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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26. 2022

분류는 인간의 본성?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Pluto is dead.”

 2006년 천문학계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한다. 1930년에 발견된 이후로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 자리를 꿋꿋이 유지하던 명왕성이 행성의 전당에서 퇴출당한다. 천왕성 주변에 특정 궤도를 도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존재하는 카이퍼 벨트(Kuiper Belt)가 발견된 이후로 명왕성의 뒤를 이어 행성의 자격을 얻을 만한 미지의 천체들 또한 발견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해당 천체들은 특정 궤도를 따라 공전하기는 하나 행성으로 포함시키기엔 태양계 중에서도 크기가 작은 편인 명왕성 보다도 작았다. 또한 이 천체들 중 하나를 행성으로 포함시키기로 결정한다면 애매한 크기의 왜소행성들 모두 행성으로 포함시켜야했다. (전부 포함시킨다면 아마 태양계는 12개 쯤의 행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태양계에 특별한 애정이있는 과학자들, 일반인들 사이에서 크나큰 반대가 있었다.) 그래서 새로 발견된 천체들을 행성으로 전부 포함시키느냐 아니면 왜소행성으로 분류하고 명왕성까지 왜소행성으로 강등할 것이냐라는 논쟁이 일었다. 논쟁은 어마어마했고 천문학자들뿐만 아니라 명왕성을 사랑하는 일반인들도 명왕성을 지키자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 논란의 끝은 국제천문연맹의 회의 결과 명왕성이 태양계로부터 퇴출당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퇴출당했지만 명왕성은 변함없이 명왕성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명왕성의 강등에 슬퍼했고 명왕성은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운 이미지의 천체가 되었다. 행성과 왜소행성이라는 분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궁금증에 생각의 방향을 제시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룰루 밀러”라는 과학 전문 기자의 전기이다. 밀러의 아버지는 인생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을 밀러에게도 되물림했다. 믿음은 같지만 두 사람의 방향은 달랐다. 무의미하기에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와는 달리 밀러는 삶에 대한 의욕이 상실되었다. 청소년기에는 자해를 반복했고 성인이 되어선 한순간의 실수로 일생일대의 사랑에 종지부가 찍히며 다시 죽음에의 유혹을 받는다. 그때 밀러는 혼돈에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일생을 통해 혼돈 속에서도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아본다. 유난히 어류에 관심이 많았던 분류학자 데이비드는 “루이 아가시”라는 박물학자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아가시의 가르침하에 데이비드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은 “신성한 사다리” 위에 있으며 인간은 모든 종을 통틀어 사다리의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믿음을 갖는다. 즉, 종에 대한 연구는 사다리의 위계질서를 밝히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생을 종의 구분에 바친다. 물론 이 과정 중 그는 (인생사 당연지사겠지만)몇 차례의 혼돈을 만난다. 대지진으로 지난 수년간 연구한 결과물이 박살났고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종에 집착했다. 심지어는 자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사다리에도 집착했다. 그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우성한 유전자가 따로 있으므로 이를 증폭시키기 위해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하고자 하는 “우생학”을 주창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말도 안되는 학문은 시대를 강타했고 심지어는 우성 유전자의 번성을 위해 열성 유전자를 박멸하는 법안이 제정된다. 일명 “불임화”법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데이비드를 추적한 밀러는 이 뜻밖의 전개에 가로막히고 만다. 데이비드는 혼돈을 이겨낸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혼돈을 이겨낼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밀러는 의외의 인물들로부터 그 답을 발견한다.




 밀러는 인터뷰를 위해 우생학이란 명목하에 자행되었던 불임화의 피해자들을 만난다. 수용소에 갇혀 불임화된 애나는 같이 수용소에 갇혔던 메리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이때 밀러는 애나에게 자칫 무례할 수 있지만 평생에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질문을 한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애나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론이지. 메리 때문이야.” 밀러의 아버지에 의하면 우리는 우주라는 거대함 속 작은 점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의미없는 점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지만 내 가족이, 친구들이,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나를 의미있게 해주며 나 또한 그들을 의미있게 해준다는 민들레의 법칙. 더불어 밀러는 어마어마한 진실 한 가지를 더 알게된다. 데이비드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어류”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는 그저 물 속에 사는 생명체를 모두 통틀은 엉터리 분류였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인간에 비해, 네 발 달린 육지 동물에 비해 어류는 한참 하등한 존재라 생각했지만 우리의 내부 장기는 그 어느 동물보다도 어류라 칭해왔던 동물들과 유사하다. 데이비드가 주창하던 사다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가 평생을 받쳐 연구한 어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밀러는 스스로가 그려 넣은 커튼에 가려졌던 진실을 발견한 후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책을 마무리한다.  








