사, 대학생, 교수, 캐디, 시한부 어머니를 둔 딸, 심지어는 한국에서 경기를 치르다 부상을 당한 외국인 핸드볼 선수까지.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각양각색인 그들의 지루하다면 지루할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읽자 작가의 말을 읽기도 전에 정세랑 작가가 어떤 생각에서 이 책을 구상하게 되었을지 손쉽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가을도 겨울도 그러기에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맞추다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작가의 말 중.)
평범한 이야기들의 모음인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각 인물들 간의 크고 작은 관계성이다. 읽다 보면 ‘아, 이 사람이 싱크홀에 빠졌던 그 며느리구나!’ 혹은 ‘앗, 저 사람은 정신과 병동에 갇힌 동생의 누나구나!’와 같은 소소한 발견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다시 앞의 이야기들을 뒤적거리게 된다. 특히 병원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나의 직장이 병원이다 보니 병원 에피소드에 유독 관심이 집중되었다. 작가가 병원에서 근무해 본 적이 있나 싶게 병원 직원들의 일상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마치 직장 동료들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은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병원 직원들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장유라”라는 인물이다. 장유라의 남편은 빗길에 미끄러진 화물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의식이 없는 남편을 뒤로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장유라는 일자리를 구하고, 보험금을 따져보며 일상을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장유라는 화물연대의 시위 장소를 지나게 된다. 시위는 화물차 운전자들이 업주의 강압에 의해 불법으로 과적할 경우 운전 컨트롤이 어려워 사고 발생률이 높아지는 점을 고발하는 시위였다. 남편이 화물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기에 화물연대 시위 현장에서 깽판이라도 칠 것만 같아 불안했는데 뜻밖에도 장유라는 시위자들에게 되려 샌드위치와 콜라를 선물한다. 장유라의 이야기는 “비밀의 숲” 드라마 속 “윤과장”을 떠오르게 한다. 그 역시 사랑하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들이 탄 버스 회사에서 비용 감축을 위해 필요한 부품을 생략하고, 교통사고가 발생한 가드레일은 하필이면 부실시공으로 착공되어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윤과장은 이에 분노하여 이와 관련된 자들을 살해하며 아들에 대한 복수를 한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들이,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들이 하필이면 장유라와 윤과장에게 일어났다. 둘 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은 서로 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의 슬픔은 결코 이야기 따위가 아니다. 올 1월, 멀쩡하던 해운대의 한 콘도 외벽이 붕괴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비슷한 사건 사고들은, 심지어는 인명피해가 있는 사건, 사고들이 심심찮게 현실 뉴스에 보고된다. 희생자들은 윤과장처럼 과거에 붙잡혀 미래를 그려나가지 못하거나 장유라처럼 과거를 차곡차곡 게어 놓고 미래를 펼치려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장유라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삼켜냈기에 담담히 그들에게 샌드위치와 콜라를 선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마음이 쓰이는 에피소드였다.
이 밖에도 전 남자친구의 칼에 찔려 죽은 조양선의 딸 승희, 스티브 코티앙과 손 인사를 나누던 이설아, 정우와 모두 잠자리를 했던 3G 김인지, 오수지, 박현지 등등. 슬프기도,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뭉클하기도 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먼저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서 느낀 거지만, 정세랑 작가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진행하면서 동시에 스파클링 음료처럼 통통 튀는 강렬함을 선사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작가라 생각한다. “피프티 피플”에서 그 재주가 더 빛을 발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던 날,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은 건지 나 자신을 나무라며 네이버 검색창에 정세랑 작가의 다른 책들을 검색하다 하루를 마무리했다.
부록. 백지영
간밤에 나는 배를 부여잡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 끙끙 앓았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냐면…. 야간 당직 근무 중 찬 샌드위치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운 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급격히 컨디션이 나빠졌다. 처음엔 오한이 들고 식은땀이 나길래 ‘설마…. 코로나?!’하며 만일 격리에 들어가게 되면 넷플릭스로 뭐를 볼까. 혼자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김치 공장을 차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구역감이 들고 배가 찢어질 듯이 아픈 게 급체를 한 건지 배탈이 난 건지, 아무튼 무언가 문제가 생기긴 했구나 싶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병원 직원이다. 계단으로 두 층만 기어내려가면 바로 응급실인지라 새벽 1시 즈음 도저히 못 견디겠기에 야간 당직이고 나발이고 냅다 기어 응급실을 방문했다. 항상 직장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아파도 병원에서 일하다 쓰러져야 인정받아.”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게 사실이 될 줄이야. 역시 언제 말이 씨가 될지 모르니 입방정 떨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날이 업무상의 이유로 들락날락하던 것을 제외하면 내 인생 첫 응급실 경험이었다. 나를 진찰하던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냥 급체한 것 같다며 진통제 수액 한 팩을 놔주었다. 하지만 퉁퉁하던 수액이 홀쭉해질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배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려댔다. 참다못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간호사를 호출해 진통제 좀 더 놔달라고 애원했다.
