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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r 30. 2022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상상

므레모사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통해 김초엽 작가라는 신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 SF 장르를 굉장히 애정하기에 솔직히 웬만한 SF 클리셰란 클리셰엔 익숙하다고, 더이상 참신한 SF는 찾기 힘들거라고 자신했는데 이 책은 이런 나의 시건방(?)을 단 몇페이지 만에 박살 내버렸다. 총 일곱 개의 단편을 엮은 이 책은 각각의 에피소드에 김초엽 작가만의 감성으로 SF 배경에 우리의 삶을 자연스레 녹여 넣어 읽을 수록 내 마음 속 한 켠을 콕콕 찌르는 힘이 있다. 김초엽이라는 이름을 나의 장기 기억 저장소 어딘가에 굵은 글씨로 새겨 넣기 충분한 한 권의 책이었다는 말이다. 우빛속을 발간한 이후로 김초엽 작가는 제면소에서 면을 뽑듯이 줄줄이 책을 냈다. 그녀의 팬으로서 계속해서 책이 나오는 건 두근거리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치여 전부 읽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애석하기도 했다. (작가님 쉬엄쉬엄 일하세요…!)




 그렇게 제면소에 널린 면들 중 뭐부터 맛볼까 하다 고른 것이 “사이보그가 되다”, “방금 떠나온 세계” 그리고 “므레모사”이다. 김초엽 작가는 포스텍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베스트셀러 책을 출간했다. 말 그대로 문이과를 통달한 사기 캐릭터인 것이다. 그 이력만으로 그녀가 나와는 다른 탄탄대로 인생을 살고 있겠거니, 내 멋대로 상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력 하나만으로 작가로서 그녀가 들였을 노력을 과소평가해버리는 꽤나 부끄러운 편견이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작가가 본인이 가진 청각 장애를 고백하며 장애인의 삶, 그리고 비장애인이 개발한 장애 보조 기기들의 한계에 대해 장애인으로서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비장애인인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장애인만의 고충과 도움을 빙자한 비장애인들의 강요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장애와 결핍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방금 떠나온 세계”와 “므레모사”는 그런 그녀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대부분 결핍되었거나 비주류의 삶을 사는 인물이 등장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처지에 대응하는 방식이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결핍을 채우려는 선택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결핍이 결핍이 아님을 증명해 내거나 결핍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다. 특정 신체 부위가 절단된 장애인이 의수나 의족을 착용하는 것처럼, 인공 와우가 개발되었음에도 청각장애인이 소통의 수단으로 계속해서 수어를 고집하는 것처럼, 장애를 고치는 약이 나와도 먹지 않겠다는(자신의 장애가 결코 결핍이 아니라 주장하는) 장애권리운동가들 처럼. 지금껏 “주류”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아 잘 몰랐다고 변명하던, 지구상 곳곳에 존재하는 “비주류”라 선 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특히 므레모사는 SF에 공포(?)가 약간 첨가되었다는 소개글에서 부터 나의 구미를 당겼고 무엇보다도 겉표지가 정말 귀엽기 때문에…가장 기대를 했던 책이다. 그런 한편, 다 읽은 후 다소 아쉬움이 남는 책 역시 므레모사였기에 이 책을 이야기하고 싶다.










 귀여운 표지와 달리 이야기는 어둡고 수상쩍은 장소에서 시작한다. 이르슐의 한 도시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공장과 연구소가 폐쇄됐고 화재의 여파로 알 수 없는 유독성 화학물질이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후 정부는 이 도시를 폐쇄했다. 십여년의 시간 동안 도시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마침내  도시의 귀환자들이 모여들어 다시 삶의 터전을 꾸렸다. 귀환자들의 도시 “므레모사”이다. 철저히 폐쇄됐던 므레모사는 어느 순간 갑자기 개방됐고, 심지어 관광 허가가 내려진다. 무용가 “유안”은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은 후 의족을 착용한 채 무용을 계속하려 노력했지만 끊임없는 환지통 때문에 결국 그만둔다. 유안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왜인지 모르게 므레모사를 방문한다. 수많은 추측과 달리 므레모사는 어쩐지 평화롭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만 빼면. 관광 일행 중 한 명인 레오를 통해 유안은 이 달콤한 냄새의 정체가 “커맨드”이며 마시면 마실수록 므레모사의 암시(므레모사에 남고 싶게 만드는)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귀환자들 역시 이 암시에 빠져 므레모사로 모인 것이며 함께 온 관광 일행들 역시 속수무책으로 암시에 빠져든다. 충격적인 비밀은 또 있었다. 암시에 빠져든 사람은 종국엔 고목과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움직일 수 없게되고 사람들에게 암시를 되풀이한다는 사실을. 커맨드에 현혹된 사람들은 나무가 되고 이 나무는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현혹한다. 레오는 이 굴레를 멈추고자 방화를 저지르지만 유안은 다른 선택을 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통증을 유발하는 다리 때문에 그녀는 항상 정지된 삶을 동경해왔다. 므레모사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녀가 커맨드의 암시 때문이 아닌 자발적으로 므레모사에 남기를 선택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주인공 수남은 청각 장애인 남편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인공와우 이식 수술을 시켜준다. 장애도 극복했으니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나 싶었으나 남편은 부작용에 시달렸다. 이따금 들리는 이명때문에 결국 그는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 우울증에 빠져 이식된 인공와우를 스스로 제거한다. 끝내 그는 수남이 없는 사이 자살기도를  식물인간이 되었다. 남편이 장애를 극복하면 행복해질  알았던 수남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없다. “므레모사 유안의 연인 한나 역시 비슷하다. 유안은 갑작스런 사고로 발생한 다리의 결핍에 고통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채워진 다리(의족)로부터 받는 고통이  커졌다. 이런 유안의 재활을 물심양면 돕던 한나는 끈임없이 유안에게 무용가로의 재기를 속삭였다. 심지어 유안이 진심으로 무용을 그만두고 싶다고 고백했을 때도 그녀가 우울증에 걸린 것으로 생각해 그저 그녀를 설득한다. 한나는 계속해서 움직임을 독려했으나 결국 유안은 므레모사를 선택한다. 비장애인들 대다수는 이들처럼  장애를 결핍으로 생각한다. 결핍은 개선의 대상이고 채워주면 결핍이 해소될 거라고. 정작 장애인들은 원하지 않았던, 도움이란 이름  강요를 일삼고 그들의 결핍을 극복해야  대상으로 단정한다.




