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요.' 보다 '고마워요'가 좋은 이유
버스 안에서.
나의 출퇴근은 주로 버스를 타거나 두 발로 걷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다.
두 발로 걸을 때는 걸으며 보는 길 위의 자연이 주관심사라면, 버스 안에서는 사람이다. 주로는 버스 기사 아저씨를 본다. 버스에는 모두 모르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버스 기사 아저씨와 나는 단 몇 초라도 교류를 한다. 버스에 올라타며 카드 태그 하는 시점과 벨을 누르고 내리는 시점의 암묵적인 시선 교차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주로 기사 아저씨를 한 번쯤은 보게 되는데,
그러나 그날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던 분과의 교류 이야기다.
낮에 버스에 탑승하는 분들 중에는 카트를 끌고 타시는 분들이 있다. 그럴 땐 분명 그 안에 묵직한 것들이 들어있는데, 주로는 식료품이다. 그날, 내가 만난 분도 묵직한 카트를 들고 버스에 올랐는데, 내릴 때 나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리려 일어나셨다.
나 또한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반대편에 서 계신 그분의 카트가 보였다. 무엇이 들었는지 무척 무거워 보였고, 그 카트를 보며 마음속으로 '도와드려야겠구나' 했다. 버스가 정차하고 문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하차 계단으로 옮겨진 카트가 계단 끝에 걸려있었고 바퀴마저 묵직해진 몸체의 무게에 눌려 움직이지 않았다. 카트 주인은 '끙' 소리를 내며 어쩔 줄 몰라했고 나는 카트 한쪽을 붙들어 주며 "도와드릴게요." 했다.
그런데, 그분은 카트를 꼭 붙들고 더 힘차게 밀며 '됐어요. 괜찮아요'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렸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은 마음이 남아 벌써 지나가 버린 버스를 자꾸 되돌아보게 했다.
그분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친 것이 민망하고 싫었을지 모른다. 혹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젊은 분이어서 도움받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이것 하나 못 할 정도로 늙진 않았어'라는 마음이었을지도.
그렇든 저렇든 '됐어요.'란 표현은 상대를 수용하는 표현이 아니라 밀어내는 표현이며 상대가 보낸 감정을 거절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늘 거부당한 감정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무안하고 당황스럽다. 물론, 우린 무심결에 '됐다.' '괜찮다.'를 자주 쓴다. 더구나 힘든 세월을 살아오신 어른들에겐 다정하고 나긋한 표현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쩜 어떤 분들에게 '됐어요. 괜찮아요.'가 '고마워요'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상대를 이해하려 한참을 노력한 끝에 도달하는 나를 위로하는 이해의 지점이다. 상대가 보내온 것은 명백한 거절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런 상황에선 '됐다.' '괜찮다' 보단 '고마워요'가 적합한 말이라 생각된다.'고마워요'는 상대의 생각과 배려를 고스란히 수용하는 말이며 거기에 다시 자신의 마음을 얹어 보내는 감정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별거 아닌 일에 조금 깊은 생각을 담으며 돌아왔다.
별거 아닌 일에서 나는 가끔 삶의 지혜를 배운다. 상대의 모습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른말이 무엇일지 더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