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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Jul 03. 2024

731 부대와 이시이 시로 1

*표지사진: 이차대전 후, 731부대원들의 재회모임에서의 이시이 시로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와 윤동주가 교토에서 잡힌 후에 취조를 당할 때 왜 이런 요식행위를 하느냐고 묻자 취조하던 형사가 답한다. ‘(일본은) 문명국이기 때문에 국제법에 따른 절차를 밟는 것이다.’


1차대전 당시에 독일을 필두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미국, 이태리, 프랑스등이 생화학무기를 사용하였다. 그 참사에 대한 국제적 대응의 하나로 1925년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제네바조약이 채택되었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서명을 하였다. 그러니까, 일본 본토에서는 요식적이나마 국제법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했기 때문에, 생체실험을 드러내 놓고 실행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러한 제한없이 큐슈제국 의과대학에서 벌어진 생체해부실험보다 더 냉혹한 세균무기개발을 위한 생체실험과 세균전 실행을 하기위해 일제가 당시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만주에 설치한 부대가 731부대이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기안하고, 731부대를 설립하고, 731부대 사령관으로서 생체실험을 관장하고,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세균무기개발을 강력 추진한 이는 이시이 시로 라는 인물이었다.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곳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731부대의 공로로, 중장(lieutenant general)이라는 별 자리에까지 오른 자다. 731부대는 1939년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핑팡이라는 마을에 설립되어 일제패망까지 활동한 부대를 통상 일컫는데, 사실 이시이부대는 만주사변 이듬해인1932년부터 이미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은 류탸오후 철도를 폭파하고, 그 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으로 조작을 하는데, 이것이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그리고는, 일본군은1932년 2월에 만주 전역을 점령한다. 만주를 점령한 후 곧, 일본정부내의 참모본부(General Staff)와 전쟁부(Ministry for War)는 관동군 소속 세균전 실험장을 세웠다. 역사학자 해리스 셀돈 (Sheldon H. Harris)가 쓴 책, <Factories of Death, Japanese Biological Warfare, 1932-1945, and the American Cover-up>에 의하면, 일본군은 1932년 여름날, 일군의 무장한 일본군인들이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10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베이인허(Beiyinhe) 라는 작은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삼일 안으로 짐을 싸서 떠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큰 상가건물 하나만 자신들의 임시 본부 건물로 남기고, 300여 가구의 집 모두를 불지른다. 불에 탄 폐허의 마을 위에, 중국 농부들의 강제노역으로 세워진 것은 거대한 종마 수용소(Zhong Ma Prison Camp)였다. 이 군인들의 지휘자가 바로 그 당시 소령 이시이 시로였다.


종마 수용소는, 3미터의 높은 철조망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에는 100여개의 건물이 양쪽에 들어섰다. 한쪽에는 감옥, 실험실, 시체들을 처분할 소각장등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사무실, 식당, 막사, 창고, 그리고 주차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이시이와 그의 멤버들은 생체실험을 통한 생화학무기실험을 실행하였다. 이성적이고 조직적인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종마 수용소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에 대한 대부분의 증거들은 파손되어 남아있지 않으나, 여러 증언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배양된 페스트(역병) 박테리아균을 세 명의 중국 공산주의 게릴라들에게 주입하여, 페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찰하였다. 며칠후에 극심한 높은 열에 시달리다가, 세명 모두 생체해부를 당했다. 이시이 그룹이 종마 수용소에서 행한 생체실험들은 주로, 역병이나 콜레라 박테리아를 이용한 실험들이었다. 하바롭스키 재판기록에 실린, 가라사와 도미오의 증언에 의하면, 1939년 이시이가 카라사와에게 자신이 1933-1934년에 만주 산악 게릴라들에게 콜레라와 역병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역병이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한다. 또, 이시이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고, 나중에 중장이 된 사부로 엔도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11월 16일에 자신과 대령 안도와 중위 타치하라와 종마수용소를 방문하여, 독가스 생체실험과 고압전류 생체실험을 목격하였다 한다. phosgene 가스를 한 수용자가 갇힌 밀폐된 공간에 주입하여, 그 수용자가 급성폐렴에 걸리게 되고, 한 수용자에게 청산칼리를 주입하여20분 후에 의식을 잃게 되고, 4만5천볼트의 고압전류를 한 수용자에게 주입하여 타서 죽게하는 실험을 목격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엔도는 1933년 12월 8일에 다시 방문하여, 이시이의 안내로 종마수용소에 설치된 세균전 연구 설비들을 살펴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수용소의 운용비인 20만엔이 과도하지 않다고 일기에 적었다.


이시이 부대가 종마수용소에서 자행한 만행은, 일본군 상부에서 익히 알고 있었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2년 8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일본관동군 부사령관 야수츄구 오카무라는 임기 동안에 이시이 부대를 여러번 방문하여, 이시이 부대의 생체실험 결과들, 특히 동상에관한 생체실험에 감화가 되어, 동상을 입은 수족을 치료하는데는 37도의 물에 잠기게 하는 것이라고 윗 상관에게 레포트에 적어 보고하였다. 종마수용소는 1934년 가을에 문을 닫게 되는데, 2년 동안에 희생된 수용자들의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족히 천명이 넘었다고예상된다.


종마수용소의 실체, 즉 생체실험을 통한 박테리아공장이라는 것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2년 후인 1934년 8월이었다. 한 일본 축제날, 일본군들이 낮술에 잔뜩 취하였을때, 리 (Li)씨 성을 가진 한 포로가 용감하게 술병을 들어 술에 취한 간수의 머리를 내리치고, 감옥열쇠를 빼았아, 감옥 문을 다 열어주었다. 거의 모든 포로들이 탈출을 감행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포로들은 다시 잡혀서, 혹독한 보복을당했다. 하지만, 16명 가량의 포로들은 탈출에 성공한다. 그중 4명은 허기와 추위에 죽고, 나머지 12명은 한 노인을 만나 근처 숲속에 주둔한 게릴라부대에 인도된다. 탈출에 성공한 포로들에 의해 종마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던 잔학한 만행이 그 지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포로탈출사건 이후에, 이시이는 자신의 생화학생체실험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계획한다. 종마수용소에서 얻은 결과들로 관동군지휘부 뿐만아니라, 토오쿄오에 소재한 일본 육군 총사령부에서도 칭송을 받아, 이시이는 더 규모가 큰 시설의 건설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새로 건설된 곳이 종마보다도 하얼빈에 더 가까운 마을 핑팡을 비롯한 주위 마을들에 건설된 731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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