 앞선 두 이야기(명왕성과 데이비드)를 살펴보면 인간은 분류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행성” 명왕성과 “왜소행성” 명왕성은 엄연히 다르고 “어류” 돌고래와 “포유류” 돌고래 역시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 현존하는 수많은 천체와 동물과 자연을 아무리 분류한들 우주는 알아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심지어 분류를 위해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가령 데이비드는 천여 마리가 넘는 물고기를 잡아 죽여가면서까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했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이다. 인종의 우열을 가리며 우세종을 다수화하기 위해 거침 없이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보스니아 전쟁, 르완다 대학살 역시 모두 인종 청소 즉, 제노사이드(Genocide, 특정 인종이나 종교 집단을 완전히 없앨 목적으로 살해하거나 신체적/정신적으로 박해를 행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이야기하겠다. 인간은 분류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분류를 위해 인간 이외의 종, 더나아가 나를 제외한 인간까지 파괴할 수 있는 본능을 가진 것인가? 인간은 결국 파괴적인 존재인 것인가?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나의 이런 해석이 너무 비약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집착하던 밀러처럼 이건 내게 꽤나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권선징악을 믿어 왔다. 타인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베풀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고 믿는다. 반대로 이기적인 행동은 불행을 야기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비약이라고 치부하기엔 세계 곳곳에서 분류를 위한 어마어마한 대학살이 자행됐고 심지어 이런 과거는 뭐 대충 청동기 시대쯤의 이야기도 아닌 꽤 최근의 일이다. 이쯤 되면 ‘지성인이 이런 짓을 했단말야?!’의 수준의 일이란 말이다. 파괴적 본능, 즉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나는 여지껏 무엇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이타적으로 행동해왔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매순간 이기심 대신 이타심을 선택하는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가령 얄미운 직장 상사가 은근슬쩍 내 공을 가로채고 심지어는 자신의 일을 떠맡길 때, 마음 속에선 쌍욕이 오가더라도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직장 상사에게 웃어보이며 일을 한다. (물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가 아니기에 이타”심”이라 말하기엔 부적절하다. 상사를 위해 내가 한 이타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주시길.) 지금껏 이런 작은 이타적 선택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완성되리라 믿어왔기에 나는 궁금하다.




 그래서 밀러처럼 답을 찾았는가? 아쉽게도 자로 잰듯 딱 떨어지는 정답같은 건 못 찾았다. 당연하다. 지난 수세기동안 좁혀지지 않던 성악설과 성선설의 간극을 한낱 직장인인 내가 요 며칠 고민한다고 어떻게 좁히겠는가. 그저 나만의, 어쩌면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작은 타협일지 모를 동그라미가 아닌 세모쯤의 답은 만들어 보았다. 인간이 파괴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적어도 인간은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행동보다 실행하기 쉬운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에의 유혹에 “유약한” 종이라 생각한다. 쉽게 유혹에 빠지기 때문에 지난 시간 동안 많은 과오를 저질러온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은 이타적 행동의 선한 영향을 학습할 수 있는 종임은 확신한다.(생각한다가 아니라 확신한다!) 밀러는 애나와 메리의 역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배웠고 그 의미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실현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 역시 밀러의 책을 통해 우생학의 참혹함을 배우고 데이비드의 이름을 학교 역사에서 지우는 오랜 숙제를 마친다. 대학살을 자행했던 많은 독일인과 세르비아인들 역시 지난 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하며 필요에 따라 법적 처벌을 받기도 했다. 적어도 인간은 파괴적일지언정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일례로 나는 지금보다 더 무지하던 시절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일반인이라 칭하는 과오를 저질렀고 과오를 깨닫곤 비장애인이란 명칭을 입에 붙이려 노력했다. 나는 때로 실수를 저질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이 실수를 극복해 나간다. 내가 내린 이 답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내린 삶에 대한 희망이자 이기심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정확한 답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자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길고 지루한 리뷰 글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아나서고 결국에는 그 답을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의미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나만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그 답을 찾기 위해 고뇌해 보았다. 그렇기때문에 이 책을 볼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너무나도 추천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시간과 의미를 생각하며 보낼 앞으로의 시간이 어떻게 다를지 기대가 되기 때문에, 이 기대감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눠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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