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스포가 난무하는 후기입니다. 이야기의 특성상 이왕이면 완독하신 분들만 읽기를 추천드려요.
무척이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이다. 칵테일과 사랑과 좀비라니. 도대체 저게 뭔 조합이여.라는 생각에서 읽게 된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 총 네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은 제목처럼 그 내용도 참 아리송하다. 첫 번째 작품인 “초대”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오잉, 마지막 작품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의 중반 부분에서 또 나도 모르게 또잉. 드라마, SF, 공포, 스릴러가 복합적으로 짬뽕(?)된 참신하고도 신박한 이야기의 모음인 한편, 실은 우리 가까이서 친숙하게 일어나는 일상들의 모음이기도 하다.
이것은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책에서, 드라마에서, 뉴스에서, 중후한 목소리의 연예인이 진행하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서, 범죄 다큐멘터리에서, 우리 일상의 곳곳에서,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진부하지만 자극적이고, 안쓰럽지만 불편한 그런 이야기.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중)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한다. 사랑해서 연애를 하고,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해서 지켜주고, 사랑해서 희생하고, 사랑해서 살해한다. 항상 아름답기만 한 사랑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독 “칵테일, 러브, 좀비” 속 사랑은 앞이 컴컴하다. 연인을 가스라이팅 하다(아마 자기가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듯하지만) 결국 그 연인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지독하게 외롭지만 어차피 자신을 반기지 않기에 이따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간들을 괴롭혀 쫓아낸다. 헤어지지 못해 지속하던 결혼 생활은 결국 좀비가 된 남편을 직접 총으로 쏴 죽이며 종지부를 찍는다. 한때 나를 사랑해서 스토커로부터 날 지켜주던 남자는 되려 나를 죽이고, 길러준 아버지의 범죄를 막으려 나는 직접 아버지를 죽인다. 슬프게도 이것은 정말 흔하고도 흔한 이야기이다. 데이트 폭력, 친족 살해, 무분별한 개발을 위한 환경 파괴 등등.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접했을 진부하지만 자극적이고, 안쓰럽지만 불편한 그런 이야기. 왜 아름답기만 한 사랑은 없는 걸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보기만 해도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그런 사랑은 왜 없는지. 나는 왜 저런 때묻은 사랑이 그렇지 않은 사랑보다 훨씬 익숙한지.
앞서 책이 굉장히 참신하고도 신박한 이야기의 모음이라 표현했는데, 굉장히 무겁다면 무거운 소재를 작가가 마냥 무겁게만 풀어내진 않았다는 점이 한몫했다. 특히 “칵테일, 러브, 좀비”에서 딸이 좀비가 되지 않도록 남편의 머리에서 꺼낸 새끼 뱀을 가져다 제사를 지내는 장면은 K 샤머니즘과 서양 좀비가 합쳐진 이색적인 퓨전 장르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초대”에서 태주의 초대를 받고 방문한 리조트에서 채원은 평생 목 속에 박혀있던 가시 같은 존재인 정현을 살해하는데 이게 좀…. 소시오패스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참 통쾌했다. 드디어 가시를 뽑아냈다는 개운함과 같이…. 신박함이 드러나는 두 번째 포인트는 아무래도 제목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잘 담아내는 제목들 덕분에 다 읽은 후 다시 제목을 돌아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특히 “칵테일, 러브, 좀비”와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제목만으론 도저히 이야기를 추측할 수 없었는데 다 읽은 후에야 의미를 알 수 있어 무릎을 탁탁 쳤다. 흔하디흔한 소재로 이렇게 창의력 넘치는 이야기와 제목을 만들어낸 조예은 작가에게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 수상작인 만큼 짜임새가 꽤나 그럴싸한 타임패러독스물이다. 네 개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으며 동시에 가장 찝찝함을 남긴 작품이다. 워낙에 운명론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이 대사가 반복되는 것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어머니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들에게만 목소리가 들렸다면 아들은 분명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아버지에게도 목소리가 들렸다면 또 다른 운명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벌어지도록 목소리가 그들을 농간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 운명 따윈 없을 수도 있다고,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아들과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싶지만 반복되는 시간의 역설 속에서 그들에게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아 답답하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가 아닌 “습지의 사랑”으로 책을 마무리하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타임패러독스만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진 못하겠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론 축축한 고통의 현실보단 촉촉한 숲과 물의 우정과 사랑이 책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물은 세상이 뒤집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물은 있는 힘껏, 이영을 껴안았다. 이영도 여울을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이영.”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 세상이 암전되는 듯했다. 소음이 가시고 평온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 하천도 없고, 숲도 없고, 마을도 없었다. 뒤집히고 뒤섞인 세상에서 여울과 이영은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이 몸을 붙였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젖은 흙냄새에 파묻힌 채로 눈을 감았다. (습지의 사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