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엘리트 세력의 과학적 진실에 대한 반응
내가 뽑은 장면 둘: 씬 4 & 5
친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교황청을 설득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식적으로 받아드리도록 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에 옮긴다.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는 용기 있는 과학자로서 당연한 결정이었다. 갈릴레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고향 투스카니 지역의 당시 영주를 정치적 후원자로 얻는 것이었다. 그 영주 집안은 메디치(Medici) 가문으로 교황청과 사적으로 친분과 영향력이 꽤 있는 집안이었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네 개의 위성들의 이름을 코시모 왕자와 세 형제들의 이름으로 지어준다. 그 대가로, 투스카니 지역의 피사 대학 교수이면서 영주 직속 철학자이며 수학자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영화 <갈릴레오>의 씬 4 (Scene 4)는 투스카니 지역의 수도인 플로렌스에 소재한 갈릴레오의 집에서 벌어진다. 나이 9살의 코시모 디 메데치 왕자와 시종장 (Chamberlain), 궁정의 숙녀와 신사들, 대학교수들이 갈릴레오의 집을 방문한다. 갈릴레오는 왕자 코시모와 모든 방문객들이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의 진실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철학교수와 수학교수는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기를 거부한다.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아름다운 우주론 (천동설)이 이미 있는데, 왜 우리가 그 형헌할 수 없는 조화로움에 불협화음을 일으킬 사실들을 찾아야하느냐고 말한다. 망원경이 가져다 주는 진실이 자신들을 어느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인지를 걱정한다. 수학자는,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하늘에 존재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괘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둘 다 망원경을 보기를 거부한다.
갈릴레오는 그들에게 그저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라고 읍소한다. 진실을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을 하라는 것이다. 이미 권위를 잃은 이론을 붙들지 말라고 한다. 학자의 의무는 기존의 권위를 의문없이 받아들이는 대신에, 권위를 흔들어대는 것이지 않냐고 말한다.
이렇게, 쓸모없는 논쟁만 지껄이다가 정해진 방문시간이 다 넘어가자, 왕자와 궁중의 신사숙녀들은 갈릴레오의 집을 떠난다.
이 씬은 약간의 과장이 있다. 브레히트는 영주 계급을 희화화하려고 했던 듯 싶다. 사실, 그 당시 투스카니 지역의 영주는 9살이 아닌 20살의 코시모 2세(Cosimo II)였다. 그가 어렸을 때, 갈릴레오는 여름방학 때마다 그 지역을 방문하여 수학 개인교습을 해주고는 했었다. 1610년 갈릴레오는, 목성의 네 개의 위성들의 이름을 그 코시모와 세 형제들의 이름으로 지어주는 대가로, 피사 대학 교수이면서 영주 직속 철학자이며 수학자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후, 메디치 가문을 통해, 교황청의 관련 고위 성직자들과 교분을 나누게 된다. 그중에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은 마페오 바베리니(Maffeo Barberini)다. 이 이름은 다시 나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견이 맞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갈릴레오는 코시모의 재정적 도움으로 자신의 망원경과 똑같은 망원경을 10개 만들어, 사용법과 <Sidereus nuncius (Starry Message – 별들의 메시지)> 책 한 부를 각각 동봉하여, 군주나 대주교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급한다.
각계의 소위 엘리트들이 갈릴레오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였나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먼저 과학계에서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사용하는 방법이 그리 쉽지 않아서, 그 망원경을 통해서 갈릴레오의 발견들을 확인하는 작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엔 갈릴레오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으나 곧 과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유명한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는, 갈릴레오의 발견들이 사실임이 받아들여졌다. 그 천문학자들 중에 첫 옹호자는 그 당시에 갈릴레오 다음으로 유명했던 케플러였다. 케플러는 태양계에서 혹성들이 태양주위를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 아니라, 타원을 그리며 돈다는 사실을 밝힌 유명한 천문학자다. 그는 1610년에 즉시 갈릴레오의 발견이 과학적 사실임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과 더 많은 철학자들은 지구가 움직이면 우리는 어지러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갈릴레오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씬 4에 나오는 철학자와 수학자가 그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렇지만, 그 당시 과학계에서 지동설이 정설로 굳어지게 되는데,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로마교회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 질문을 브레이트는 씬 5에서 다룬다. 씬 5는 로마대학 (Roman College)의 한 건물의 복도에서 벌어진다. 갈릴레오는 복도 가장자리에 위치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 그때, 일군의 수도승들과 학자들이 들어오며, 지동설에대해 낄낄대며 조롱을 한다. 한 수도승은 돌고 있는 지구위에 있다는 것 처럼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 시작하며 말한다, '오오 지구가 빠르게 돌고 있다. 현기증이 난다.' 그러면서 한 교수에게 자신을 잡아달라고 간청을 한다. 다른 수도승들과 학자들이 그 조롱에 합류한다. 그리고 한 수도승은 성경을 들고 갈릴레오에게로 가서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분개를 한다. 그때 늙은 추기경이 등장하여 분개한다. '갈릴레오가 인류를 우주의 중심에서 어느 변방으로 옮겨 놓았다. 따라서 갈릴레오는 인류의 적이며, 그렇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소리친다. 한 수도승이 갈릴레오가 옆에 있다고 알려주자, 늙은 추기경은 갈릴레오에 다가가서 부들부들 떨며 말한다. '자네가 바로 그 작자였나. 자네와 우리가 화형을 시킨 놈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구먼.’ 그러면서 흥분에 휩싸여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 저기를 빙빙 도는 사소한 별위에 있는 하찮은 사람이 될 수 없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나는 지구의 중심이고, 창조주의 시선은 나에게 있다.' 너무 흥분을 한 탓에 '신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라고 소리치다가 힘을 잃고 긴 의자에 주저앉는다.
