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에게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이번 여행의 이유 중 70% 이상의 중요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전날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밤 12시까지의 강행군을 했음에도 다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오픈 전에 도착해 줄을 서야 닌텐도 월드 입장이 가능할거란 인터넷 정보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인터넷 정보가 살짝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가는 날은 일본의 골든 위크가 끝난 직후였고 더구나 평일 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심하는 마음과 달리 발은 빠르게 움직이며 지하철로 이동하는데, ‘이쿠’ 사람이 어머어머하다. 지하철부터 꽉 메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유니버셜 시티역에 도착하자 인파에 밀려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의 여행의 성공 여부를 가름할 중요한 지점에서 망하면 안 되겠다 싶어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입장하기 빠른 줄을 찾아갔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앞에 줄이 어마무시했지만 다행히 9시에 맞춰 입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딸아이가 강조했던 그 ‘닌텐도 월드’도 12시에 예약을 완료했다. 고작 놀이공원인데, 경쟁 상황에 놓이니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고 예약이 완료되었다는 메세지를 받으니 뭔가 해낸 듯한 묘한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인터넷 정보를 의심하며 안일하게 굴었다가 닌텐도 월드 입성이 무산되었다면, 이건 ‘한 3년 원망각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완수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연신 커피 마실 곳을 찾았는데, 이 또한 줄이 길다. 그런 와중에 아이는 다음 일정을 브리핑한다. 대기 시간이 짧은 놀이기구를 타고 그 다음은 해리포토존, 다음은 쥬라기월드, 닌텐도월드, 그리고 미니언즈와 스파이더존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일정 브리핑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아이의 발에 맞춰 죠스 보트 앞에 섰다. 놀이기구 앞에서 대기하고 타고를 반복하다가 닌텐도월드에 도착했다. 닌텐도 월드는 정말 닌텐도 화면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었고 딸아이는 연신 ’엄마 이것봐‘라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예쁘게 꾸며놨다던 닌텐도 카페는 대기 1시간, 닌텐도 트레인도 대기 1시간 이상이란 표지판과 함께 어마어마한 줄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있었다. 아이는 열심히 사진만 찍고 채 1시간이 안 되어 나왔는데, 날은 덥고 이 1시간을 위해 그렇게 동동 거렸나 싶은 생각이 드니 맥이 빠지며 더욱 쉬고 싶어졌다.
“딸아~ 엄마 커피. 비서로 쓰더라도 커피는 좀 맥여주세요~ 네?”라고 했다.
‘아뿔사! 이 농담이 아이의 눈물의 단초가 될 줄이야.’
1차 실수가 발생한 시점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꼬이더니 지금까지의 헌신이 도루묵이 되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엄마가 무슨 비서야? 내가 이런 말 할 줄 알았어.”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엄만, 농담한건데.”라고 받아쳤지만
그 뒤로 아이의 침묵이 이어졌다.
쥬라기 월드에서도, 미니언즈에서도 말이 없었고 이어서 타는 놀이기구들이 내겐 너무 어지러웠다.
지루함과 어지러움을 참고 있는 내게, 딸이 물었다.
“지루해?”’
“응.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엄만 그럼 뭐 하고 싶은데?”
“응? 하고 싶은 거 없는데”
아차, 2차 실수 발생이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고 싶은 게 없어?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럼, 엄만 왜 왔어?”라고 아이가 물었기 때문이다.
“엄만 너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해 주려고 왔는데.”라고 진실을 말했지만, 무언가 잘못된 듯 아이는 시무룩해지더니 이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오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왔냐는 둥, 내가 언제 비서 노릇하라고 했냐’는 둥’ 눈물을 훔치며 쏘아 붙였다.
분명히 오사카는 딸아이의 소망이었고 친구들과 함께 갔으면 하는 나와 친구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둘만 가고 싶다 했고, ‘이 여행은 전적으로 널 위한 것이니, 네가 다 준비했으면 좋겠다. 너에게 맡긴다.’라고 했을 때, 아이는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이제 제법 컸으니 스스로 준비하고 자기만의 계획대로 전적으로 움직이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구나. 그럼, 나는 그렇게 해 주고 뒤로 빠져서 다툼 없는 여행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렇게 여행이 결정되었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딸아이는 신나서 검색했고 모든 준비를 즐거워했다.
