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을 통해 본 달의 표면과 목성의 위성들의 의미
영화 <갈릴레오>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가 저술한 희곡 <갈릴레오>를 Joseph Losey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천문학과 물리학을 연구한 학자다. 1609년 겨울, 그당시 가장 뛰어난 망원경을 통해 천체 관측을 하였고 그 관측을 통해, 60여년 전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던 지동설이 맞다는 과학적 증거를 밝혔다. 17세기 초 였던 그 당시,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은 위험천만한 이론이었다. 모든 권위의 중심이었던 교황청은 천동설을 정설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에서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모든 천체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이 맞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신의 과학적 발견을 1610년 3월 <Sidereus nuncius(Starry Message – 별들의 메시지)> 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교황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교황청은 종교재판을 열어 갈릴레오의 과학연구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갈릴레오 재판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종교재판은 1610년경부터 1633년까지 진행되었다. 영화 <갈릴레오>는 갈릴레오가 행한 과학적 발견과 그 과학적 진실과 종교와의 싸움을 매우 잘 보여준 영화다.
이 영화의 중요한 몇가지 장면 (씬, Scene)들을 통해, 갈릴레오 재판의 과정과 인류사상사적 의미, 그리고 더 나아가 과학자의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책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내가 뽑은 장면 하나: 씬 3 (Scene 3)
망원경이란 것이 네덜란드에서 발명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재빨리 훨씬 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설계하고 만든다. 그리고는 그 망원경이 지상에서 멀리 있는 물체들을 크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체관측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며칠을 혼자서 천체관측을 한후에, 어느날 갈릴레오는 그의 친구 사그레도 (Sagredo)를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갈릴레오 자신이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을 사그레도에게도 직접 체험하게 한다.
갈릴레오가 사그레도로 하여금 망원경으로 처음 보게 한 천체물질은 달이었다. 사그레도는 망원경으로 달의 표면이 울퉁불퉁함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소름이 끼친다'고 말한다. 왜 사그레도는 달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두려워했을까. 그것은 지난 이천년 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신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는 우주는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로 나뉜다. 그리고 지상의 세계는 불완전하고, 천상의 세계는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구는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완전한 천체들은 표면이 매끄럽다는 주장이다. 달은 천상세계의 일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만든 20배로 확대된 망원경을 통해서 본 달의 표면은 불완전한 지구의 표면처럼 울퉁불퉁한 산투성이였던 것이다.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는 서로 다를 바가 없는 유사한 물체들이었다.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를 나누던 종교적 과학적 도그마의 몰락이었다.
갈릴레오는 사그레도에게 은하수 (The Milky Way)가 수많은 별들이 모인 것임을 보여준다. 사그레도는 갈릴레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론과 관계된 현상은 보았나?’ 그러자, 갈릴레오는 며칠전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주위에서 보여지는 네개의 작은 별들과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언급한다. 두사람은 같이 그 별들을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다. 그런데, 사그레도가 보았을때는 별이 세개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네번째의 별은 목성의 뒷편으로 움직여서 보이지 않게된 것이었다. 이 작은 별들은 바로 목성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들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작은 별들이 큰별 주위를 도는 현상은 우주에 흔하게 널려 있었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처럼 말이다.
사그레도는 갈릴레오에게 묻는다. ‘그럼, 신은 어디에 있나?’ 그리고 두려움에 찬듯이 비명에 가깝게 큰소리로 묻는다. ‘너의 우주세계 속 어디에 신이 있냐고!’
갈릴레오가 답한다. ‘우리 안에. 아니면 아무 곳에도 없어. (Within ourselves. Or—nowhere.)’
사그레도는 10년전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회에 의해 화형으로 죽음을 당했던 사람을 언급한다. 그 사람은 지오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였다. 갈릴레오는 말한다,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멍청이였어! 그는 너무 빨리 주장을 했어. 만일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었으면 처형되지 않았을거야.’ 사그레도는 믿지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넌 정말로 증거가 차이를 만들거라고 생각하나?’ 갈릴레오는 이에 답한다, ‘난 인간을 믿네.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들 뿐이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는 부정할 수가 없어. 곧 모든 사람들은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네.’
갈릴레오는 인간의 이성을 믿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같은 과학자들이 이끈 과학혁명이 17-18세기의 계몽시대 (혹은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지오르다노 브루노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 브루노는 한때 이태리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였던 철학자였다. 16세기말, 브루노는 직관과 순수한 논리적 사고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태양 또한 우주 중심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 당시에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현대과학은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밝혔다. 지구와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수(Milky Way) 또한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수많은 은하계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을 뿐이다. 우주에는 중심 자체가 없다. 이 현대천문학의 우주관은 놀랍게도 16세기 말 브루노가 직관과 순수한 논리적 사고에 의해 도달했던 우주론과 매우 흡사하다. 그의 우주론은 교회의 도그마였던 천동설을 부정하였고, 교회는 브루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감금한다. 그후 7년동안의 재판을 통해 브루노는 이단자로 규정이 되고, 화형에 처해 죽음을 당한다. 17세기 벽두인 1600년 2월 17일이었다. 그 종교재판을 집행한 종교재판관들 중에 한사람이었던 추기경 벨라민 (Bellarmine) 을 기억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은 브루노와는 전혀 다르다고 확신했다. 브루노는 과학적 증거가 없이 순수한 직관에 의지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고 보았다. 갈릴레오 자신은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들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누구나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친구인 사그레도는 갈릴레오의 안전을 염려한다. ‘자네가 증거를 믿는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불에 타는 육신의 냄새를 맡게 되네.’
브레히트가 사그레도라는 비과학자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사그레도는 비과학자이지만 상식과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다. 교회가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던 천동설은 틀리고 지동설이 맞다는 것은, 상식인이면 누구나 망원경을 통해 직접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1610년 가을에 이르면, 갈릴레오의 망원경같이 정교한 망원경을 다른 사람들도 만들어, 자신들의 두 눈으로 갈릴레오의 발견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베니스의 상인이었던 안토니오 산티니(Antonio Santini)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산티니에겐, 갈릴레오의 주장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멍청하거나 고집쟁이에 불과했다. 이렇듯, 이제 더 이상 천문학은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복잡하고 전문적이던 천문학이 갈릴레오와 그의 망원경으로 인해, 저잣거리의 만담 소재가 되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과 우주의 모든 만물을 다 만들었다는 유일신의 존재를 기반으로 세워진 중세 신정체제가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사건이었다. 망원경을 통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대중화, 이것이 갈릴레오가 인류사회에 끼친 가장 뛰어난 업적이었다. 갈릴레오와 교황청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_mI1CEDl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