“원래 급체가 이렇게 아픈가요…?”
“사람마다 달라요.”
“…….”
“그런데 선생님 수액 다 맞고 설마 근무하러 다시 올라가시는 건가요?”
저도 모르겠네요.
간호사와의 씁쓸한 스몰 토크를 마친 후 두 번째 수액까지 다 맞자 그제야 배가 진정됐다. 고통이 가시고 나자마자 드는 생각은 나도 참 징하다 싶지만, 다음날 가려고 예약했던 파인다이닝은 어쩌지였다. 무려 두 달 전에 예약한 미슐랭 원스타 식당의 퓨전 파인다이닝인데, 하필이면 전 날 배탈이 날게 뭐람. 이미 예약금도 지불했고 지인이랑 같이 가기로 한 건데 일방적으로 파투 내려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1년 365일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던 내가 하필이면 왜 이날…. 나는 원체 오감 중 미각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기에 먹는 거에 있어선 항상 온 진심을 다한다. 아, 뭐 그렇다 해서 엄청난 미식가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맛있는 걸 좋아하는 대식가이다. 새로 생긴 핫하고 힙한 식당이 있다면 꼭 방문을 해줘야 하고 음식이 입맛에 맞으면 다소 비싸더라도, 배가 터질 듯이 부르더라도 약간의 고민 끝에 결국 더 시켜 먹고 마는. 그래서 이번엔 음식에 조금 더 진심을 담아보았다. 연말에 꼭 파인다이닝을 가자며 항상 맛집 탐방에 함께해 주던 친구와 소액 적금까지 들었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고뇌가 요동쳤다. 출출 세포는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라고 날 유혹했고 이성 세포는 “또 응급실 실려가고 싶냐?”라며 내 등짝을 후려쳤다. 내적 갈등 속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응급실 간호사가 괜찮아졌으면 이제 퇴원해도 된다며 손등에 박힌 정맥 주삿바늘을 제거해 주었다. 금세 새파랗게 멍이 들었다. 결국 그날 밤 나는 남은 당직 근무를 다 마치지 못하고 조퇴했다. 퉁퉁한 수액 두 팩을 주입하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밤새 요의가 느껴져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미슐랭 원스타 식당 한가운데에 앉아있다. 결국 출출 세포가 이성 세포를 이기고 배탈이 난 몸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하여 디저트까지 코스로 한 접시 한 접시 준비되었는데, 음식이 이렇게 예술적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플레이팅이 아름다워 눈이 황홀했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이 차가운 음식이었기에 결국 몇 입 먹지 못하고 배가 욱신거려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은 감질나고 눈만 달콤했다. 내가 자꾸 음식을 남기자 서빙 직원이 입맛에 맞지 않냐며 가감 없이 음식평을 해달라고 내게 다가왔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디저트까지 전부 서빙된 후 메인 셰프가 다가왔다. 그는 호주인으로 한국 음식에 감명을 받아 전통 한국 요리에 호주식 해석을 곁들인 이 퓨전 파인다이닝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TV 프로그램에도 종종 나오던 셰프가 신기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셰프는 조그마한 웰컴 선물을 주면서 역시 그도 궁금했던 건지 혹시 음식이 입맛에 안 맞냐는 질문을, 그것도 영어로 했다. 갑작스러운 영어에 조금 당황한 것도 잠시, 토익 공부 5년의 결실을 오늘로 맺어보자. 자신 있게 나도 영어로 답해주려 했으나 아차, 나는 리스닝만 잘하지. 결국 몸이 안좋아서 그렇다는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따봉이나 만들어 보여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2
오늘 먹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정말 정말 맛있었고 남들이 보기엔 아픈 와중에 무식하게 행동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오길 잘 했다 싶었다. 이걸 메인 셰프에게 영어로 멋지게 말해주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쏘리 셰프. 그저 주섬주섬 약봉지를 꺼내들어 어색한 미소를 지어준 후 알약을 꼴깍 삼켰다.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시퍼렇게 멍든 손등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멍든 피부가 욱신욱신 아프지만 괜스레 자꾸 만지게 된다.
부록은 제 이야기를 피프티 피플처럼 단편으로 써내려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