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먹는여우랄라 Mar 22. 2023

[결혼 20주년, 한 남자와 20년을 살다니!]


놀랍다!

20년 동안 남자가 안 바뀐 게 놀라운 게 아니라

20년이란 ‘시간’을 함께 지켜온 것이 놀랍다.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관계가 수없이 변해왔다.

좋은 친구라 여겼던 우정도 변하고 정말 좋았던 사람들도 처음에 좋았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미움이 가득할 때도 있었다. 사람간의 관계라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학교, 회사만해도, 하루종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래저래 불편하지 않았던가..심지어 짝꿍은 책상에 금 긋고 ‘넘어만 와 바라’를 짝꿍이 바뀔때마다 되풀이했고

고무줄 끊어서 울고 준비물 뺏어가서 울고 싸우기를 몇번인가.

회사에선 또 어떤가, 처음에 좋아보이던 사람들이 3개월만 지나도 '또라이 새끼' 아니면 '재수없는 인간'이 된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들만 또라이고 재수없는 게 아니었으리라. 나도 또라이, 재수땡이였을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겐 또 그런 존재가 될수 있다. 누구나 못난 면이 있고 상대가 힘들만큼 이상한 면이 있을테니.


그런데, 유독 한 남자와는 그 모든 시간과 상황을 넘어 20년을 지켜온 것이다.

한 공간에서, 결혼이 가진 수많은 의무와 책임들을 지켜내면서 말이다.

참으로 대견하다.

자연스레 지나온 시간이지만, 가만 돌이켜보면 그 20년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더불어 감사한 일이고 잘한 일이다. 나를 쓰담쓰담 칭찬하고 싶고 나와 함께 해온 그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짝을 토닥토닥 해주며 ‘애 썼다’ 말해주고 싶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많은 배려와 희생, 노력과 책무를 기꺼이 다함이다. 그러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물론 50년, 60년을 함께 사신 분들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만큼 보잘것 없는 시간이라 깨갱깽 꼬리를 내리고 뒤로 빠져있어야 하겠지만, 한 개인에게 모든 순간은 소중하므로 오늘이, 내 딴엔 참 감회가 새롭다.



우리가 20년을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들을 되짚어 보자면,

가장 중요한 이유로,

아마도 자식 농사라는 공통된 과업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 얼굴만 봐도 나와 너를 쏙 빼닮은 아이들, 거기다 하는 짓까지 나와 너를 피해갈 수 없게 닮았으니, 이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양육본능을 자극한다.

거기에 20대에 내가 그를 사랑했던 바로 그 콩깍지의 원인이 되었던 성품과 행동양식들을 아이들이 가지고 있음을 볼 때, 나는 한 번씩 소름돋게 놀라곤 한다. 지금은 언제 우리가 그리 뜨겁게 사랑했나 싶게 일상이 되어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서 그를 사랑했던 이유를 발견할 때마다 그 때의 사랑이 다른 형태로 가정 안에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음을. 지금은 다른 형태와 모양을 가진 사랑이지만 그것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지금은 편안하게 함께 하는 남편의 모습으로 따뜻한 온정과 돌봄을 다하는 아빠의 모습으로, 가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라는 형태라는 것을. 그러니 한번 또 함께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인정하기 싫지만, 시간이란 녀석이 쫓아가기 힘들게 빠르다는데 있다.

그러니 시간이란 것에도 감사해야겠다.

결혼과 동시에 내겐 다섯 손가락으론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역할이 주어졌다.

엄마, 주부, 아내, 며느리, 직업인 등등. 이 역할은 다섯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는만큼 역할마다 수행해야할 과업들 역시도 한 손으로 셀 수 없을만큼 여러가지였으며 종류도 다양했다. 그 일들을 다 해 내려면 주어진 일에 급급해서 깊이 생각하고 실행할 겨를이 없다. 매일 주어진 집안 일과 내 직업적 일을 하고 나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실행해야 할 만한 일들은 뒤로 밀리기 일쑤다.

‘뭐 이건 좀 별로지 않나’ 생각하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2~3년이 훌쩍 가 있고

‘이 사람...진짜 계속 이렇게만 해봐. 가만 안 있을테니.’하며 벼르고 있었는데 아이들 치닥거리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언제였나 싶게 시간이 가 버리는 꼴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디게 갔어도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미우면 미운 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게도 감사한다.



이렇게 쓰다보니, 결혼생활 20년을 시간과 상황에 쫓겨 나도 모르게 지나왔노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일이란 것은 시간과 상황만으론 이어지지 않는다. 그 안엔 여러 복합적인 생각과 가치가 담겨 있고 그것이 시간과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디게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과 상황을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늘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인정했기 때문이며, 사랑이란 것이 단일한 1차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감정의 복합체며 그들을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란 것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20대에는 극렬한 그리움과 뜨거운 열정과 욕망이었다면 지금은 따뜻한 온기와 배려, 매일을 한결같이 지켜냄이며, 최선을 다하는 책임과 헌신 역시 사랑임을 안다. 사랑은 이처럼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 열정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거나 극렬한 그리움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엔 사랑은 복합적이다. 우리가 가진 여러 감정들의 통합이고 그 감정들을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다. 이를 알아가고 받아들여 가는 과정을 나는 20년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 그 시간을 이해와 수용으로 지켜온 나와 그에게 조촐한 축하 파티로 칭찬하고 싶다.


나와 그의 20주년,

결혼 기념일을 축하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됐어요.' 보다 '고마워요'가 좋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