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상처

슬픈 소풍

by 서윤

마음속 상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봄소풍날 아침

눈을 뜨니까 엄마는 김밥이랑 계란이 담긴 도시락과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시면서 엄마가 바쁜 일 끝나면 금방 따라갈 거니까 먼저 학교에 가서 재미있게 놀고 있으라 하셨다.



소풍장소에 도착해서 게임도 하고 장기자랑을 하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내 눈은 엄마가 걸어오실 산 입구 쪽을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마음으로는 오신다 하신 엄마를 믿고 기다렸다.


어느새 점심을 먹는다는 선생님의 호각소리가 들려오고 가족끼리 각자 준비해 온 김밥, 떡, 전, 계란 과일까지 푸짐하게 차려놓고 행복한 웃음을 곁들여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의 엄마는 선생님을 모셔와서 같이 앉아 다정하게 점심을 먹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 금방 따라갈 거야 재미있게 놀고 있어 "


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도는데 먼 길에도 산길에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아래 쪼그리고 앉아 혼자 김밥을 먹고 계란을 먹는데 퍽퍽해서 그런지, 슬퍼서 그런지, 목이 메고 눈물이 볼을 적셨다.

봄 소풍이었는데 내 마음엔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었다.


엄마는 그날 내 생에 첫 봄소풍에 끝내 오지 않았고, 동갑내기 내 조카 그 남자아이에게 가신 거다.

조카와 나는 산 넘어 다른 학교를 다녔고 엄마의 선택은 내가 아니라 손자였던 것이다.


난 또 그렇게 ' 니까짓 거 ' 가 되어서 슬픈 소풍날이라고 그림일기장에 눈물을 그려야 했다.

보물 찾기에서 두 개의 보물을 찾았지만, 엄마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 이후 초등학교 내내 소풍날이든 운동회날이든 엄마는 나를 보러 오신 적이 없다.


엄마는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조카에게 향하셨고, 내가 고전무용을 아무리 예쁘게 해도 달리기 1등을 해도 청백전에서 우승을 해도 나의 모든 걸음은 엄마에게 무관심이었다.


자라는 내내 조카와 구슬치기를 해도, 딱지치기를 해도 나는 무조건 잃어줘야 했고 져줘야 했고 조카가 ' 그거 내 거야 ' 하는 순간 난 모든 걸 꺼내주어야 했다.


조카와 다투기라도 하는 날엔 부지깽이가 싸리빗자루가 내 몸을 강타했고, 그 모습을 조카는 ' 그것 봐라 진작에 주지 '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맞고 있는 내게 메롱을 날리곤 했다.


엄마는 나에게 경쟁도, 소유도, 창의도 허락하지 않았고, 조카와 잘 놀아주고 져주고 그로 인해 조카가 웃으면 그게 엄마의 행복인 듯 느껴졌었다.



살면서 가끔 나는 이상하게도 행복한 날 꼭 슬픈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는 눈치를 보게 된다.

내 것이 아닌 행복을 내가 느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슬플 때 웃고,

힘들 때 씩씩하고,

외로울 때 환하게 웃고,

감정을 거꾸로 표현하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꼭꼭 숨긴 채

사랑받고 자란 사람 흉내를 낸다.


사람들은 밝고 씩씩한 나의 모습을 좋아하고 나는 또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게 좋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진짜 슬프고 외롭고, 힘들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를 설명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착한 사람 좋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나의 자아를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의 의지를 꺾었고 희생을 강요하고 복종을 가르치면서 조카의 그림자로 살기를 바라셨다.


그게 딸을 낳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있는 전부인 것처럼 나를 향한 미움을 키우고 계셨던 거다.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


사실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진짜 힘든 시간을 견뎌 낸 사람이라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가재는 게 편이다 ' 라는 말처럼 비슷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힘들고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안아주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도 그 사람이 위로받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전부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타인의 삶을 전부 이해하기엔 우리의 삶이 각자 다르고 아픔의 크기도 다 다르기 때문에 섣부른 조언은 오히려 반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랬다, 이렇게 해봐라, 이러니까 좋았다 ' 식의 말을 상대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이 뭘 아냐고, 진짜 아픈 게 뭔지는 아냐고, 나만큼 아파보기는 했냐고 화를 냈던 적도 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아픔과 싸우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 나 ' 가 아닌 ' 그 ' 를 우선시하고 나의 모든 문을 활짝 열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겠다는 진정한 마음이 중요하다.


그가 먼저 스스로 자기 내면의 것을 꺼낼 수 있도록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음을 주는 것, 그게 진짜 힘을 내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