 므레모사는 주류(비장애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과 비주류(장애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 간의 이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꼬집는다. 물론 한나의 행동은 유안의 행복을 위한다는 진심에서 나온 것임은 틀림없다. 다만 유안이 치료해야 할 대상이라고 강요한 것 역시 진실이다. 일상을 돌아 보면 이처럼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국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행동이 꽤 발견된다. 나만 해도 한나처럼 행동한 적이 아마 많을 거다. 기억나는 일례로 고등학생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읜 H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배려랍시고 H 앞에선 엄마의 엄자 하나 꺼내지 않았다. 아빠 이야기는 하더라도 엄마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꽤나 세심하고 배려있다 생각했으나 H의 생각은 달랐다. 언젠가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괜찮으니 제발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의식하지 말고 말해달라 부탁했다. 어머니가 없는 H가 아닌 그냥 H로 생각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망치, 아니 수박만한 우박이 수직으로 머리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당황한 마음에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다급히 사과했으나 그 변명이 내 행동의 면죄부가 되진 못 했다. 고의가 아닌 걸 안다며 H는 내 사과를 받아줬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이 선명히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정말 많이 창피했나 보다. 분명 다들 이런 경험 하나 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나만 이렇게 어리석은건 아니길…) 심지어는 고의로, 알면서도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




 아주대학교병원 외상센터에는 닥터헬기가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헬기가 이착륙할 때 큰 소음이 발생한다. 병원 근처 주민들은 이에 지속적 민원을 넣었고 이 민원은 닥터헬기의 운영을 위협했다. 주민들(도심에 사는 주류들)은 집 도처에 아주대학교병원을 제외하고도 큰 병원이 많기에 상관없겠지만, 중증 외상 환자들을 치료할 여건이 안되는 지역의 환자들(지방에 사는 비주류들)은 닥터헬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생명을 살리는 헬기 소리를 조금도 참지 않는다. 또 최근 국민의 힘 당대표가 출근길 지하철 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를 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이미 과거에 협의가 된 사항에 대한 부적절한 시위가 서울 시민들의 출퇴근을 방해한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전장연 측은 이전부터 협의는 없었고 현재 장애인 리프트 시설의 열악함과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리프트 사망 사고를 꼬집으며 시위가 불가피함을 주장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한국 사회에는 장애인들을 위한 제도적, 시설적 지원이 매우 열악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장애인 전용 버스의 길고 긴 배차 시간이나 시외/고속 버스에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애초에 탑승조차 불가하다는 점에서 보여진다. 이 대표가 이런 현실을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진 각자가 판단하길 바란다.




 지금은 내가 주류라 비주류를 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 짓는 기준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비인기 종목인 여자 배구는 김연경이라는 천재적인 선수의 활약으로 올림픽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했고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엔 여성은 비주류였기에 참정권 자체가 없었으나 이는 현재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그렇다고 현재 여성이 주류의 반열에 올랐다기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또한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제 2 외국어로 중국어가 대세였으나 현재는 중국어를 재치고 태국어, 아랍어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주류들은 운이 좋아서 주류인 점을 망각해선 안된다. 유안이 자신이 비주류이던 세계를 떠나 주류가 되는 세계를 선택하는 상상은 판타지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가까운 우리의 이야기이다.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는 이렇듯 항상 머나먼 우주의, 미래의 이야기 같으면서도 익숙한 현재의 우리 이야기라 자꾸 돌아보게 되는 맛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뭐랄까… 이야기의 초반부터 나는 어느 정도 므레모사의 비밀을 눈치 챘다. 물론 이 책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독자를 놀래킬 목적의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움직임에 대한 유안의 거부 반응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니 자연스레 므레모사가 움직임이 결여된 곳이라 추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떠나온 세계”를 읽을 땐 매 에피소드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상상도 못한 전개에 눈이 동그래지길 반복했다. 장편 작품에서도 이런 느낌을 기대했는데 그 기대엔 못 미쳐 살짝, 아주 살짝…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고 “유안”이거나 “한나”이기에, 한 손에 잡히는 이 작은 책이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기에, 그리고 김초엽의 장편이기에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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