그런데, ‘왜 우는 걸까? 전적으로 딸 아이 의견에만 맞춰 쫓아다니고 있는데, 왜?’
돌연 화가 삐죽이 튀어나오며 입 밖으로 쏟아졌다. 고작 농담 한 번에 침묵과 시무룩해서 눈물까지 보이는 이유가 뭐냐고, 네가 친구들 없이 둘만 오고 싶었던 건 네 마음껏 계획하고 실행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그거 맞춰 주려고 나는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고 그랬더니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게 특별히 없었는데, 그것까지 뭐라고 하는 거냐며 너무 많은 걸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니냐며 나 역시 쏘아 붙였다.
아이는 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우린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리고 숙소에 누워 ‘뭐가 잘못 되었을까?’ ‘나는 왜 이리 화가 나는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싸우지 않고 즐겁게 여행하면서 아이와 좋은 추억을 쌓길 바랬는 데, 무엇 때문에 아이는 속상했을까?‘ 생각하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왜 울었어? 뭐가 그리 속상했어?“라고 물으니
“엄마가 오기 싫고 가기 싫은 것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고 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도 나는 아이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 했다. 그래서 그저 또 똑같이 내 생각을 전했다.
“그랬어? 아니야. 이번 여행은 널 위한 여행이 되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네가 하자는 것 니가 가자는 데 가려고 했고 엄만 전적으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 뿐이야. 너랑 여행 온 건 너무 좋아. 다만 놀이기구는 엄마한텐 조금 힘들었고 엄마가 오사카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이 오다보니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사실 없어. 미안해.”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알겠다’며 웃었고 저녁으로 일본식 고기구이(야키니쿠)를 먹으며 다음 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아이에게 한 껏 생색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이 여행은 널 위한 거다.’라는 유세 가득한 마음가짐을 앞세워 여행에 동참하기 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세하는 마음이 있으니 여행 내내 쉽게 지쳤고 피곤해 했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아이에게 비췄다는 생각이 드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사실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위해 여행을 왔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다만, 아이가 원한 건, 단순했는지 모른다. 그저 엄마가 여행을 함께 즐기고 때때로 호응해 주길 원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아이를 위해 P유형으로 변신해 주겠다는 공약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의 계획적 성향을 줄이고 아이를 존중해준다는 의미에서의 P유형을 생각한 건데, 나는 이를 계획하지 않고 뒤로 빠져버리는 것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건 유형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존중하고 호응하는 태도의 부족이다.
또한 ‘계획형 끼리는 싸울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계획형은 그저 유형일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서로의 의견을 묻고 조율할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박사는 [당신이 옳다]에서 이와 같은 유형론이 인간의 유일성과 개별성을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그 유연함을 무시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4가지, 6가지, 9가지 혹은 16가지 유형으로 전 인류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세로 사람을 분류하거나 같은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마치 비슷한 DNA를 가진 인간인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여러 유형론의 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개졀적인 존재’라는 명제는 초라하고 부질없는 말처럼 들린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의 실수를 조금 거창하게 빗대어 설명하자면, 인간의 유연함과 다양성을 축소평가했는지 모른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유연하다. 계획형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무조건 유형의 문제로 돌린다면 모든 계획형은 서로 마주하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모든 계획형이 부딪히는 건 아니다. 엄마인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면서도 딸아이와의 조율과 설득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계획형의 유염함은 엄마인 내가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는 그 유연함을 보며 배우고 성장했을텐데, 나는 사춘기 아이의 뾰족함을 유형의 문제로 치부하며 지레 겁을 먹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 중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말은 ’맛있다. 재밌다. 우리 딸이 벌써 이렇게 다 컸구나. 이렇게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준비한 걸 보니. 대견하다. 너와 함께 오게 돼서 너무 좋다.‘라는 말과 호응하는 태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