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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n 30. 2022

시인 김지하

* 표지사진: 젊었을 적의 김지하 시인. 원주에서.


김지하 시인이 이미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어제서야 인터넷에서 보았다. 2022년 5월 8일. 향연 81세. 벌써 2달가량이 지났다. 금년 대선 이후에 한국 뉴스를 끊었기 때문인가. 그래도 나의 지인들 중에 한사람이라도 이 소식을 전했을 법도 한데.. 그 사람들도 한국 뉴스를 다 끊었나.. 아무도 그 소식을 나에게 전한 사람이 없었다.


'김지하'란 이름 석자는 70년대와 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세대에겐 매우 특별하다. 그 시절에, 그 이름 석자는,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왔던 이름이다. 그 시절만 생각하면, 사거후 그 세대들의 조문으로 인터넷을 뒤덮었을 이름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왜..


한겨레신문 최재봉기자가 쓴 조문에는 이런 글이 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곤봉에 맞아 죽은 뒤 그에 항의해 학생·청년들의 분신과 투신 자살이 이어지자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장문의 칼럼을 실어 투쟁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일로 그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민주화 운동 진영과 척을 지게 되었고, 그의 구명 운동이 계기가 되어 결성되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에서도 제명되는 곡절을 겪는다."


난, 1991년 당시 미국 유학 중이었다. 매릴랜드 주 도시 볼티모어 소재의 한 학교였다. 그 학교의 중앙도서관에는 한국 신문들이 배달이 되어 열람실에 배치가 되던 때였다. 내가 처음 갔을때는 오직 보수 신문들만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없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불평/제안을 하여 한겨레신문도 다른 신문들과 같이 배달되어 배치되도록 했었다.


김지하의 그 문제의 칼럼이 나온 직후, 한국에 있던 국문학을 전공하던 작은형과 전화통화를 하는데, 형이 김지하 시집들을 다 불태웠다고 말해왔다. 난 그저 끙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시집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데.. 그 시집들은 내가 한국에서 대학, 대학원을 다닐 때 사서 읽다가, 유학을 나오기 전에 형에게 다 주고 온 시집들이었다. 나의 힘들었던 10-20대 젊은 날들을 견디게 해준 시집인데.. 다 연기로 사라졌다니..


 칼럼이후, 지방선거가 있었고 민주세력은 참패를 하였다.   어느날, 중앙도서관앞 벤치에 사회학과 박사과정이던  선배와 같이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잡담 속에  칼럼이야기가 나왔다. 김지하는 배신자일까라는 소재도 나왔다. ,  칼럼 내용 자체는 맞지 않았을까요란 말을 했었다. 내가 대학시절에 운동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당시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피터지게 싸우던 사람들이  칼럼에 대해 느꼈을 배신감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저 어떤 이념과 운동보다도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나의 순진한 생각때문이었을까. 물론,  하필이면 그놈의 조선일보에  칼럼을 실었는지.. 빌어먹을.


최재봉 기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2001년에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에 나서고 작가회의의 후배 문인들과 화해의 자리도 마련하는 등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보였으나,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는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도 민주화 운동권을 싸잡아서 매도하고 문학 및 민주화 투쟁 동료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막말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음으로써 자신의 ‘변절’을 완성하다시피 하게 된다."


2012년 대선일 당시, 난 독일에 있었다. 물리학실험을 위해 뮌헨 근처의 독일 연구소에서 10일 정도를 머물고 있었다. 대선일 다음날 일어나 인터넷으로 대선결과를 보고 얼마나 실망이 되던지.. 마음이 너무 가라앉아, 기분전환겸, 점심때쯤 뮌헨 대학에 갔었다. 히틀러정권 당시에 일어난 몇 안되는 조직적 저항 중에 하나가 국내에도 잘 알려진 '백장미 사건'이다. 뮌헨대학의 학생들이 반히틀러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하다 잡혀,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배후인물로 후버 교수도 지목이 되어 사형을 당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뮌헨대학은 백장미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대학본부건물 앞 광장을 두 개로 나누어 '숄 플라자'와 '후버 플라자'로 명했다. 그곳에 갔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을 추스릴 수가 있었으니까.


최재봉은 계속 이어 말한다. "독재자 박정희의 철권 통치에 맨몸으로 맞서면서 1960~70년대를 박정희와 김지하의 이인 대결 시대로 만들었던 투사 시인 김지하. 그러나 독재자의 무능하고 부패한 딸에 대한 옹호와 지지로 어처구니없이 훼손된 말년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쉽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지난 것을. 모든 삶에는 공과 과가 혼재해 있다. 우리 각자의 삶에 공이 과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많기를 바랄 뿐이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의 서슬이 퍼렀던 1975년, 백낙청 선생은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은 <민족문학의 현단계>라는 글에서 김지하 시에 대한 평으로 그 글을 맫는다. 그 글은 그 당시의 여러 민족문학 작가들을 소개하며 그 당시의 민족문학의 성과를 짚어보는 글이었다.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를 마지막으로 언급한다. 그 당시 백낙청 선생께도 가장 소중한 글이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았을까. 다음과 같은 평을 한다.

"오늘날 우리의 신음과 탄식과 눈물이 개선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것인지 어떤지는 물론 확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이 낡을 대로 낡고 온갖 때가 낄 대로 낀 단어가 한 탁월한 민족시인의 다음과 같은 작품을 유발했음을 볼 때 우리는 적어도 이제 여기까지 와서 절망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 시 전문을 여기에 적는다.


--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 시인의 명복을 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hzHwIA97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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