그때, 교황직속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가 등장한다. 씬 4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종장은 갈릴레오에게 왕자 코시모는 로마에 있는 교황직속 천문학자의 의견을 물어볼거라고 말했는데, 그가 바로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와, '그가 맞다. (He's right)'라고 짧게 말하고는 사라진다. 젊은 수도승이 갈릴레오에게 다가와, ‘클라비우스 신부가 "이제 신학자들이 천국을 바로 잡아야한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당신이 이겼어요.’
이 씬 5는 그 당시 로마교회 안에서 처음 나온 여러 반응들을 잘 묘사하였다. 교회의 여러 분파들 중에 대표적인 두 파는 예수회(Jesuits)파와 도미니칸(Dominicans)파였다. 예수회파는 교육과 사회정의에 중점을 둔 반면에 도미티칸파는 설교와 신학적 토론을 중시하였다. 예수회는 속된 말로 똑똑한 신부들이 소속된 파였던 반면에, 도미니칸 소속 신부들은 주로 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가 주된 임무여서, 지적 능력보다는 신자들을 감동시킬 설교를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와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파의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한 반응은 정반대였다. 갈릴레오의 책이 나온 후, 많은 예수회 소속 신부들은 그의 과학적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면, 갈릴레오의 책이 나온 해인 1610년, 로마 대학(Roman College)은, 학생, 교수들뿐만 아니라, 제후들, 고위 성직자들, 추기경들이 참가한 특별모임을 열어,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한 총평회를 연다. 그 모임에서, 갈릴레오 입회하에, 그 대학교수이자 신부 한 사람이 갈릴레오의 책에 대한 찬사의 발표를 하였다. 클라비우스 신부 또한 예수회소속이었다.
이에 반하여, 도미니칸 소속의 몇 신부들은 갈릴레오는 성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며, 교황청에 탄원을 하기 시작한다. 이에, 교황청의 이교도 심문소(Holy Office)은 갈릴레오 발견의 이단성에 대한 검증을 시작한다. 몇 년간의 고려 끝에, 1616년 이교도 심문소는, 11명의 신학자들의 갈릴레오의 주장이 이단적이란 보고서를 바탕으로 평결을 내린다. 이때의 평결은, 갈릴레오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리고, 갈릴레오에게 더 이상 지동설을 과학적 사실로 주장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 조치였다. 이에 갈릴레오는 저항없이 그러겠다고 한다. 물론, 그건 말뿐이었다. 그후 갈릴레오는 비공개적으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 수행한다.
그러던 갈릴레오에게 한줄기의 희망이 찾아온다. 1623년, 교황 그레고르 15세가 죽고, 마페오 바베리니(Maffeo Barberini)가 새로운 교황(어반 8세)으로 선출된다. 갈릴레오가 메디치 가문을 통해 사귄 친구인 바로 그 바베리니였다. 바베리니는 그 몇 년 전에 자신이 쓴 장문의 시에서, 갈릴레오의 천문학적 발견을 칭송할 정도로, 수학과 과학에도 나름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이 새로운 교황에 대해 갈릴레오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새로운 책을 쓰기 시작한다. 지동설을 다시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1632년, 갈릴레오가 희곡의 형식을 빌려, 지동설을 주장한 책을 펴낸다. 그 책의 제목은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 두 세계관에 대한 대화록)>이다. <대화록>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책에서 틀린 기존의 세계관을 주장하는 한 인물과 정확한 새로운 세계관을 주장하는 다른 한 인물이, 서로의 세계관을 주장하는 형식의 글이었다. 그 책에서, 갈릴레오는 지동설이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존의 세계관을 주장하는 인물을 조롱하듯 글을 쓴다.
불행하게도 그 책의 내용을 접한 바베리니는 그 책에서 조롱된 그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격노한다. 그들의 오래된 우정은 깨지고 만다. 바베리니는 교황이 된 후에, 매우 변덕이 심했고, 교황이 되기 전에 사귀었던 몇 친구들을 매정하게 떨쳐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갈릴레오도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갈릴레오는 자신의 바베리니와의 우정과 바베리니의 지적 고결성을 너무 과신했던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바베리니는 갈릴레오에게 로마에 소재한 이교도 심문소(혹은 종교재판소, Holy Office)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633년 2월에 로마에 도착한 후, 갈릴레오는 그 후 몇 개월 동안, 여러 차례 종교재판소에 출두하여 취조를 당한다. 결국 협상 끝에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부정하고 참회하는 조건으로 가택연금의 처벌만 받기로 한다. 그리곤 1633년 6월 21일, 69세 고령의 갈릴레오는, 재판관들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동설을 부정하며, 다시는 그러한 주장을 입에도 담지 않겠다고 말한다. 재판 후에 갈릴레오가 '그러나 지구는 여전히 움직인다. (And yet it moves.)'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후 갈릴레오는 남은 9년의 마지막 생애를 가택연금 속에서 지낸다. 그것이 갈릴레오의 과학자로서의 삶의 끝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